60p. ..나는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다가가곤 했다. 그들이 나를 돌봐주리라는 깊은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다가 이 세상 누구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고 돌봐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마음속의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겉모습은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62~63p. ..보통 사람은 양면가치를 지니고 있고, 두 가지 모순되는 상태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두 상태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한쪽에 있을 때는 다른 쪽의 감정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면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인간의 모순성이나 애매모호함을 용인하지 못한다. 그는 어떤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조화시켜 일정하고 통일성 있게 이해할 수가 없다. 특정한 순간에 좋거나 나쁜 사람일 뿐, 그 중간이나 회색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묘하거나 근소한 차이는 아예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주 힘들게만 이해한다.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모순된 감정들과 이미지들로부터,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경계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분열‘ 기제는 종종 역효과를 가져온다. 성격이라는 옷감 안에서 처음에는 작게 해어졌던 부분이 나중에는 완전히 찢어진다. 즉, 자기 정체감과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이 더욱 극적으로, 더욱 자주 바뀌게 되는 것이다.
63p. ..전부가 아니면 무(無)라는 경계인의 사고방식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이 하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일단 행동을 취하면 되돌릴 수 없다. 예를 들면,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여자가 직장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녀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경계인의 노력 또한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일 때가 많다. 경계성 성격장애가있는 한 대학생의 경우, 정치 캠페인에 깊이 관여하게 되자 모든 수업에서 낙제 점수를 받게 되었다. 다음 학기에 그는 수업에 전념하기 위해 일체의 정치 활동을 그만두었다. 자신의 시간을 두 가지 활동에 나누어 쓸 수 없었던 것이다.
68p.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초래했음을 깨닫게 되면, 즉 이러한 순환이 너무 자주 반복되어서 관계가 더는 손쓸 수 없이 망가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가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관계를 끊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이 끔찍한 과정을 또다시 겪는다.
70~71p. ..경계인들은 자신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모자람이 있다고 느낀다. 앞에서 분열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는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근거로 삼는 것은 상대방과의 가장 최근의 만남이라고 했다. 그들은 관계라는 것을 여러 요소들이 공존하는 통합체로 보지 못한다. 관계란 언제나 "그런데 당신은 최근 나를 위해 뭘 했지?" 라는 질문일 뿐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그들의 자존감은 자신의 최근 업적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남들을 평가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가혹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마음에 드는 경우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 중 일부는 하는 일에서 눈부신 성공을 이루고, 직장과 공동체, 혹은 가정에서 업적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자기가 마치 대사를 외우는 배우 같다고 느낀다.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다.
80p. ...리니핸도 이런 믿음에 동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신체의 90% 이상 부위에 3도 화상을 입은 사람들과 같아요. 정서적인 피부라고 할까, 그것이 거의 없으니 아주 작은 접촉이나 움직임에도 심한 괴로움을 느끼죠."
84p. ..중독성 수치심이란 자신이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전반적인 감각으로서 경험된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한계를 알려주는 감정 같은 게 아니라 존재의 양태, 핵심 정체성 그 자체이다. 중독성 수치심은 자신이 가치 없다는 느낌, 고립감, 공허함, 그리고 완전히 혼자라는 느낌을 준다. 자신에게 노출되는 것, 그것이 중독성 수치심의 핵심에 놓여 있다.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경계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85p. ...반대로, 어떤 경계인들은 자신의 힘을 아예 포기하는 방식으로 무력감에 대처한다. 예를 들어, 군대나 극도로 조직화된 신앙집단같이 모든 선택이 미리 정해지는 삶을 택할 수도 있고, 공포감을 통해 그의 삶을 지배하려는 가학적인 사람과 관계 맺기를 택할 수도 있다.
86p.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달래곤 한다. 비록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심지어는 이미 세상에 없다 하더라도 큰 위안이 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상태를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이라 한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 중 일부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불안할 때 기분 전환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다. 어떤 사람이 바로 곁에 있지 않으면, 정서적인 차원에서 그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87p. ..경계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들 중에 타인을 읽어 내고 그들의 자극점과 약점들을 찾아내는 데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이가 적잖다.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어서, 한 임상전문가는 농담처럼 경계인들을 영매(靈媒)라 부르곤 했다.
128p. ..그 사정은 이렇다. 경계인들은 남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그들에 의해 집어삼켜지거나 통제당할 것이라고 느끼기 쉽다. 그들은 건강한 개인적 경계를 어떻게 세우는지 모를 뿐 아니라 진정한 친밀함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상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껴 떠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무방비로 노출되거나 통제당하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방법으로는 상대에게 시비 걸기,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하지 않기, 아주 극적이거나 격한 행동을 하기 등이 있다. 그러나 거리를 두다 보면 금세 혼자라고 느끼게 된다. 공허감이 심각해지고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도 더욱 강해진다. 그들은 다시 사람들과 가까워지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 같은 순환이 되풀이된다.
158p.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이 도움을 받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의 이득이 장애물보다 클 때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04p. ..개인적 한계 혹은 경계는 어느 지점에서 당신이 끝나고 타인이 시작되는지를 알려준다. 경계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정의한다. 마치 달걀 껍데기처럼, 경계는 당신에게 형태를 주고 당신을 보호한다. 마치 게임의 규칙처럼, 경계는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들을 하도록 도와준다. 건강한 경계는 부드러운 플라스틱처럼 적당히 유연하다. 그것은 휘어지기는 하지만 부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경계가 지나치게 유연하다면 위반과 침범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당신은 다른 사람의 느낌과 책임을 떠맡게 되고 자신의 느낌과 책임은 잃게 될 것이다.
215p.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겉보기엔 정상 같은 상태로 ‘현실‘ 세계를 맞았다. 나에게는 ‘타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경계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나의 미성숙한 자기 개념 안에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나 자신의 확장으로만 보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러듯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학대했다. 어디에서 내가 끝나고 어디에서 이 세상이 시작되는지 몰랐으므로 세상이 곧 나였고 내가 곧 세상이었다.
249p. ...제시는 어린아이같은 감정을 성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그만큼 현실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것이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징이다. 어른처럼 행동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기대하거나,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고 그런 감정을 가진 자신을 꾸짖는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264p. ..싸우고 있는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쓸데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자신의 필요나 욕구, 신념들을 명확하게 말하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보통 그 상황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이런 현상은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에서 다 나타난다. 상대가 경계인이라면 당신이 만드는 변화에 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349~350p. ..상실은―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든, 가족의 해체이든, 소중한 희망과 꿈의 무산이든, 아니면 자식을 잃을지 모르는 위기이든―강력한 불안과 슬픔, 그리고 버림받아 혼자가 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대신 그들은 상실에 대한 슬픔을 분노로 봉인한 채 배우자를 끝없는 다툼에 끌어들임으로써 불가피한 이별을 막아 보려고 애쓴다. 싸움과 언쟁은 두 사람 사이의 접촉을 유지하는 방법인 것이다(비록 부정적인 접촉 방식이긴 하지만). 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이들은 상대방과 화해하는 환상을 버리지 않는다. 과거에도 극적인 상실(부모의 죽음이나 이혼 등)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때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정신적 충격에 대한 반응까지 같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351~352p. ..만약 심리적으로 취약한 경계인이 배우자가 떠난 것을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경계인은 배신과 착취와 음모에 대한 피해망상을 갖게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존스턴과 로즈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결혼생활의 잔해들을 둘러보면서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들은 배우자가 애초부터 자신을 착취하고 버리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믿게 된다." ..그 시점에서, ‘배신을 당한‘ 경계인 배우자는 공격적으로 반응하여 상대를 반격하게 될 수 있다고 존스턴과 로즈비는 말한다. 이 반격은 경계인의 삶에서 핵심적인 강박관념이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비경계인 배우자와 그의 동맹자들은 위험하고 공격적인 사람들로 비칩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으므로 상대에게 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들은 느끼지요. 혹은 더 급박하게,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구호는 이것이지요.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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