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상의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긴 머리를 적당히 뒤로 묶었다는 것과 얼굴이 동그랬다는 것 정도만 어슴푸레 떠오를 뿐이다. 다만 그 하얀 피부는 선명히 기억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피부라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실은 엉덩이 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p.
...도모미는 히데키가 방에 틀어박혀 지내기 시작했을 때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세 살 위 오빠는 예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생활이나 태도에서 무리하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히키코모리가 된 후 비로소 인생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보였고, 아, 이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45p.
...배가 고파 마구 울다가도 젖을 먹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리던 아기 적 히데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이미 어른이 된 아들과 어릴 적 아들을 무의식적으로 겹쳐 보는지도 모른다. 다만 젖꼭지를 물렸을 때의 묘한 감각과 맞을 때의 아픔이 서로 다를 뿐이다. 자식에게 맞을 때, 그 어머니는 지금 이 아이가 운다는 것을 아는지도 모른다.

149p.
...슬픔 때문에 제정신을 잃는 사람은 있어도 외로움 때문에 제정신을 잃는 사람은 없다. 아마 지독히 나약한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외로움 때문에 숨이 막히지는 않는다. 슬픔을 지워주는 것은 결국 시간이지만, 외로움은 그렇지 않다. 슬픔보다는 외로움이 낫다.

198p.
..막 대학에 들어갔을 때, 호리우치라는 여학생에게 핸드폰 번호 좀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지금 핸드폰이 없으니 나중에 가르쳐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교실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그때, 호리우치가 사라진 풍경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따끔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무릎과 팔꿈치 상처에 욕탕의 뜨거운 물이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259~260p.
"...남을 구하고 싶은 욕구와 지배하고 싶은 욕구는 똑같은 거예요. 그런 욕구를 가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혀요. 그런 사람은 상대를 구함으로써 자신도 구원받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자신은 구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자신이 구제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261p.
.."어머니가 당신 문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 자립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까운 사람의 자립은 그 곁에 있는 사람을 구원합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말이죠. 그것만이 가까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길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0p.
.."아니면, 집에 절대 못 돌아갈 수도 있지. 그러니까 항상 자기 자신만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건 중요하단다. 정말 자기 물건 말이야."

75p.
...가석방 전날, 윌리-제이는 페리에게 작별 편지를 썼다. 그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너는 극도의 정열을 지닌 남자고, 굶주렸지만 자신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심하게 좌절했지만 경직된 통일성 속에서도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너는 두 개의 상부구조 사이에 걸쳐 있는 반쪽짜리 세계에 살고 있어. 하나는 자기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파괴이지. 너는 강해. 하지만 너의 힘에는 결함이 있어. 힘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결함은 너의 힘보다 더 강해져서 너를 쓰러뜨릴 거야. 그 결함이 뭐냐고? ‘상황과 전혀 균형이 안 맞는데도 감정적으로 반발심을 폭발시키는 것이지.‘ 왜 그런 걸까? 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거나 만족한 모습을 보면 이런 불합리한 분노가 생기는 걸까? 왜 사람들을 경멸하는 마음과 그들을 상처 입히고 싶은 욕망이 자라나는 걸까? 좋아. 너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겠지. 다른 사람들의 도덕과 행복이 너의 좌절과 분개심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런게 다 네가 마음속에 품고 다니는 무서운 적들이야. 언젠가 때가 되면 총알처럼 파괴력을 드러낼 거야. 자비롭게도 총알은 상대방을 죽여. 이 박테리아는 나이를 먹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자국을 질질 남기며 찢기고 일그러진 짐승을 남기는 거야. 존재 안에는 여전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겠지만, 경멸과 증오를 한 다발 던져주면 그 짐승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어. 이 존재는 성공적으로 뭔가 쌓아올리겠지만, 성공을 쌓아올리는 건 아닐걸. 자기 자신이 바로 적이고,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하게 할 테니까.

83p.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차가운 하늘 아래 끝도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풍경은 저 멀리 깜빡이는 농장의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쓸쓸해 보였다. 페리는 텍사스 평원과 네바다 사막이 싫은 만큼 이런 풍경도 싫었다. 수평으로 쭉 뻗어 있고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공간을 보면 광장공포증과 더불어 우울한 기분이 일었다. 항구야말로 페리가 진심으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북적북적하고, 쩔렁대는 소리가 들리고, 배에서 딸각이는 소리, 하수 냄새가 풍겨오는 요코하마 같은 도시가 좋았다. 페리는 한국전쟁 때 미군 사병으로 근무하며 요코하마에서 여름을 났다.

115p.
.."난 무섭구나, 머틀."
.."뭐가요? 때가 되면 다 가는 거예요. 운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부인은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몇 방울 고인 것을 보았다.
.."호머가 죽었을 때 내 안에 있던 공포심은 다 바닥나버렸어요. 슬픔도 모두 다요. 여기 근처에 사는 누가 내 목을 잘라버린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에게 행운을 빌어줄 거예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영겁에는 모두 다 마찬가지예요. 기억하세요. 새 한 마리가 모든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모두 다 바다 건너편에 옮겨놓으면 그게 바로 영겁의 시작이라고요. 그러니까 코를 푸세요."

142p.
.."이런 일이 클러터 가족 말고 다른 집에 일어났더라면 이런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 집 사람들보다 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면요. 부유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죠. 그 집 식구들은 여기 사람들이 정말로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다니....... 그건 마치 신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 가는 거죠. 두려운 것도 두려운 거지만, 그보다는 좌절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아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가장 간단하고 가장 추악한 이유가. 이제까지 이웃과 오랜 친구와 함께 평화롭게 모여 살던 이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사람들은 살인자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고인의 형제인 아서 클러터가 개진한 의견에 동의했다. 11월 17일 가든시티 호텔 로비에서 아서 클러터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이 다 해결되면, 이 짓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건 간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16킬로미터 안쪽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습니다."

148p.
.."그 불길한 예감 말인데, 그럼 얘기 좀 해봐. 네가 그런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칠 걸 미리 알았다면 왜 막지 않은 거야? 오토바이를 안 탔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 아냐, 내 말이 틀리냐?"
..이 또한 페리가 오랫동안 숙고한 수수께끼기도 했다.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 해답은 간단하기는 해도 조금 모호했다.
.."그럴 수는 없지. 한번 일이 일어나기로 되어 있으면, 오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게 다야. 그러지 않으면 일어나는 거지. 상황 따라 달라. 살아 있는 한, 항상 뭔가 도사린 일이 있는 법이야. 그게 나쁜 일이고, 나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뭘 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그만 살 수는 없잖아. 내가 꾼 꿈 같은 거야.... "

176p.
..페리가 ‘우리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인정했다. 결국 사람이 ‘옳게만 행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잘못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특히 더욱 그랬다. 자기 가족을 보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315p.
..성가대가 소리 높여 찬양하는 노랫소리를 듣자 페리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음악이 끝난 뒤에도 계속 흘렀다. 이런 일은 별로 드물지도 않아 페리가 괴로움을 느낄 때면 그 때문에 ‘어마어마한 매력에 홀리는 것‘ 즉, 자살을 하게 될 가능성을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주 있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페리는 자살할 생각을 자주 했었으나,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다른 적을 벌주고자 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감상적인 공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청년이 되었을 때부터는 삶을 끝내고자 하는 계획은 점점 환상적인 면을 잃어갔다. 그것이 지미의 ‘해결책‘이었다는 걸 페리는 기억해야만 했다. 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렇게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447p.
.."내 친구 윌리-제이가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 그 친구는 모든 범죄는 단지 ‘절도의 변형‘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했었어. 살인도 포함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정말 대도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봐, 컬리번. 나는 그 사람들을 죽였어...."

 459~460p.
"......이러한 특성에 더해서, 진찰 대상자는 사고 회로 이상의 초기증세를 약간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을 조직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생각을 검토하거나 요약할 수가 없으며 점점 몰입하다가 가끔은 사소한 부분에서 헤매기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은 현실과 전혀 상관없어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스미스는 타인과 감정적으로 밀접하게 맺고 있는 관계가 거의 없고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작은 위기가 찾아오면 버티지 못하고 금방 끊겨버립니다. 몇 안 되는 소수의 친구 집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 생명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어떤 분야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분리되거나 무감동하다는 사실은 정신 이상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정확한 정신 감정 진단 결과를 얻으려면 더 포괄적인 검사가 필요하지만, 현재 성격 구조상으로만 봐서는 편집증적인 정신분열증 환자의 반응과 거의 유사합니다."

532p.
...작품의 청자이자 화자인 카포티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성적多聲的 세계를 솜씨 있게 창조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카포티는 그것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은 또한 카포티의 목소리기도 했다. 평생 남에게 주목받는 인생을 살고 싶어했던 카포티는 이 작품을 통해서 확실히 주목받는 방법을 발견해낸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기술, 이는 카포티가 이뤄낸 최고의 업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현은 일주일 중 금요일에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주말을 앞두었다는 그 쾌락은 평일의 고난과 시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의식이 꺼진 동안의 삶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상태를 바라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죽고 싶지도 않고 생활 속에 존재하고도 싶지만, 그 삶을 목도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만 깨어 있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김현은 그런 부류였다. 그의 인생관이 어떻든 윤희랑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성을 보이게 된 데에는 미약하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유소현은 마법공학과에서 배운 신화 생물의 생태를 떠올렸어. 날개의 점막이야말로 용의 유전자가 얼마나 많이 발현되었는지 보여 주는 상징이었지. 원래 용날개의 점막은 어미 용이 직접 찢어 주는 거거든. 그래야 새끼 용이 날 수 있게 돼. 하지만 용순이에게는 어미가 없었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p.
..타인의 책상 앞에 앉으면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어쩐지 뒤가 켕긴다. 꼭 그 인물로 행세하는 기분이다.

126p.
..비에 젖은 번체자 간판. 축축한 거리, 습한 도시 냄새.
..이곳은 데자뷔의 거리다. 어떤 것을 봐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컨대 작은 노점에서 과자를 사는 소녀, 흰 하복에 검정 가죽 구두, 예컨대 스포츠 백을 배낭처럼 등에 지고 농구공을 튀기며 걸어가는 소년, 예컨대 가게 앞 테이블에서 쌀국수를 먹는 어머니와 아이. 예컨대 건어물 가게 앞에 걸터앉아 수다 떠는 할머니.
..하나하나가 어쩌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인생처럼 느껴진다.

133p.
.."TAIPEI는 기억의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시는 어디나 그렇지만, TAIPEI는 여러 이국의 기억까지 지니고 있지. 난 이곳에서 거리를 걷다 보면 ‘추억‘에 집어삼켜질 것 같아. ‘추억‘은 개인적인 것일 텐데, 나만의 것일 텐데, 이렇게 골목을 걷다 보면 TAIPEI의 ‘추억‘이 사방에서 성난 물결처럼 밀려들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만 같네."
.."예컨대 저기 기대 세워놓은 자전거. 예컨대 포장길에 나란히 선 일륜차의 번호판 중 하나. 허물어져가는 붉은 벽돌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전깃줄과 넝쿨. 폐가의 초인종과 잠긴 우편함. 잠깐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눈으로, 모공으로 ‘추억‘이 침입해. 나 자신이 TAIPEI ‘추억‘의 일부가 되고 말아."

288p.
..술과 책의 판매도 호조다. 야간외출금지령 탓에 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는 한편 아침까지 밖에서 노는 사람도 오히려 늘었다. 라이프스타일이 양극화되었다. 금욕적인 타입과 은밀히 향락을 즐기는 타입. 원래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라고 금지령 덕에 밤놀이가 전보다 더 재미있어졌어, 하는 일본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책을 읽게 하려면 책을 금지하는 게 제일이라고 마유미가 말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