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40p.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사과랑 과자, 초콜릿, 동전 등을 길가 풀숲에 던져버렸다.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은 버릴 도리가 없었다.

365p.
.."그런데 루카스 넌, 아그네스의 동생을 사랑해. 난 세 사람이 부엌에 들어올 때 저들이 바로 진짜 한 가족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 부모가 금발이고 잘생겼으면, 아이도 당연히 금발이고 잘생겨야 하니까. 그런데 난, 난 가족이 없어. 난 엄마도 아빠도 없어, 난 금발도 아니고, 못생기고, 불구야."

370p.
.."마티아스에게는 잘된 일이다. 그는 영원히 초등학교 일 학년생이고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380p.
.."우리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했거든요. 완전히 분리되기로 했던겁니다. 국경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묵까지 지켰던 거지요."

394p.
.."제가 관심 있는 것은요, 당신이 쓰시는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하는 점이에요."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545p.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559p.
..창작/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

560p.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5p.
..유행은 버리고 싶고, 체형은 지키고 싶다. 좋은 소재의 기본 디자인을 사고, 세탁과 수선을 하며 옷을 잘 관리하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은 분명 여러 종류다. 옷장 속에 나와 함께 나이 든 질 좋은 코트와 머플러가 내겐 그 증거다. 그래서 옷이 망가져서가 아닌, 체형의 변화가 같은 옷을 입을 수 없게 할 거란 생각을 한다. 지금도 조금씩 달라지는 몸에 확연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몸 자체에 신경을 쓴다. 허리를 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골반이 비틀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꼬지 않고, 요가를 하고 자주 걸어 다닌다. 예전보다 몸 자체에 신경 쓰며 살아도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지는 전혀 알 수 없다.

106p.
...진짜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몸과 마음에 뭉치고 쌓인 것을 풀어내야 생기는 것임을 예전에는 몰랐다.

158p.
...긍정의 메시지를 모을수록 부정은 약해진다. 보통 칭찬은 휘발성이 강하고 악담이나 상처는 오래 남는다. 감정이 가진 힘의 세기가 다르다. 칭찬을 모아둔다. 내가 자신감을 잃고 비틀거릴 때 꺼내볼 수 있도록....

241~242p.
...어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생략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지 곱씹어본다. 누가 되었든 상대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인사하는 문화가 아니어서일까. 윗사람이 아렛사람의 인사를 받는 문화에서 살아서인가 싶었다. 서비스 구매자일 때는 인사를 받기만 해도 문제없는 거라는 인식. 갑자기 부끄럽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더는 인사를 생략하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인사는 당신이 거기 있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표시이고 당신이 오늘 괜찮은지 궁금하고 괜찮다면 내 용건을 이제부터 말하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법인데 그걸 모른척했다. 나는 타인에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실상 타인이 낯설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인사를 먼저 하게 된 뒤로 나는 낯선 사람이 껄끄럽지 않다.

250p.
..표정에서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 좋다. 뭔가에 사로잡혀서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사람, 우직하게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 열정적인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힘든 일을 털어놓을 때도 결국 긍정적인 말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연민은 살짝 스쳐갈 정도로만, 남을 비난하는데 소중한 시간과 체력을 절대 낭비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냉소적인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고 싶은 것과는 반대다. 그러고 보면 유독 담백한 사람에게 끌린다. 과장 없이 말하고, 자신의 의견은 있되 상대에게 바라는 건 없다. 무엇 하나라도 더 얻어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는다. 사사로운 욕심 없는 사람은 쉬이 만날 수 없다.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 귀한 사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8p.
...경계인은 감정을 적절하게 분출하도록 해주는 응고 체계가 결여돼 있다. 일종의 감정 혈우병을 앓는 셈이다. 이들의 연약한 ‘피부‘를 찌르면 감정적 출혈이 멈추지 않아 영원히 고통받는다.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일은 낯선 경험이다.

66p.
..‘대상항상성‘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대상항상성이란 상대를 다양한 면을 지닌 인격체로 이해하면서도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을 일관적인 기준으로 연관해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경계성에 갇힌 사람들은 광범위하게 지속되는 상호 소통이 아닌 가장 최근에 만난 모습을 토대로 상대방을 기억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 예측 가능하고 지속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마치 특정인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하듯 반응한다.

81p.
..드물지만 자기 처벌이 좀 더 간접적인 경우도 있다. 경계인은 반복되는 ‘표면적인 사고quasi accidents‘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본인이 직접 잦은 싸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폭력을 휘둘렀다고 여겨서 싸움에 직접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150p.
..이는 경계인이 규칙적인 생활 방식에 적응하다 보니 이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과도한 음주나 자살 위협과 같은 극적인 제스처를 주기적으로 표출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경계인도 에너지나 기력이 줄어들어 빠르게 변하는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는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 대부분의 경계인은 치료 유무와 관계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진다. 실제로 대부분은 더 이상 아홉 가지 경계성 성격장애 측정 기준 중 다섯 가지를 충족하지 못하므로 ‘치료된‘ 상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경계인과 인생을 함께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더 잘 용인하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도 예측할 수 있게 되므로 경계인을 대하기가 더 쉬워지고 그들도 건강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

191p.
..마조히즘은 경계인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주된 특질이다. 의존성과 고통이 결합돼 비슷한 고통인 ‘사랑의 상처‘를 끌어낸다. 경계성 환자가 어린아이라면 어머니나 주요 보호자와 성숙한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면서 고통과 혼란을 경험한다. 나중에는 배우자, 친구, 스승, 고용주, 성직자, 의사 등 다른 파트너와 이 혼란을 이어나간다. 비난과 학대는 경계인에게 가치 없는 자기 이미지를 강화해줄 뿐이다.

204p.
..사라진 아버지 증후군은 병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혼이나 사별로 고통받는 가족 안에서 종종 어머니는 이상적인 부모가 돼 보상하려는 심리를 보이므로 자녀의 모든 삶에 관여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녀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할 기회가 줄어든다.
..그런데 비록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사례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녀가 된다. 아이는 아버지의 부재를 겪으면서 어머니와 공생하려는 집중력이 높아진다. 따라서 아이는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관점에 따라 자라고 영원히 어머니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환상을 가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자녀의 성장과 개인화를 방해하고 개입하게 되므로 BPD의 씨앗을 뿌리는것과 마찬가지다.

230p.
..경계성 환자는 발전해나가면서 더 편안하고 믿을 만한 의존성에 정착한다. 그렇지만 치료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항상 관계 속에서 다시 혼란을 느낀다. 과거의 기능 방식에 대해 크게 슬퍼하며 앞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는 필요에 분개한다. 즉 호수에서 수영하다가 이미 절반을 넘게 건너와 되돌아가는 것보다 끝까지 가서 쉬는 편이 낫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288p.
..이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브레이크‘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사람의 정신적 브레이크는 기분이나 행동의 정점에서 조금씩 내려와 하강의 ‘중간 지점‘에 멈추게 해준다. 하지만 경계성 환자는 자신의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거라고 두려워하며 멈출 수 없다고 믿기에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점진적인 변화는 자동 반사라는 변화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경계성 환자는 어린아이가 ‘눈 깜박이기‘나 ‘웃기기‘ 같은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사 작용은 몇 년에 걸쳐 생성되는 것으로 의식적이고 동기가 부여된 노력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

299p.
..경계인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나와 타인에 대해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태도다.
..경계인은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자신을 A+ 아니면 F로 평가한다. 또한 F로부터 배우기보다는 이를 주홍글씨로 새기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들은 자신이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행동의 유형을 인식하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3p.
..경비원을 피해가며 은밀하게 숨겨진 도시의 모습을 촬영한 덕분에 우리는 잃은 줄도 몰랐던 것들을 되찾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간들을 되찾는다. 따라서 도시탐험은 탐험가 스스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된다. 출입금지가 당연한 조처라고 간주되는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면,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권력과 도시 공간 사이의 관계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뿐 아니라 도시탐험은 참여보다 방관을 종용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명령에 대한 전복적 대응이다. ‘피터‘라는 탐험가의 거침없는 표현대로 ‘사람들이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짓‘이라고도 할 수 있다.

52p.
...도시탐험에 착수하면서 분명해진 사실은, 현대 세계의 도시가 감각의 과부하와 나날이 심해지는 보안 강화가 규범화된 곳, 수용 가능한 행동 양식이라고는 노동 아니면 사전에 패키지로 묶인 ‘오락‘에 돈을 쓰는 것밖에 없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도시의 이러한 제약은 너무나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거의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모험은 이러한 제약을 가시화시켰다. 모험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집념의 탐험가들만 접근할 수 있는 버려진 ‘놀이터‘와 기간시설 네트워크들을 폭로했다. 그럼으로써 지역의 경계와 CCTV 시스템, 벽과 담장과 경비원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놀지 못할 수 있다는 통념을 기반부터 무너뜨릴 수 있었다.

77p.
..도시탐험가들은 대부분 폐허 공간에 관심이 생기면서 공간해킹에 대해 열정을 갖게 된다. 이 공간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특정한 미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폐허 공간의 미적 가치란, 나날이 확장되어 밀려드는 주변 도시환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가능성, 그리고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미래의 모습을 암시하는 힘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간존재의 유한함을 명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이다. 쇠락에 대한 매혹이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음에도, 도시탐험가들은 그런 공간을 찾아서 기록하는 자신의 충동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12p.
..도시탐험가가 탐험하는 곳들은 도시가 관리하는 장소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매끈한 다듬질‘이 결여되어 있다. 폐건물 속 물건들은 때로는수백 년 된 먼지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다. 시간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병을 발견하면 당신은 거기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다가가서 카메라 렌즈로 병에 초점을 맞추고, 자세를 바꿀 때마다 빛이 여러가지 패턴으로 병에 굴절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러면 마치 활기찬 생명체가 층층이 드러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문득 자기 혼자만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모습이 이곳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조용히 앉는다. 그리고 비둘기들의 구구 소리, 나뭇가지가 깨진 창유리를 계속해서 긁어대는 오싹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당신은 자신을 그 공간에 새겨 넣고픈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존재의 긴장은 펑 터질 때까지 그대로 축적된다. 당신은 천천히 손가락에 침을 묻힌 다음, 병의 옆면을 아래로 문지른다. 그리고 그 모든 과거의 세월을 몸속에 집어넣고, 당신의 침 속에 든 DNA가 부서진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지켜본다. 이제 새로운 층 하나가 낡고 오래된 층으로 새겨 들어간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간이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 같은 공간에서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목해야 할 순간, ‘베카‘가 내게 말했듯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순간‘이다.

130p.
..동유럽을 탐험할 때 생겨났던 특정한 죄의식은 버려진 공간을 바라보는 상이한 가치체계가 충돌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더 큰 긴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징인 것 같았다. 서쪽 진영 탐험가가 동쪽 진영 지역민을 만나는 곳에서 욕망은 실용을 만나고, 향수는 기대를 만나고, 유동성은 정착을 만난다. 우리는 자신이 서방의 특징을 이곳에 끌어들였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그 특징에 깃든 사회적 조건화를 완전히 지울 순 없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다....

132p.
...황량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이 이미지 저변에는 어떤 황홀감이 존재한다. 그 황홀감의 정체란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생활과 문화적 기대로부터 해방되어 의존하고 걱정해야 할 유일한 존재가 자신뿐이 되는 상황에서 오는 자유다.

171p.
..사진이 찍히는 순간 댄은 자신의 경험을 분리시키고, 살균하고, 상업화하려는 자들, 도시를 만질 장소가 아니라 그저 눈에 담는 구경거리의 웅장한 무덤으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해킹했고 자신만의 모서리를 찾아냈다.
..엣지워크라는 용어는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이라는 곤조 저널리스트(취재 대상에 적극 개입하여 1인칭 시점으로 기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옮긴이)가 저서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포와 혐오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에서 특정 사람들이 느끼는 욕구나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한계까지 다다르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엣지워크의 개념은 가능한 한 베이지 말고—최소한 깊이 베이지는 말고—모서리 가까이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톰슨에게 이것은 악명 높은 폭주족인 헬스엔젤스바이커 무리Hell‘s Angels Biker gang와 민족지학 연구 작업을 하거나, 상상도 못할 성분을 조합해놓은 이름도 기원도 모르는 마약을 복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218p.
...탐험은 공간보다는 경계, 장소보다는 틈새를 보는 작업이 되어갔다....

232~233p.
..나는 카타콤을 기어 다니면서 존재의 압력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인류학자인 케이틀린 스튜어트Kathleen Stewart는 이런 순간을 좀 더 평범한 맥락에서 환경감응 atmosphere attunement, 혹은 특정 결과로 귀결되거나 혹은 귀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종류의 사건을 관통할 때의 번득임이라 묘사한다. 카타콤이 지닌 성질들은 이런 감응을 풍성하게 일으킨다. 카타콤은 시간의 유령들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공간이며, 이들은 우리가 경계를 넘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소위 카타콤에서의 환경감응은 분명 격렬한 느낌이지만, 단순한 감정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 경험은 각 구성 요소의 총합 이상이기도, 이하이기도 하다. 도시탐험은 근본적으로 몸으로 하는 활동이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형언 불가능한 것, 감각을 넘어서는 것에 가깝기도 하다. 요컨대 여기서 말하는 ‘체화embodiment‘란 무엇보다 감정과 느낌과 정서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다....

314p.
...위대한 모험을 하는 최초의 탐험가가 되려는 탐험가들의 욕망을 되돌아봤다. 그 욕망의 본질은 ‘최초‘가 됨으로써 우월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최초가 되는 과정 속에서 얻는 커다란 보람을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령 동굴 탐험가나 산악 등반가들이 느끼는 욕망도 이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만의 엣지를 벼려나가고 싶어 하며, 더 이상 엣지를 찾을 수 없을 때 새로운 엣지를 찾아 전진할 뿐이다. 새로운 엣지를 찾아 전진하지 못할 경우, 한때 그렇게도 우리를 들뜨게 했던 흥밋거리들은 사무직 업무만큼이나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제는 대상의 한계를 소상히 지적해 주려는 태도에서도 나온다. 토론이나 논설에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그 대상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밝혀 드러내면 된다. 이것을 비난과 혼동하면 안 된다. 학술서나 논문은 대개 비판서다. 그래서 같은 주제에 관해 앞서 연구한 저작물을 쭉 검토하며 시작한다. 칸트는 인간의 앎이 지닌 능력 한계와 가능성을 규정하려고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을 지었다. 여기에 나온 비판이라는 말은 한계란 말과 뜻이 비슷하다. 『순수이성 비판』은 인간이 보고 들으며 아는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설명한 책이다. 『실천이성 비판』은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려는 앎의 가능성과 한계를 규정한 책이다.

..아는 만큼 자기 이야기를 반듯하게 펼쳐 놓으면 공동체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서 조화로운 연관이 드러날 것이다. 특수 없는 보편은 없고 보편 없는 특수도 드물기 때문이다. 나를 우리라고 확장하는 일은 늦출수록 좋다. 허먼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포경선이 내 예일이며 하버드다." 단테는 『신곡』에 ‘인생을 반 정도 살면 누구나 암울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고 적지 않고 이렇게 적었다. "인생의 반고비에서 나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1인칭은 힘이 세다.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문장을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 독자에 대한 봉사다. 감당할 수 있는 1인칭 관점에서 시작하여 점차 외연을 확대하는 태도가 좋다....

.."훌륭함의 종류는 한 가지이나 나쁨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라고 말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적은 작가 톨스토이는 다른 조건에서 출발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플라톤의 책 해설에 톨스토이를 언급해도 되고, 톨스토이의 책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도 괜찮을것 같다. 훌륭한 대본은 서로 돕는다.

..플라톤의 『국가』 10권에 이런 내용이 있다. ‘훌륭함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훌륭함을 귀하게 여기는 이는 훌륭함을 많이 갖고 천하게 여기는 이는 적게 갖는다.‘ 이 훌륭함을 많이 갖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번역자로서 소명을 다해야 한다. 귀찮고 번거로우며 들어가기 힘든 그 좁은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노라면, 당신은 어느덧 전혀 만날 수 없을줄만 알았던 두 맥락을 잘 연결하고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