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
..경비원을 피해가며 은밀하게 숨겨진 도시의 모습을 촬영한 덕분에 우리는 잃은 줄도 몰랐던 것들을 되찾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간들을 되찾는다. 따라서 도시탐험은 탐험가 스스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된다. 출입금지가 당연한 조처라고 간주되는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면,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권력과 도시 공간 사이의 관계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뿐 아니라 도시탐험은 참여보다 방관을 종용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명령에 대한 전복적 대응이다. ‘피터‘라는 탐험가의 거침없는 표현대로 ‘사람들이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짓‘이라고도 할 수 있다.

52p.
...도시탐험에 착수하면서 분명해진 사실은, 현대 세계의 도시가 감각의 과부하와 나날이 심해지는 보안 강화가 규범화된 곳, 수용 가능한 행동 양식이라고는 노동 아니면 사전에 패키지로 묶인 ‘오락‘에 돈을 쓰는 것밖에 없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도시의 이러한 제약은 너무나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거의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모험은 이러한 제약을 가시화시켰다. 모험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집념의 탐험가들만 접근할 수 있는 버려진 ‘놀이터‘와 기간시설 네트워크들을 폭로했다. 그럼으로써 지역의 경계와 CCTV 시스템, 벽과 담장과 경비원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놀지 못할 수 있다는 통념을 기반부터 무너뜨릴 수 있었다.

77p.
..도시탐험가들은 대부분 폐허 공간에 관심이 생기면서 공간해킹에 대해 열정을 갖게 된다. 이 공간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특정한 미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폐허 공간의 미적 가치란, 나날이 확장되어 밀려드는 주변 도시환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가능성, 그리고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미래의 모습을 암시하는 힘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간존재의 유한함을 명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이다. 쇠락에 대한 매혹이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음에도, 도시탐험가들은 그런 공간을 찾아서 기록하는 자신의 충동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12p.
..도시탐험가가 탐험하는 곳들은 도시가 관리하는 장소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매끈한 다듬질‘이 결여되어 있다. 폐건물 속 물건들은 때로는수백 년 된 먼지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다. 시간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병을 발견하면 당신은 거기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다가가서 카메라 렌즈로 병에 초점을 맞추고, 자세를 바꿀 때마다 빛이 여러가지 패턴으로 병에 굴절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러면 마치 활기찬 생명체가 층층이 드러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문득 자기 혼자만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모습이 이곳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조용히 앉는다. 그리고 비둘기들의 구구 소리, 나뭇가지가 깨진 창유리를 계속해서 긁어대는 오싹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당신은 자신을 그 공간에 새겨 넣고픈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존재의 긴장은 펑 터질 때까지 그대로 축적된다. 당신은 천천히 손가락에 침을 묻힌 다음, 병의 옆면을 아래로 문지른다. 그리고 그 모든 과거의 세월을 몸속에 집어넣고, 당신의 침 속에 든 DNA가 부서진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지켜본다. 이제 새로운 층 하나가 낡고 오래된 층으로 새겨 들어간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간이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 같은 공간에서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목해야 할 순간, ‘베카‘가 내게 말했듯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순간‘이다.

130p.
..동유럽을 탐험할 때 생겨났던 특정한 죄의식은 버려진 공간을 바라보는 상이한 가치체계가 충돌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더 큰 긴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징인 것 같았다. 서쪽 진영 탐험가가 동쪽 진영 지역민을 만나는 곳에서 욕망은 실용을 만나고, 향수는 기대를 만나고, 유동성은 정착을 만난다. 우리는 자신이 서방의 특징을 이곳에 끌어들였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그 특징에 깃든 사회적 조건화를 완전히 지울 순 없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다....

132p.
...황량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이 이미지 저변에는 어떤 황홀감이 존재한다. 그 황홀감의 정체란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생활과 문화적 기대로부터 해방되어 의존하고 걱정해야 할 유일한 존재가 자신뿐이 되는 상황에서 오는 자유다.

171p.
..사진이 찍히는 순간 댄은 자신의 경험을 분리시키고, 살균하고, 상업화하려는 자들, 도시를 만질 장소가 아니라 그저 눈에 담는 구경거리의 웅장한 무덤으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해킹했고 자신만의 모서리를 찾아냈다.
..엣지워크라는 용어는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이라는 곤조 저널리스트(취재 대상에 적극 개입하여 1인칭 시점으로 기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옮긴이)가 저서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포와 혐오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에서 특정 사람들이 느끼는 욕구나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한계까지 다다르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엣지워크의 개념은 가능한 한 베이지 말고—최소한 깊이 베이지는 말고—모서리 가까이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톰슨에게 이것은 악명 높은 폭주족인 헬스엔젤스바이커 무리Hell‘s Angels Biker gang와 민족지학 연구 작업을 하거나, 상상도 못할 성분을 조합해놓은 이름도 기원도 모르는 마약을 복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218p.
...탐험은 공간보다는 경계, 장소보다는 틈새를 보는 작업이 되어갔다....

232~233p.
..나는 카타콤을 기어 다니면서 존재의 압력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인류학자인 케이틀린 스튜어트Kathleen Stewart는 이런 순간을 좀 더 평범한 맥락에서 환경감응 atmosphere attunement, 혹은 특정 결과로 귀결되거나 혹은 귀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종류의 사건을 관통할 때의 번득임이라 묘사한다. 카타콤이 지닌 성질들은 이런 감응을 풍성하게 일으킨다. 카타콤은 시간의 유령들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공간이며, 이들은 우리가 경계를 넘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소위 카타콤에서의 환경감응은 분명 격렬한 느낌이지만, 단순한 감정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 경험은 각 구성 요소의 총합 이상이기도, 이하이기도 하다. 도시탐험은 근본적으로 몸으로 하는 활동이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형언 불가능한 것, 감각을 넘어서는 것에 가깝기도 하다. 요컨대 여기서 말하는 ‘체화embodiment‘란 무엇보다 감정과 느낌과 정서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다....

314p.
...위대한 모험을 하는 최초의 탐험가가 되려는 탐험가들의 욕망을 되돌아봤다. 그 욕망의 본질은 ‘최초‘가 됨으로써 우월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최초가 되는 과정 속에서 얻는 커다란 보람을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령 동굴 탐험가나 산악 등반가들이 느끼는 욕망도 이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만의 엣지를 벼려나가고 싶어 하며, 더 이상 엣지를 찾을 수 없을 때 새로운 엣지를 찾아 전진할 뿐이다. 새로운 엣지를 찾아 전진하지 못할 경우, 한때 그렇게도 우리를 들뜨게 했던 흥밋거리들은 사무직 업무만큼이나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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