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 ..엄마 사진을 보면서 고향의 밤이 깊어간다. 앨범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따라오는 엄마의 해설을 응, 응, 하고 듣다 보면 도쿄에서 한 시간 코스 발 마사지를 받을 때보다 더 편안해진다. ..이럴 때 나는 엄마가 좀 부럽다. 늙어서 내 사진을 찬찬이 들여다봐줄 사람이 나한테는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것대로 별수 없지만 옆에서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면 약간 쓸쓸해진다.
63p. ..엄마와 여행하면 좋은 걸 좋다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영혼 없는 칭찬도 겉발림도 아닌지라 주위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실은 나도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좋아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 같이 여행하고 싶어진다.
71p. ..이런 것 저런 것을 먹으면서 어른이 되었다. 뭘 먹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 또한 어른이 됐을 때 마음을 튼튼히 해주는 게 아닐까.
99p.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을 떠올리면 번번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지금은 외동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혼자니까 할머니도 열심히 보살필 수 있어. 형제가 몇이나 된들 누가 모시느냐로 싸우는 집도 있고, 엄마는 혼자라 다행이야." ..그러고는 슬쩍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네도 싸울지도 모르지." ..부모님 병간호 문제로 싸우지 않을까 걱정이나 시키는 우리는 불효녀 자매다. .."그럴 일 없어, 내가 다 할 거니까"라고 선언하는 게 어쩐지 위선 같아서 나는 그때 그저 묵묵히 있었다. ..할머니 장례식 때 엄마는 많이 울었다. 많이 울었지만, 할 일을 다 했다는 뿌듯한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146~147p. ..동물을 살뜰히 보살피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나는 늘 안심했다. ..엄마의 사랑이 작은 동물들에게 향하는 게 기뻤다.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알았을 터다. 알았다고 할까, 절로 느꼈다고 할까. ..기니피그며 병아리며 비둘기며 다람쥐며. ..그 애들을 엄마가 아무리 예뻐한들 그보다 몇 갑절에 몇 갑절 나를 좋아한다는 걸. 지금 다정하게 기니피그를 쓰다듬는다 한들 엄마한테는 뭐니뭐니 해도 두 딸이 제일 귀하다는 걸. ..아이는 조그만 머리로 수시로 확인하려 든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언제나 알고 싶어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둥지에서 떨어진 쇠약한 새끼 제비를 엄마가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수건으로 따듯하게 감싸고 모이를 먹였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새끼 제비 한 마리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 나는 천천히 배웠던 게 아닐까.
157p. ..엄마와의 추억, ‘잘 기억하시네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면 내가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그 너머에는 아낌없이 쏟아졌을 엄마의 사랑이 조용히 잠들어 있다. 하나하나 확인하지 못해도 내 맘 깊숙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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