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그의 신체의 더러움과 그라고 하는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판자에 들러붙은 더러움과 같다. 공원 벤치 위에서 부랑자와 섞여 노숙을 해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머릿속이 새카만 와중에 이런 한 줄기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오늘은 만우절이잖아."
..그래 , 만우절이다. 이건 다케다 씨 일생일대의 헛소문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그토록 헛소문을 퍼트리던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고 메마르고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 다케다 씨는 그러나 결연한 모습으로 하늘 한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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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점잔을 빼면서도 자기애가 드러나는 바람에 거의 패러디에 가까운 그의 말들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말에서 용서와 구원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무의식적인 것이리라. 그런데 니콜라는 대체 무엇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마 자기 자신과 자신을 과장하는 데에만 온통 바쳐온 허울뿐인 삶에 대한 것이겠지. 나는 거기에 타인을 파괴한 죄를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독신이기에 아내도, 나를 빼닮은 아이도 없다. 내 이름으로 발표된 문학작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남자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죽음은 무화과 열매가 땅에 떨어져 말라빠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비서만 눈물 몇 방울을 흘리겠지. 어쩌면 니콜라의 아들, 내가 사랑하는 피터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피터는 나를 필요로 한다. 나는 피터가 나를 필요로 하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눈부신 태양도 한껏 물오르는 봄날의 푸르름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마치 내 피가 얼어붙은 듯했다. 나를 감동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드물게나마 환희를 느끼는 일도 없었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광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숨을 쉬고, 나 자신, 즉 내 자아가 진정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알게 되기를 두려워하면서 나 자신 속에 침잠되어 지낼 뿐이었다....

..혼자 길을 걸어가다보면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이 많다. 길을 묻는 사람들은 흐릿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흐릿하고 생기 없는 사람들은 거리의 표지판만큼이나 중용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보다.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세계에 속하고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 요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걸었고 나의 하루하루는 수난이나 다름없었다. 활기가 배제된 영혼의 수난이었다.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빛이 꺼진 사람들도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마키아벨리적이고 한없는 내 고통은 복수를 지향하는 은밀한 음모 속에 미묘하게 녹아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덜커덕하는 소리가 나면서 기억의 저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시절에 공부한 인도-유럽어의 어근에 관한 기억이었다. ‘카드(kad)’라는 단어는 증오와 고통을 동시에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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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이륙한 뒤였고 우린 비행기 여행이라는 특별한 거품 속에 있었다. 혹한의 고도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지만 탁한 공기와 푹신한 의자, 엔진의 지속적인 소음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내가 살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죠? 사람들 생각처럼 살인이 비도덕적인 일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정말 그렇다고 믿어요. 사람들은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누군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미란다처럼 자신을 향한 상대의 사랑을 남용한다면 그 사람은 죽여 마땅해요. 너무 극단적인 처벌처럼 들리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충만해요. 설사 짧게 끝날지라도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이라고요. T. S. 엘리엇의 유명한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어떤 거요?"
.."‘장미의 한순간과 주목朱木의 한순간은 똑같이 지속된다.’ 살인을 정당화한 말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래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이용당할 때까지 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기네스를 다 마신 후, 나는 살인자로서 내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살인에 흥미를 잃어서가 아니라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나와 그렇게 가까워지도록, 에릭처럼 내게 상처를 입히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성인이다. 상처받기 쉬운 어린 시절과 위험한 첫사랑의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다시는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이제부터 내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나는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집 안에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으로 내가 차지한 도시의 모퉁이를 내다보았다. 차 한 대가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가 물 웅덩이를 지나가며 물을 쫙 튀겼다....

...다시 트럭을 타고 돌아가기 전에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오로지 어둠과 자연에 둘러싸인 채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런 희귀종 같으니." 한때 아빠는 날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생하게 혼자인 기분. 이 순간 내 유일한 동반자는 어린 나, 쳇을 우물에 밀어 넣은 아이뿐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고 우린 서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여러모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현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어린 나는 사라지더니 내 안으로 들어왔고, 우린 함께 뉴욕 시로 향했다.

...하지만 이젠 끝났다. 완전히. 앞으로는 조용히 살면서 다시는 누구도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계속 생존할 것이다. 초원에서의 그날 밤,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간직한 채. 그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고, 남과 다른 도덕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깨달음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 소나 여우, 올빼미의 도덕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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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잘못 키워서 그래."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귀국하여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피로하면 그만둬버리고, 조그만 장애가 있어도 하던 일을 놓아버리고, 편한 쪽으로만 하염없이 흘러가려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달빛이 무척 밝게 느껴졌다. 학교에 이르는 길이 무척 신선했다. 시간과 목적이 달라지면 풍경을 느끼는 감정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가게로 들어선다. 아다마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가게에는 미국 냄새가 가득했다. 아다마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미국 냄새라 해도 실제로 미국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그러나 그 냄새는 기지촌의 단독주택에도 혼혈아의 머리카락에도 기지의 PX에도 있다. 인간의 지방 냄새다.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영양이 가득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다마, 그건 아니야. 내 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나와 아다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것은 열일곱 살 소년이 여고생에게 사랑을 구걸할 때 이외에는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대사다. 누구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경제력도 없고 아내도 없는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열일곱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별되어 가축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귀로에 선 순간이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면, 그 후의 인생이 어두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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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사랑받을 자격도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여기고 확신하게 하는 ‘근본적인 체험(原體驗)’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존재가 그들을 노골적으로 버렸다든가, 예뻐하는 척만 하고 진심으로 애정을 주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진심으로’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즉 그들에게 애정이 가장 필요했던 어린 시절에 누구보다 그들을 먼저 챙기며 마음뿐 아니라 시간과 수고를 내줬다는 뜻이다. 소중한 사람이 그들을 두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다거나 일이나 생활에 쫓겨서 매사에 건성이었다면 어린 자녀는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다 큰 어른들에게 자기 긍정감을 가지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 이는 한창 자랄 나이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키가 덜 자란 사람에게 키를 더 키우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긍정감은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 긍정감을 높이라는 둥 안일하게 말하는 건 정말로 고통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떠드는, 그야말로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린다.

..의학적 진단은 병명에 따른 카테고리에 의해 내려진다. 특히 정신의학은 증상을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는 구식(舊式)이다 보니, 증상의 숫자만큼 진단명이 붙는다. ‘우울 상태(기분 변조증)’ ‘불안장애’ ‘불면증’ ‘의존증’ ‘섭식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발모벽’ ‘섬유근통증’ ‘만성피로증후군’ ‘만성두통’ ‘편두통’ ‘과민대장증후군’ 등 이런 식으로 여러 진단명이 내려진다. 각각의 병명은 독립된 것으로 각기 다른 진단기준과 치료방침이 있으며, 각기 다른 전문학회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단지 증상을 나열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A씨에게 생긴 진짜 문제를 규명하는 본래의 진단이라고 할 수 없다. 감기를 ‘발열’ ‘콧물’ ‘재채기’라는 증상별로 진단해 해열제와 콧물약, 기침약 등 증상별로 약을 처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감기 정도는 내버려두어도 자연스럽게 낫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A씨와 같은 상태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 그리고 인생 전체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증상이 있을 때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는 악순환을멈추지 못하고,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이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진단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A씨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애착장애’다.

..앞서 1장에서 살펴본 ‘기이한 병’은 미국에서도 1940년대까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경계상태’라는 보고가 있었다. 당시의 정신의학 개념으로는 정신병이나 신경증이라고도 정의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상태였다. 심지어 전문가조차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러 정서가 불안정한 환자가 자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고 격분하면서 정신과 병동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환자를 종래의 방식으로 치료하자 치료 스태프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사사건건 부딪치는 등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경계사례’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도 서서히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등의 증상에 많은 사람이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신과 병동이나 영화 속에서 일어날 법했던 현상들이 그로부터 20~30년 사이에 점차 일반가정이며 학교에서 일상적인 광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경계성 인격장애’라고 부르는 상태의 짧은 역사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자식에게 어머니란 돌봐주거나 젖을 물려주는 존재라기보다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임이, 일단 집착이 생겨나면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는 특별한 존재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렇게 ‘특별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 새끼원숭이의 안정감뿐 아니라 발달과 생존까지 지탱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그즈음 볼비는 특정한 양육자와의 연결이 안전감과 생존·적응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이렇게 특별한 유대관계를 ‘애착(attachment)’이라고 불렀다. 할로우의 실험은 애착의 존재를 그대로 증명해준 셈이다.

..인생에 걸림돌 하나 없어 보였던 그도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못했던 탓에 심각한 애착장애가 있었다. 그의 출세작인 『가면의 고백』은 동성애와 마조히즘 같은 성적 도착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자기 존재와 삶에 대해 뿌리에서부터 위화감을 안고 있었으며, 타인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자이가 『인간실격』에서 이야기한 힘겨운 삶과 본질이라는 면에서 같다.

..자기 분노나 통증 등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탓에 상대의 기분이나 주변 상황을 살펴볼 겨를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면 정신화 능력은 발달하기 힘들다. 자기에게 생긴 사태나 감정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이해하거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고하는 정신화는 자기가 느끼는 고통을 완화해주지만, 이러한 능력이 취약하면 자기 통증에만 집중하게 된다. 상대의 기분이나 사정보다도 자기 고통에만 사로잡혀서 의도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 과잉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상대뿐 아니라 자기의 고통과 스트레스까지 가중된다.

..그런데 회피형은 타인에게만 무관심한 게 아니다. 자기 기분이나 감정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흥미가 없다. 기분이나 감정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일에 열중해 잊어버린다. 자기 기분과 감정에 관심이 없다 보니 당연히 말로 표현하거나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는 더더군다나 관심이 없다. 그런 일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생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걸까? 우리에게 기쁨이나 만족을 주기 위한 체계에는 과연 어떤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걸까? 사실 사람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물학적 체계는 다음의 세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배불리 먹거나 성적으로 흥분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엔도르핀 등 내인성 마약(뇌내마약)이 분비되면서 생기는 쾌감이다. 생리적 충족과 깊이 연관돼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기쁨을 가져다준다.
..두 번째는 보수계라고 불리는 체계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작용한다. 대뇌 선조체(Striatum; 뇌 기저핵의 한 영역으로 자발적인 움직임의 선택과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함-옮긴이)의 측좌핵(Nucleus accumbens; 동기 및 보상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보상체계-옮긴이)이라고 부르는 부위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 사람은 쾌감을 느낀다.
..도파민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목적을 달성해냈을 때 분비된다.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은 순간에 도파민이 분비되며 ‘해냈다!’라는 쾌감을 느낀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마라톤을 완주했을 때도 유사한 희열이 생기면서 다시 노력해 다음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된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계는 간혹 악용된다. 힘들이는 노력 없이 도파민만 분비되도록 해 즉흥적인 만족을 주면 강렬한 쾌감이 쉽게 얻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약이다. 알코올과 같은 의존적 물질도, 도박처럼 끊지 못하는 행위도 즉흥적으로 도파민 분비를 일으켜 중독되게 만드는 것이다(마약은 내인성 마약 분비를 수반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 기쁨을 가져다주는 체계는, 이미 눈치 챘겠지만, 애착이다. 이는 옥시토신의 작용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피부끼리 닿았을 때 흥분보다는 편안함이 가득하게 밀려온다.

..기쁨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 체계 중 애착 시스템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기본적인 안정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고 배가 부를 때 내인성 마약이 분비되며 얻는 생리적 만족이든, 노력해서 목표를 완수할 때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보수계 만족이든, 이는 어떤 행위로 인해 처음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만족을 얻고 싶으면 끊임없이 계속 먹어야 하거나 노력을 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애착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안정감만은 유일하게 특정 행위나 그로 인해 달성된 결과가 필요하지 않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자기 모습으로 있을 뿐인데 조건 없이 얻어지는 만족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행위도, 노력도 필요 없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안정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회피형과 불안형의 특성적 차이도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불안형은 부모와의 사이가 원만한지가 매우 중요한 데 반해, 회피형은 일이 잘되는지가 위험성을 크게 좌우했다. 회피형의 경우, 약한 소리를 하며 상담을 청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며 난리를 피우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한계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거나, 알코올이나 인터넷게임·도박에 빠지든가,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한다. 그나마 이 정도는 안전장치가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는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아서 자기가 자기를 쉬게 하지 못하는 채로 내달리다가 느닷없이 자살해버리는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죽을 것 같은데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주변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회피형은 의사의 지시를 지키지 않으며 사망률이 높다는 결과가 있다. 이는 어릴 적부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며, 자기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고 학습해온 결과다.

..희망이란 기쁨을 향한 기대다. 지금 당장 기쁘지 않더라도, ‘언젠가 기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으로도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쁨뿐 아니라 희망조차도 잃어버리고 나면 사람은 더 살아가지 못한다.
..사람에게 조건 없이 기쁨을 주는 체계가 애착을 지탱해주는 옥시토신계다. 애착하는 존재를 변함없는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애착하는 존재가 없거나, 애착하는 존재가 있더라도 사이가 불안정하고 언제든지 증오나 분노·실망으로 바뀔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울 때, 그리고 그것을 보상해주는 기쁨마저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죽음으로 돌아선다. 애착 존재의 유무는 마치 ‘단단하고 평평한 땅에 섰는가, 골짜기 쪽으로 기울어진 땅에 섰는가’ 하는 만큼의 차이다.
..늘 분발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러나 힘을 낼 기력마저 사라져버리면, 더는 굴러 떨어지는 그를 지켜줄 버팀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애착장애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뜻이다.

..장애의 정도를 그가 안고 있는 고통으로 측정할 수만 있다면, 애착장애는 절대 가볍지 않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치료해본 전문가라면 오히려 더 큰 고통 속에 있다는 걸 결코 모를 리 없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에 더욱 심각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의학의 진보로 암이나 치매조차도 치료가 가능해진 오늘날, 정말 치료가 곤란한 병을 꼽으라면 오히려 이쪽이다.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라기보다 질병으로조차 인식되지 않고 문전박대 당해온 결과이며, 아무도 본격적으로 치료에 매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인류의 앞을 가로막을 질병이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이 애착장애라는 게 널리 인식되면 상황은 크게 바뀔 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 섭식장애, 의존증, 만성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부모들에게는 안전기지가 될 능력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는 아이의 안전기지가 되는 것이 아이의 회복에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걸, 아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거라고 오해하거나,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안전기지가 된다는 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게 첫 번째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보살핌, 적절한 거리 유지 역시 필요하다. 내버려 둔다는 건 그저 방임일 뿐이며, 말대로 한다는 건 본래 의미로 보면 그를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다. 안전기지란 어디까지나 최종적으로 아이를 자립시키기 위한 체계이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줘서 나약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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