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p.
..일본은 살기 편했다. 길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없었고 거리는 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편의점에만 들어가도 백화점이 무색하게 친절한 점원들이 있었다. 그래도 시아는 문득 추위를 느낄 때가 있었다. 히터로 뜨거워진 공기가 살갗만 바삭바삭하게 덥혀서 피부 밑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것처럼. 4월이 다 갈 때까지 전기장판을 치우지 못했다. 하이츠 선플라워 201호는 시아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가끔 시아는 이 작은 집이 자기를 태우고 표류하는 조각배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돈을 주고 당당하게 빌린 보금자리. 마음이 어두워질 때는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집을 갈고 닦으면 안전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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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양손으로 감싸듯이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기도하는 모습처럼도 보인다. 전 세계가 아니라 반경 10미터의 세계를 위해.

..고등학교나 대학교 시절에 친했던 친구들과도 지금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선물을 살 상대가 줄어든다.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 일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으로 새어 나가 시들해졌다.

..계절이 바뀔 무렵의 바람은 슬프다. 야요이는 걸어가면서 그 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 감정을 담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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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는 것이다. 미추나 성별, 나이, 인종과 국적이 얼굴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상징에 가까워진 얼굴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상상력을 불순물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쳐 있고, 피로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피로감으로 젊은 사람들이 늙어 있었다. 변하지 않는 세계, 나눠주지 않는 세계, 가혹한 방향으로 나빠지기만 하는 세계에서 노화는 가속화된다. 무슨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에서 심리 테스트를 받았더니 은퇴자의 심리에 가깝다고 해서 웃었다. 결과를 보니 삶의 질을 가장 우선시한다며, 벌써 그러면 안 된다고 강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삶의 질을 희생시키고 얻을 게 있어야 스스로를 연료 삼아 불태울 게 아닌가? 한때 좋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한테나 통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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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p.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자연 속에서 가장 달콤하고 다정하며, 가장 순수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친구를 발견할 수 있다. 딱하게도 사람을 몹시 싫어하거나 심한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자연에 살면서 모든 감각을 고요히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해로운 우울증이 찾아올 수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그 무엇도 소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에게서 통속적인 슬픔을 자아낼 순 없다.

29~30p.
..평범한 사교의 값어치는 너무 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는 바람에 서로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 세끼 식사 때마다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오래되고 곰팡내 나는 치즈 맛을 보게 한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을 견딜 수 있고,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의범절과 공손함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규칙들에 합의해야 했다. 우리는 우체국에서 만나고, 사교 모임에서 만나고 또 매일 밤 난롯가에서 만난다. 우리는 조금의 틈도 두지 않은 채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 결과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만나도 충분히 중요하고 속내를 다 털어놓는 의사소통을할 수 있었을 텐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꿈속에서도 혼자 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처럼 2.6제곱킬로미터에 한 사람씩 살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사람의 가치가 피부에 있는 건 아니니 굳이 누군가와 스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107~108p.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성가신 존재가 되어가는 이 쇠락기에 스스로에게마저 그런 존재가 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수치스러워지도록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다스리자. 쿠인틸리아누스는 말했다. "인간이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은 교육을 받아야 하고, 장년은 선을 행해야 하며, 노년에는 모든 공적인 의무에서 물러나 자기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라고말했다.

114p.
.."자네는 지금까지 물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헤엄치며 살아왔네. 이제 항구로 돌아와 삶을 마치게나. 인생의 전반부를 빛 속에서 살아왔으니 여생은 그늘에서 보내게나. 자네가 일의 결실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일에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러니 명성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과거 활동에서 나오는 광채가 자네를 너무 환하게 비추다가 은둔처까지 들어갈까 두렵군. 다른 쾌락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오는 만족도 버리게. 자네가 가진 지식과 자네가 맡은 새 역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거기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지식과 역할의 효과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자기가 머무는 소굴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는 동물들을 본받게. 세상이 자네에 대해 하는 말에 개의치 말고 자신에 대해 자네가 하는 말에 신경 쓰게. 자네의 영혼을 다스리면서, 거기에 일정한 선을 그을 줄 알고, 자네가 누리는 진정한 축복을 전적으로 이해해야 하네. 그런 축복을 더 많이 즐길수록, 그걸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명성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더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걸세."

145p.
..루이자는 그날 밤 혼자 조금 흐느껴 울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산책하면서, 마치 여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왕국을 뺏길까봐 두려워했다가 그것이 확실히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된 왕국을 본 여왕이 된 기분.

167~168p.
..기나긴 생의 부침 속에서 당시를 기억해보니, 내가 가장 즐겁고 기쁘게 살았던 때는 가장 생생한 추억이 남는 환희를 맛본 때가 아님을 알게 됐다. 그 넘쳐흐르는 기쁨과 정열의 순간이 아주 강렬하고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삶의 행로에 드문드문 찍힌 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순간들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내가 그리워하는 행복이란 그런 일시적인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숨이 막히게 황홀한 면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매력이 커져 결국 지상 최고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211p.
.."Ne te quaesiveris extra(당신 자신을 당신 밖에서 찾지 말라)"

215p.
..자연이 어린아이, 갓난아이, 심지어 짐승의 얼굴과 행동이라는 텍스트에 쓴 신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린아이, 갓난아이, 짐승에게는 분열되고 반항하는 마음, 감정에 대한 불신이 없다. 그런 반항과 불신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적과 대조되는 곳에 자신의 힘과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계산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 분열되지 않은 그들의 마음은 온전하고, 아직 이런 계산을 할 줄 모르는 그들의 눈은 순수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당황한다. 젖먹이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며, 외려 모두가 그에게 복종한다....

217p.
..이렇게 어느 무리와 한편이 되겠다는 맹세를 일절 거부할 수 있는 사람. 주변 사람이나 사물을 냉정하게 관찰한 후에 변함없이 편견을 갖지 않고, 뇌물로 매수할 수 없으며, 두려움 없이 우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무적이 된다. 이런 사람이 현안에 관한 의견을 말하면, 사적인 게 아니라 꼭 필요한 의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가 박히면서 종내에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219p.
..유일하게 옳은 일이란 내 기질에 따라 사는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면 다 잘못된 것이다. 제대로 된 어른이란 어떤 반대에 부딪혀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유명무실한 찰나의 것으로 생각한다.

220p.
...당신의 선량함에 날이서 있지 않다면, 그건 선량함이 아니다. 징징거리는 사랑의 교리에 맞서려면 증오의 교리를 설교해야 한다....

222p.
..하지만 나는 속죄하며 살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은 나를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불안정하지만 화려한 삶보다는 지체는 낮더라도 진실하고 평등한 삶을 훨씬 더 선호한다. 나는 식사량을 줄이거나 피를 뽑을 필요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나는 당신이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증거를 원하지, 지금까지 이런저런 일을 했다는 호소는 듣고 싶지 않다. 이른바 탁월하다는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내가 직접 겪어서 알고 있다. 내가 타고난 권리를 지닌 곳에서 특혜를 누리고 있다면서 나에게 그 대가를 치르라는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 재주가 적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실제로 여기 존재하는 인간이니, 그런 나도 괜찮다는 스스로의 확신이나 동료들의 말은 필요 없다.

226p.
..우리를 겁주어 자기 신뢰를 막는 또 다른 두려움으로 일관성이 있다. 일관성은 우리가 과거에 한 행동이나 발언을 숭배하는 태도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행로를 찾아보려 할 때는 과거에 한 행위라는 자료밖에 없고, 우리는 그런 그들을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228p
..아무도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려 해도 결국 자신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안데스산맥과 히말라야산맥의 고저기복을 지구의 거대한 곡선과 비교하면 사소해지는 것과 같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고 시험하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성품은 애크로스틱 체나 알렉산드리아 시구와 비슷하다. 앞에서 읽든 뒤에서 읽든 혹은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읽든 언제나 같은 글자가 나오는 식이다.

240p.
...내 창문 밑에 핀 장미는 전에 핀 장미나 더 좋은 장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장미는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장미는 오늘 신과 같이 있다. 장미에 시간이란 없다. 그저 장미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매순간 완벽하다. 장미는 잎눈이 트기 전부터 그 생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해서 그 생기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잎이 없는 뿌리 상태라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장미의 본성은 충족되고, 자연도 모든 순간에 충족된다. 하지만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추억한다. 그는 현재에 살지 않고, 눈을 뒤로 돌려 가버린 과거를 한탄하거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부한 은총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까치발을 선 채 미래를 훔쳐보려 애쓴다. 그도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자연과 함께 현재에 살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하고 강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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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p.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그날까지 날짜와 시간의 존재를 계속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우울한 기분으로 바닥에서 눈을 감았다.

42p.
..뭔가에 재능이 있다는 말은 당신은 그쪽에 있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재능이 있다는 건 인생을 자신의 특질에 지배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주 일찌감치, 내 진로는 ‘무‘라고 세계가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존중하는 행위로 위장한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대로 따르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65p.
..나 또한 이 광경을 조만간 잊고, 어쩌면 살짝 손질할 테죠. 인간에게는 흥미 있는 토픽, 지배적인 토픽이 있어서 모든 기억은 결국 그 구멍 속으로 떨어집니다.
..나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토픽인 우위와 불리가 도사린 구멍에 이 광경을 떨어뜨릴 겁니다.

77p.
...아이샤는 두 발을 따뜻한 담요 안에 넣으려면 어깨는 찬 공기에 내놓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한 아이였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 하나 거저가 아님을 잊은 적은 없었다....

135p.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격과 심리의 그림자 부분이 이유 없이 소멸하는 일은 없다. 특히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회복시키지 못할 때, 억압되고 배척된 갖가지 그림자는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간다.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아 급기야 우울증, 조증, 분열, 자해, 타인과의 충돌로 변한다. 또 어떤 것은 자의식의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몸 밖으로 나가 타인을 향한 무의식적 공격성으로 모양을 바꾸어, 끝내는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201p.
..이 귀중한 진공 같은 격리 기간 동안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바이러스(혹은 그 표면적 현상)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차단시켰다.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려란 무엇일까? 이상적인 파트너는 언제나 과묵하고, 겸손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멋대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일도 없고, 소음을 내지 않고, 타인의 방해가 될 움직임은 삼가면서도 곁을 지켜야 할 때를 안다. 두 사람은 관계 속에서 번갈아 ‘사물‘이 됨으로써 자신을 압축한다. 그로써 관계는 안전한 공간이 되고,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탐색할 수 있다. 격리의 나날 동안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용기를 얻었다. 최적의 반려는 ‘사물‘이다. 생명을 지니지 않는 ‘사물‘.

208p.
...그 무렵 나는 수시로 옛 남편과 아들을 떠올렸다. 침대는 비좁고 온갖 가구를 타인과 공유해야 했던 나날이었지만, 가슴에 복받친 것은 그리움도 비탄도 아니라 매사가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는 허무감이었다. 반고의 천지개벽과 세계의 종말처럼, 세상에는 애초에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을 안고 있건 마지막에는 무로 돌아간다.

255p.
...요 삼 년, 이런 환경에서 일한 덕에 성장이란 먹고사는 데로 눈이 쏠리게 되는 과정이고, 성숙이란 생활의 참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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