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
...이불을 턱까지 올려 덮은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여서, 그 노인네를 방해하지 말고 그냥 길고 넓은 무덤에 침대째로 넣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대장은 말했다. 안 피플스는 가만히 서 있는 나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죽음을 내려보낸 것은 바로 그런 나무였다.

43p.
..이 첫 키스로 그는 구멍에 빠졌다가 다른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힘을 쓰다가 몸을 돌려 하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꽃들 사이에서 키스를 하며 그날 오후를 다 보냈다. 그는 찬란한 기분이었다. 원래 몸속에 있어야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온몸을 채운 것 같았다.

58~59p.
...하지만 그뒤로 그레이니어는 황혼녘에 늑대 소리가 들리면 자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늑대처럼 울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이곤 하는 묵직한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늑대 합창단과 저녁에 이렇게 한바탕 공연을 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그는 쿠트나이 밥에게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늑대처럼 운다고, 자네가?" 밥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 사람들 말로는 살아 있는 늑대가 언제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이야."

88p.
...비행기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가파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장기들이 척추에 달라붙었다. 여름밤에 오두막에서 아내와 딸이 후드의 사르사를 마시던 순간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오두막이 나타나고, 그의 숨겨진 유년 시절에 갔던 장소들, 광대한 황금빛 밀밭,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그를 감싼 두 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번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었다....

118p.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한창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119p.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아내 글래디스)이었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자주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십 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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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p.
..그런 가운데 노렌에 쓰는 것이 금기시되는 색이 있었으니, 바로 자주색이다. 오랜 시간 자주색은 높은 상류층 집안만 쓸 수 있는 귀한 색이었다. 그러던 것이 에도 시대 중엽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린 가게가 대출금을 상환할 때까지 자주색 노렌을 내걸어야 하는 규칙이 생기면서 어느새 자주색 노렌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109~112p.
..아울러, 취급하는 상품에 따라 동전 투입구의 구조가 다르다. 먼저 음료 및 식품, 담배 자판기의 동전 투입구는 가로로 뚫려 있어 동전을 눕혀서 넣는 구조인데, 승차권을 비롯한 표 발권기의 투입구는 세로로 뚫려 있는 것이 주를 이룬다. 가로 모양 투입구에 동전을 넣을 경우 동전이 식별 장치에 떨어지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나 동전 보관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큰 상품 저장 공간이 필요한 음료 자판기에 적합하다. 반면, 세로로 넣는 방식은 원심력 덕에 동전이 식별 장치에 빨리 도달하며 많은 인파가 이용하므로 상품(표) 저장 공간보다는 동전 보관 공간이 필요한 지하철역 승차권 판매기 및 각종 표 발권기에 활용된다.

240p.
..오래전 중국 남송南宋(1127~1279)에는 ‘적절함, 편리한 것‘을 의미하는 便當(편당)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후 이 말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辨道(변도) 혹은 便道(편도)로 바뀌어 ‘분별한 다음 용도에 맞게 넣어 먹는다.‘라는 뜻의 말로 파생해 弁当(벤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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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p.
..새 바람이 불면 예전 공기는 사라진다. 그러면 내가 아는 미스터리 애호회는 내 마음속에만 남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 바람을 거부한들 과거의 공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134p.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일본에서 제일 노력하는 사람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나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바깥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멋지다‘, ‘부럽다‘라고 생각할까.
..나도 안다. 그런 건 그냥 괴물이다.

334p.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 몸속에서 나는 소리뿐이다. 공기가 점막을 스치고, 혈액이 흐르고, 내장이 꿈틀거리는 등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소리들. 지금까지 인식해온 세상의 안과 밖이 뒤바뀌고, 이것들이 내가 내는 소리인지도 긴가민가해진다. 이 소리가 사라지는 때는 내가 죽는 때다.

440p.
..‘어려운 문제는 분할하라‘는 요즘 미스터리 소설에서 사용되기도 하는 표현이지만, 히루코 씨 말로는 원래 근대 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르네 데카르트가 자신의 저서에서 제창한 사고방식이며, 마술 분야에서도 사용한다는 모양이다. 커다란 난제도 분할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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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p.
...나는 가정 속에 나타난 사회주의 또는 내부적으로 나타난 사회주의의 역사적 파편과 부스러기를 모아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 하나의 인간이라는 작은 공간에 매료되곤 한다. 사실 모든 역사가 그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니까.

146p.
...제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시겠어요? 전 지금 우리의 그때 그 삶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전 저 자신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이 불쌍해요……

152p.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 저는 미쳐갔어요. 미치면 머리카락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낚싯줄처럼 거칠어져요. 제일 먼저 미치는 건 머리털이더라고요....

157p.
...시골 사람들은 뭔가 바뀌는 것을 두려워해요. 왜냐하면 뭔가 바뀌고 나면 항상 남자들이 병신이 되어 돌아왔거든……

175~176p.
...선생께선 사람을, 사람의 진심을 지나치게 신뢰하시는 것 같더군요. 괜한 짓을 하시는 겁니다. 역사는 사상의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역사를 기록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인간의 진심은 못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모자를 걸어두는 그런 못이요……

237p.
...상점 매대마다 햄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꿈꿨죠. 그 햄들이 소련의 가격으로 팔리고 정치국 위원들도 그 햄을 사기 위해서 모두와 똑같이 줄 서는 모습들을 상상했어요. 햄은 모든 것의 기준점이었어요. 러시아인들은 햄에 대해 실존적 사랑을 느끼거든요. ‘신들에게는 죽음을! 공장을 노동자에게! 땅은 농부에게! 강은 수달들에게! 땅굴은 곰들에게!‘ 가두시위나 인민대표대회 중계는 멕시코 드라마를 훌륭하게 대체했죠……

307p.
...그 사람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임신한 여자가, 무엇 때문인지 항상 불만이 가득했던 저 여자가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해서 저러는 걸까? 도대체 당신은 뭐가 아직도 부족하냐고?‘ 그런데 저는 그냥 책장을 넘긴 것뿐이었어요…… 저는 그가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주 기뻤고, 나중에는 그가 내게 없다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매우 기뻤어요. 제 인생은 항상 저금통 같았어요. 가득 모아두면 없어지고, 또 모아두면 없어지는.

333p.
..저는 말의 노예랍니다.…… 저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요. 항상 사람의 말을 기대하죠. 모르는 사람에게서도요.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더 많은 말을 기대하는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은 아직 기대해볼 만하거든요. 저도 말이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결심하죠…… 준비가 되어야만 하죠. 제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제가 꺼내놓은 이야기가 있던 지점에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돼요. 그곳엔 빈 공간이 생겨요. 전 꺼내놓은 그 추억을 잃게 돼요. 그 지점에는 일시적으로 구멍이 생겨요.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 추억이 되돌아오죠. 그래서 저는 침묵을 고수하는 편이에요. 모든 걸 제 속에서 다듬고 있어요. 통로나 미로, 그리고 굴을 만들어가면서요……

334p.
...만약 어떤 사람에게 자기 연민이 남아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아직 내면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않았다는 의미예요. 그 사람은 아직 사람들로부터 떠나지 않은 거예요. 사람들을 떠나면, 그 사람에게 더이상 ‘사람‘이 필요치 않게 되거든요.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443p.
..전 다니지 않아요. 정치적 쇼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걸 굳이 해명하고 싶지도 않고요. 시위는 가장 값싼 허세예요. 솔제니친의 가르침대로 우리부터 먼저 거짓 위에서 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것 없이 우리는 1밀리미터도 더 전진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 없이는 그저 원을 빙빙 돌게 될 거예요.

484p.
..러시아의 삶은 악하고 하찮아야 해. 그래야 영혼이 깨어나거든. 그래야 자신들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야. 삶이 더러워지고 피투성이가 되면 될수록 영혼이 움직일 공간이 넓어지는 거야……

523~524p.
...전 태어날 때부터 머릿결이 좋았어요. 하지만 전 제 아름다움에 대해 잊은 지 오래예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온몸이 물에 퉁퉁 불어버린다고 하더군요. 그것처럼 제 몸에 아픔이 스며들었어요. 전 제 몸을 부정하는 것 같아요…… 영혼만 남았어요……

530p.
..전쟁이 필요하다고 봐요. 어쩌면 인간다운 인간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우리 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만 ‘인간‘을 보았다고 하셨어요. 요즘은 ‘선‘이 부족해요.

542p.
.."용 한 마리가 숲속을 산책하다 곰을 만났다. 용이 말한다. ‘곰아, 난 8시에 저녁을 먹어. 그러니 그때 와, 내가 먹어줄게.‘ 그런 뒤 계속 길을 가는데 뛰어오는 여우가 보인다. 용이 말한다. ‘여우야, 난 7시에 아침을 먹어. 그러니 그때 와, 내가 먹어줄게.‘ 용이 또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토끼 한 마리가 깡충거리며 다가온다. 용이 말한다. ‘토끼야, 잠깐 서봐. 난 2시에 점심을 먹어. 그러니 그때 오렴, 내가 먹어줄게.‘ 그때 토끼가 앞발을 들고 서서 묻는다. ‘저, 질문이 있는데요.‘ ‘해보렴.‘ ‘안 가도 될까요?‘ ‘그럼, 안 와도 돼. 그럼 명단에서 너의 이름을 지울게.‘" 하지만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제기랄!

544p.
...체호프가 쓴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매일 자신의 몸속에서 노예의 피를 한 방울씩 짜내야 한다고,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도, 옷도, 생각도 모두 아름다워질 것이라고요.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정반대요! 때때로 사람은 노예가 되고 싶어해요. 그걸 좋아하기도 하죠. 사람의 몸속에서 사람 한 방울을 짜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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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없이 말이 많은 동생의 버릇은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칫 정곡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옳은 지적에는 화가 나는 법이다. 지금은 말을 삼키는 것이 좋으리라.

.."네 말도 알겠지만, 순서가 틀렸어. 사람이 경제적 합리성에 봉사해야 하는 게 아니야. 경제적 합리성이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는 거야. 경제적 합리성을 앞세운다면 노예제도도 아파르트헤이트도 합리적이겠지."

..눈 밑에 펼쳐진 미노이시를 본다.
..황금빛 벼 이삭이 흔들린다. 인공 연못에서는 잉어가 몇십 마리나 헤엄친다. 무선 조종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바비큐 연기가 피어오른다. 책 아저씨 집에 아이가 뛰어들어서는 슬슬 어려운 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가을 축제 준비가 진행된다. 산에서 좋은 것들을 잔뜩 캐서 축제가 시작된다. 모두가 웃고 있고, 그것을 엔쿠불이 지켜본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생명과 생활은 이어져 간다.
..모든 것은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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