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
...그때만 해도, 그는 피붙이가 아닌 사람을 보살필 때 느끼는 자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80p.
..하지만 어디나 그랬듯, 변화는 언제나 똑같이 희망을 주었지만—댈러스의 흰 고층 유리 건물들도, 삼차선 길이 독특했던 하이드 파크나, 아파트 뒤쪽의 나무 계단이 특히 맘에 들었던 시카고도, 아름다운 집과 완벽한 잔디밭이 그림책 같던 웨스트 하트퍼드의 주택가도—새로운 곳들은 모두 언젠가는 케빈에게 이렇게 저렇게, 사실은 그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확신만을 안겨주었다.

84p.
...격렬한 두려움이 가슴을 찔렀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해두었는데, 차가 어디 있는 기지? 그러나 차는, 그의 스바루 왜건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순간 케빈은 방금 전 그 느낌은 희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희망은 마음의 암이었다. 그는 희망을 원치 않았다. 원치 않았다. 이 연약한 초록빛 희망의 싹이 가슴속에서 움트는 걸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가 죽지 못하고 살아난 남자의 끔찍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자는 누군가 금문교 위에서 한 시간 동안 울며 서성대던 그를 막고 왜 우느냐고 물었더라면 뛰어내리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86p.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 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오, 미친, 이 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91~92p.
..."손이 배가 고파요."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배고픔이었다. 그러자 교회에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열쇠를 주었고, 앤지는 요즘도 아무 때나 교회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다.

97p.
..그녀는 공중전화로 가서 맬컴의 번호를 돌렸다. 번호는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집에 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이십이 년이면, 그녀는 신호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이라고 생각할걸. 그러나 앤지에게 시간은 하늘만큼이나 크고 둥글었고, 시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바로 음악과 신을, 왜 바다가 깊은지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앤지는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
..맬컴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맬컴,"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난 더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하지만 더는 못 하겠어요." 침묵. 아내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안녕." 그녀가 말했다.

108~109p.
..앤지는 이제 머리를 복도 벽에 기대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검정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뭔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그리고 그것이, 너무 늦었을 때에야 뭔가를 깨닫는 것이 인생일거라고 생각했다. 내일 그녀는 교회에 가서 피아노를 칠 것이다. 어머니 팔뚝의 멍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부드럽고 헐거운 피부를, 손가락으로 꼭 눌러도 무슨 느낌이 있을거라 상상하기 힘든, 살갗이 뼈에서 너무도 축 늘어지던 가느다란 팔뚝을.

124p.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올리브는 침대에 누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126~127p.
...올리브는 마치 자신이 탁류 속으로 가라앉는 가운데 두 여자가 머리 위의 조각배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33p.
...사실 닥터 수가 올리브 가까이에서 살 거라면, 수잔이 스스로에 대해 계속 의구심을 갖도록 올리브가 이것 조금, 저것 조금을 가져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올리브가 스스로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살 필요는 없다. 뭐든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까.
.."가." 올리브가 마침내 입을 열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핸드백을 챙기면서 거실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준비한다. 머릿속으로 꽃무늬 드레스 밑에서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을, 그 커다란 붉은 근육을 그리면서.

138~139p.
...그래도 하먼은 그 뒤에 숨은 활력에 감탄했다. 지금 곁에 있는 남녀에게 감탄하듯이. 그들에게 세상은 창창한 바다였다. 그들의 여유로운 태도, 여자의 맑은 피부, 여자의 높고 힘찬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폭우가 온 다음 비포장도로를 걷다가 빗물이 고인 곳에서 동전을 주우면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그렇게 주운 25센트 백동화는 엄청나게 커 보였고 마법의 동전 같았다. 이 커플도 하먼에게 그런 흥분을 자아냈다. 그런 풍요로움이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162p.
..하먼의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지 않았지만 성탄절이면 팝콘볼을 만들었다.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뭔가를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측량할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상실이 커다란 바윗덩이처럼 들어올려지고, 바위 밑에서—데이지의 푸른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예전의 위안과 다정함을 발견한 듯이.

221p.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닷물로 눈길을 주었고,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 초기에 많이 싸웠다. 올리브가 지금처럼 지긋지긋해하는 싸움도 많았다. 하지만 결혼 후 어느 시기가 되면, 어떤 종류의 싸움은 더는 하지 않게 된다고, 그 이유는 지나온 날이 남아 있는 날들보다 더 많아진 시점에서는 사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올리브는 생각했다....

228p.
...두 사람은 요즈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마치 결혼생활이라는 복잡하고 기나긴 식사가 끝나고 이제야 근사한 디저트가 나온 것만 같았다.

289p.
.."내가 비 때문에 못 봤나보네." 올리브가 말했다.
.."네, 알아요. 이런 날은 힘들죠. 해 뜨기가 무섭게 해질 녘이니."
..메리가 올리브를 위해 문을 잡아주어 올리브가 메리 앞으로 지나갔다. "고마워요." 올리브가 말했다. 한 번 더 확인하려고 메리를 슬쩍 건너다봤지만, 메리는 그저 피곤하고 싸울 의사가 없는 표정이었고, 아직 연민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떤 간단하고 정직한 표시가 그려진 종잇장 같았다.
..내가 저 여자를 무엇이라 생각했던가, 올리브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나는 나를 무엇이라 생각했던가?)

326p.
..올리브는 말린의 머리에 한 손을 살며시 갖다 대고 싶지만 그런 것은 올리브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서서, 말린이 앉은 의자 옆에 서서 옆 창문으로 이제 물살이 거의 빠져나가 넓어진 해안선을 바라본다. 저 아래에서 물수제비 뜨기에 여념이 없던 에디 주니어를 생각한다. 그 느낌을 올리브는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돌멩이를 집어서 힘을 조절하여 바다에 던질 여력이 있는 젊음을. 아직 그 짓을 할 만한, 망할 돌멩이를 던질 힘이 있는 젊음을.

367~368p.
...올리브는 자기집과 그들이 크리스토퍼를 위해 지은 집이 아니면 어느 집을 가도 우울해지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 마치 어릴 때의 감정을 벗어나지 못한 것만 같았다. 남의 집에서 나는 이질적인 냄새에 대한 과민함, 그리고 화장실 문이 낯설게 닫혀 있는 모양, 남의 발걸음으로 닳아버린 계단에서 나는 삐걱임에 덧씌워진 공포감을.

403p.
..하지만 아들 뒤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올리브는 때로 이 모든 일 속에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던 때가 있었던 걸 기억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키터리지 부인, 괜찮으세요?" 치과 의사는 물었다.)

424p.
..."그냥 제가 그렇다는 말이에요." 레베카가 계속 말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해 세계지도에 핀을 하나씩 꽂는다 해도 저를 위한 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461p.
..매일 아침 강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다시 봄이 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봄이, 조그만 새순을 싹틔우면서.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봄이 오면 기쁘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언젠가는 면역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사실이 그랬다. 떠오르는 태양에 강물이 너무 반짝여서 올리브는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463p.
.."나는 저녁이 더 좋은데요." 잭이 말했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종일 고대하게 되잖아요. 점심은 헤어지고 나면 아직 하루가 많이 남지만."

482p.
...올리브가 걸어 들어가는 동안, 잭의 푸른 눈이 그녀를 줄곧 응시했다. 방은 오후 햇살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햇살은 창에서 들어와 흔들의자를 가로지르고 벽지에 넓게 밝은 빛을 드리웠다. 마호가니 침대 손잡이가 빛났다. 베이 윈도우로 하늘의 푸른빛과 베이베리 덤불, 돌 벽이 보였다. 드러난 손목에 햇살을 느끼며 올리브가 일어서는데, 이 햇살의, 이 세상의 고요가 무시무시한 오한과 함께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듯했다. 올리브가 그를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그의 곁에 앉는다면 이 양지바른 세상의 거대한 외로움에 눈을 감는 일이 될 것이다.

484p.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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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생각보다‘라는 첫마디 뒤에 붙이는 말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나는 ‘생각보다‘ 뒤에 따라오는 말에는 대부분 발끈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23p.
..어엿한 어른이니 때에 따라서는 굳이 자기 생각을 전부 고백할 필요는 없겠죠?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생각보다‘는 중립적이고 담담한 의미로만 한정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뭐 이런 정도로만....

79p.
..흘려넘겨도 되는 것은 가볍게 훌훌 흘려넘긴다. 거기에 내 본질같은 건 없으니까.

99p.
..삼십대든 사십대든 모조리 뭉뚱그려서 ‘아줌마‘였던 젊은 날이 저 멀리 떠나버렸음을 절절히 실감했던 과일 디저트 전문점에서의 미팅. 찬찬히 살펴보니 바로 코앞에서 핫케이크에 포크를 찔러넣는 그녀들의 손끝은 무척이나 싱그럽고 윤기 넘쳤다! 버석버석 메마른 내 손을 바라보다 문득 나이는 끄트머리에서부터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20p.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를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세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129p.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미지의 세계. 어렴풋하게는 알지만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른 것. 그런 말은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라이가 들어간 말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방관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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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는 중식당 원탁에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내의 무거운 분위기가 양어깨를 짓눌러와 뭉치기 시작했다. 원탁에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잘 보인다....

..뒤죽박죽 불가사의하게 이어지는 이모들의 대화. 서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어떤 기적처럼,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졌다. 이모들의 발상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듣다보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진지하게 두 사람의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은 점점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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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쇼우쩌手澤’라는 말이 있고, 일본에 ‘나레慣’라는 말이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람이 손을 대어서, 한군데를 반들반들하게 만지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기름이 스며들게 되는 광택을 이르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손때임에 틀림없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풍류는 추운 것’인 동시에 ‘때 묻은 것’이라는 경구도 성립한다. 어쨌든 우리들이 좋아하는 ‘아치雅致’라는 것 속에는 어느 정도 불결한 동시에 비위생적인 분자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서양인은 때를 송두리째 벗겨내 없애려고 하는 데 반해, 동양인은 그것을 소중히 보존하여 그대로 미화한다고, 억지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숙명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때나 그을음이나 비바람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 내지는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색조나 광택을 사랑하고, 그런 건물이나 가구 가운데 살자면 기묘하게 마음이 풀리고 신경이 편안해진다....

...사실 다다미방의 미는 전적으로 그늘의 농담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중류계급 이상의 여자는 절대로 외출하는 경우도 없었고, 가령 가마에 깊숙이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면, 대개는 저 어두운 집과 대지의 한켠에 낮게 깔려서, 낮이건 밤이건 오직 어둠에 온몸을 묻고 그 얼굴만을 존재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의상 따위도 남자의 것은 현재보다 더 화려한 데 반해 여자의 것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옛날 바쿠후 시대, 시내에서 장사하는 집의 딸이나 부인들은 놀랄 만큼 수수한데, 그것은 요컨대 의상이라는 것이 어두움의 일부분, 어둠과 얼굴과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화장법이 행해진 것도, 그 목적을 생각하면, 얼굴 이외의 빈틈을 모두 어둠으로 채워 버리려고 입 안까지 검게 한 것은 아닐까....

...마침 내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눈썹을 깎고 이를 검게 한 삼십 대의 하녀가, 큰 장지 앞에 촛대를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다다미 두 장 정도로 밝기가 한정된 장지 뒤편에는 천장에서 막 떨어질 것 같은 높고 짙은 오직 한 가지 색의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미덥지 못한 촛불이 그 두께를 뚫을 수 없어 검은 벽에 맞닥뜨린 것처럼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었다. 여러분은 이런 ‘등불에 밝혀진 어둠’의 색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밤길의 어둠과는 어딘가 다른 것이어서, 가령 한 알 한 알이 무지개색의 반짝임을 지닌, 미세한 재 같은 미립자가 충만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이 눈 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여 무의식중에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잠만 자는 것은 독이다’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음식의 양을 줄이고 종류를 줄이면, 그것만으로 전염병 같은 위험에 걸리는 경우도 적다. 칼로리다 비타민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시간이나 신경을 쓰는 사이에, 아무것도 안하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쪽도 있다. 세상에는 ‘게으른 자의 철학’이 있듯이, ‘게으른 자의 건강법’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개 현대의 도시인은 진짜 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도시인이 아니라도, 요즈음은 꽤나 변방의 시골 거리라도 은방울 모양의 꽃등이 꾸며진 세상이므로, 차차 어둠의 영토는 내몰려서, 사람들은 모두 밤의 암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때 교토의 어둠을 걸으면서, 이것이 진짜 밤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밤의 어둠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 기억나지 않는 행등의 밝음 아래서 자던 무렵의 밤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쓸쓸하고, 섬뜩하고, 따분한 것이었던가를 떠올리고, 이상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요즘 사람은 《겐지 모노가타리》 이하 옛 소설에 나타나는 부인의 성격이 여기든 저기든 하나같아서 개성을 나타내지 못하였다고 공격하겠지만, 옛날의 남자는 부인의 개성 때문에 사랑한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여자의 얼굴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은 항상 같은 달인 것처럼, ‘여자’도 영원히 단 하나의 ‘여자’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를 듣고, 옷 냄새를 맡고, 머리카락에 대고, 요염한 촉감을 손으로 더듬어 느끼고, 그래도 밤이 밝으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바의 그런 것들을 여자라고 생각하였으리라.

...촌티 나는 것이 싫은 나는 자연 서생티 나는 것도 싫어서, 어느 정도 말하기에 족하다 생각하는 상대가 아닌 한에, 좀처럼 문학론이나 예술론 따위로 싸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나에게는, 문학자는 붕당을 만들 필요가 없다, 될 수 있는 한 고립해 있는 쪽이 좋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인데, 이 신념은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나가이 가후 씨를 경모하는 것은, 가후 씨가 고립주의로 일관했던 실행자였고, 가후 씨만큼 철저히 이 주의를 밀고 나간 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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