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p.
..그 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쇼카콜라도 점차 절망의 식품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여야 할 때 마지막 식품으로 지급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전 무렵 러시아군의 공격을 앞두고 핀란드 주둔 히틀러 친위부대인 SS 산악유격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쇼카콜라를 나눠주었다는 식이다. 그러니 쇼카콜라를 지급받았다는 것은 곧 패배가 뻔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쇼카콜라는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촉매제가 되고 말았다.

129p.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 실린 이야기다. 자기 옷을 벗어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줄 정도로 각별하게 챙기는 것을 ‘해의추식‘(解衣推食)이라고 한다. 한신의 충성 또한 밥 한 그릇, 옷 한 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알아주는 것이라고 한다. 보리밥 한 그릇이 알려주는 리더십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다.

378~379p.
..초밥을 만들어 팔 것이 아니라 쌀을 가져오는 사람에 한해 수수료를 받고 초밥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배급받은 쌀을 가져온 사람에게 생선을 얹어 초밥을 만들어주는 것이니, 양식을 과소비하는 것이 아니어서 긴급조치령의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고 손님이 가져 온 쌀로 밥을 짓고 거기에 생선을 얹어서 손님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요식업이 아니라 위탁가공업에 해당했다. 때문에 음식점 영업 긴급조치령에도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초밥전문점 입장에서는 재료값과 요리사의 인건비를 수수료 형식으로 받는 것이니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논리도 그럴듯했고, 수많은 초밥 전문점의 생계도 고려해야 했던 데다 시민들의 외식 욕구도 충족시켜야 했기에 도쿄 시청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제한 조건을 만들었다. 1인당 쌀 한 홉으로 초밥 10개까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쌀 한 홉이면 대략 밥 한 그릇 정도의 분량이고, 이것으로 초밥을 만들면 지금 먹는 크기로 만들어야 10개 정도의 초밥이 만들어진다. 이전까지는 일본에 다양한 종류의 초밥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초밥이 현재의 모습과 크기로 통일된 배경은 이러한 긴급조치령에 있었다.

398p.
..그리고 설탕 배급은 엉뚱하게 팝콘 산업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영화관에서 팝콘의 강력한 경쟁자는 사탕이나 초콜릿, 과자, 그리고 콜라 같은 달달한 탄산음료다. 팝콘 값이 아무리 싸도 어떻게 경쟁조차 할 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설탕이 배급제로 바뀌면서 군납용을 제외한 모든 과자와 초콜릿, 탄산음료 등의 생산이 중단됐다. 심지어 설탕이 들어가는 추잉검의 생산까지 중단됐다.
..이럴 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팝콘이었다.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어줄 군것질거리가 팝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영화는 팝콘을 먹으며 보는 것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그리고 전후에 미국 문화와 미국 영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팝콘은 영화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됐다. 지금 우리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데도 엉뚱한 역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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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p.
..빵은, 먹는다기보다 깨문다고 하는 편이 적합하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도, 빵은 저마다 혼자서 깨무는 것이다. 때로 와삭와삭. 거기에는 무언가 여정을 닮은 맛이 배어 있다. 바깥 공기를 닮은 것, 외로움을 닮은 것, 오기를 닮은 것.

185~186p.
..여행을 할 때는, 기억과 지식과 체력과 사교성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 몸에 지닌 것들만이 그 사람을 뒷받침해준다. 나는 그런 상태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안심감과 단순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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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p.
..산수국이 피었다. 주변의 연보라색 꽃들이 가운데의 진보라색 꽃을 액자처럼 두르고 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고독을 느끼게 했다.
..소리와 풍경과 냄새 모두가 뒤섞이며 점점 흐려졌고, 점점 작아져서 손가락을 내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닿는 손가락이 없다. 닿을 수가 없다. 다섯 손가락에 다섯 손가락을 포갤 수도 없다.
..존재하지 않으면 소멸할 수도 없다.

49p.
..분명 자식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인데, 어머니를 올려다보는 아기가 된 기분이 들어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63p.
..노력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노력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느꼈다.
..나는, 고이치의 죽음을 듣고 나서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일하려는 노력은 해왔지만 지금 이 노력은 살려는 노력이다.
..죽고 싶다기보다도 노력하는 데 지쳤다.

80~81p.
..아침이 되었다.
..고이치가 죽고 나서 다섯번째 아침이었다.
..고이치가 죽기 전에는 늘 눈꺼풀 안에서 잠이 깨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이 언제인지를 인지하고 나서 눈을 떴는데, 고이치가 죽은 이후로는 고이치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집 안에 있는데 밖에서 아이가 친 야구공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것처럼, 외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아침마다 잠을 깨우고 밤마다 잠을 두려워하게 했다.

106p.
..듣는다.
..말하는 일은 넘어지고, 헤매고, 빙 돌아가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곤 하는데 듣는 일은 직통이다—, 언제나 온몸이 귀가 될 수 있다.

114p.
...비밀은 반드시 숨기고 싶은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숨길 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된다.
..늘 여기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내 가족이라 하더라도 여기 없는 사람을 여기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 없는 사람에 대한 추억의 무게를 말을 함으로써 줄이기 싫었다. 내 비밀을 배신하기 싫었다.

137p.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장미가 핀 시기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장미를 그린 르두테라는 화가는 170년 전에 죽었다. 그림 모델이 된 장미 나무도 이제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장미가 피어 있었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화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현실에서 소외된 종이 저편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꽃처럼, 장미는 피어 있다.

166p.
..빗줄기는 이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행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옆에서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한 가랑비로 변했지만 눈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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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잘 맞아서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안 맞는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대에 가려는 녀석은 역시 좀 특이해."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다른 모두와 다른 것을 그 사람들은 아마 그런 표현을 써서 이해했겠지. 알기 쉬운 분류법을 찾아내서 머릿속에 이질적인 인간을 받아들일 장소를 마련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던 사가노 히토미가 ‘미대에 들어가려는 녀석’이라는 팻말이 붙은 ‘흔하디흔한 인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못 있을 법한 이야기를 원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주는 것만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진실인 것이다.
..자주 일어나는 일만 진실이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거짓말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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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p.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방인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랬다. 태어난 나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그저 세상에 던져진,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이상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의 경계를 떠도는 시간이었다.

180p.
...기운가쿠는 ‘구름이 일어나는 집‘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오래된 별장으로 아타미시의 유형 문화재이자 아타미의 3대 별장으로 불린다. 일본의 역사를 장식한 유명한 문인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머물며 작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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