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그날까지 날짜와 시간의 존재를 계속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우울한 기분으로 바닥에서 눈을 감았다.

42p.
..뭔가에 재능이 있다는 말은 당신은 그쪽에 있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재능이 있다는 건 인생을 자신의 특질에 지배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주 일찌감치, 내 진로는 ‘무‘라고 세계가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존중하는 행위로 위장한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대로 따르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65p.
..나 또한 이 광경을 조만간 잊고, 어쩌면 살짝 손질할 테죠. 인간에게는 흥미 있는 토픽, 지배적인 토픽이 있어서 모든 기억은 결국 그 구멍 속으로 떨어집니다.
..나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토픽인 우위와 불리가 도사린 구멍에 이 광경을 떨어뜨릴 겁니다.

77p.
...아이샤는 두 발을 따뜻한 담요 안에 넣으려면 어깨는 찬 공기에 내놓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한 아이였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 하나 거저가 아님을 잊은 적은 없었다....

135p.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격과 심리의 그림자 부분이 이유 없이 소멸하는 일은 없다. 특히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회복시키지 못할 때, 억압되고 배척된 갖가지 그림자는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간다.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아 급기야 우울증, 조증, 분열, 자해, 타인과의 충돌로 변한다. 또 어떤 것은 자의식의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몸 밖으로 나가 타인을 향한 무의식적 공격성으로 모양을 바꾸어, 끝내는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201p.
..이 귀중한 진공 같은 격리 기간 동안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바이러스(혹은 그 표면적 현상)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차단시켰다.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려란 무엇일까? 이상적인 파트너는 언제나 과묵하고, 겸손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멋대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일도 없고, 소음을 내지 않고, 타인의 방해가 될 움직임은 삼가면서도 곁을 지켜야 할 때를 안다. 두 사람은 관계 속에서 번갈아 ‘사물‘이 됨으로써 자신을 압축한다. 그로써 관계는 안전한 공간이 되고,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탐색할 수 있다. 격리의 나날 동안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용기를 얻었다. 최적의 반려는 ‘사물‘이다. 생명을 지니지 않는 ‘사물‘.

208p.
...그 무렵 나는 수시로 옛 남편과 아들을 떠올렸다. 침대는 비좁고 온갖 가구를 타인과 공유해야 했던 나날이었지만, 가슴에 복받친 것은 그리움도 비탄도 아니라 매사가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는 허무감이었다. 반고의 천지개벽과 세계의 종말처럼, 세상에는 애초에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을 안고 있건 마지막에는 무로 돌아간다.

255p.
...요 삼 년, 이런 환경에서 일한 덕에 성장이란 먹고사는 데로 눈이 쏠리게 되는 과정이고, 성숙이란 생활의 참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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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p.
...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몸 하나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서 악취가 나는데도 태평하게 꾸벅꾸벅 졸며 살아 있는 시간을 소진해가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한도 걱정도 없는 얼굴로 건물 옥상에서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사람, 보도블록에, 차의 보닛과 건물의 차양 위에, 혹은 누군가의 구두코 앞에 툭 떨어져 고개를 꺾는 사람, 거울 속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135p.
..연인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연인이 아니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서로를 욕망하는 정도는 모든 날이 달랐다. 우리의 머리칼이 새고 근육과 관절은 약해지던 그 어느날부터는 이렇게 가만히 서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이미 사랑을 나눈 것만 같았고, 나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젊은 시절엔 결코 납득하지 못했을 안온한 결여였다.

184p.
...무서움, HN0034는 제작 당시에는 입력되지 않은 그 감정을 1293번에 걸친 로딩을 통해 새롭게 배운 셈이다. 그건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에 저항할 능력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감정이란 것을 말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전체 수명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차감되며 폐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은 모든 수행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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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p.
..아침 죽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오래 살고 있다는 말은 나도 이해할 것 같았다. 라이온의 집에는 여기저기에 당근이 매달려 있다. 거기에는 작은 희망이 가득 박혀 있다.

138p.
.."이런 말들은 적 없으세요? 소보다 유(乳), 유보다 락(酪), 락보다 생소(生蘇), 생소보다 숙소(熟蘇), 숙소보다 제호(醍醐), 제호가 최상이니라. 락은 지금으로 말하면 요구르트, 생소는 생크림, 숙소는 버터, 제호는 다섯 가지 맛 중 마지막 맛, 우유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 최상의 맛입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진리라는 의미도 있어서 제호미라는 말도 여기서 생겨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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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그녀가 말했다. 벽에 적힌 글자를 낭독하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214p.
..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나는 그뒤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작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늙은 원숭이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먹었던 감씨과자와 진미채를 생각한다.

223p.
..카운터 건너편에는 갖가지 술병이 늘어선 선반이 있었다. 그 뒷면의 벽은 커다란 거울이었고, 내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당연히 거울 속의 나도 이쪽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대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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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3p.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143p.
..그럴 것이라 예상한 예고였다. 유나가 가진 독보적 기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문간에 발 들여놓기‘. 사소한 부탁으로 시작해 뒷일까지 내맡겨버리는 수법이었다. 상대는 알면서도 당한다. 아주 잠깐 핸드백을 들어줬을 뿐인데, 어느 틈에 모든 짐을 이고진 채로 시녀처럼 뒤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39~240p.
..쪼는 자와 쪼이는 자가 결판나는 순간은 최초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가 아니다. 최초로 복종을 끌어냈을 때다. 더하여 모든 관계는 서열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고착화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다.

437p.
..타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해내는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유나를 잘 안다고 자부해왔으나, 막상 까보니 착각이었다. 안다고 여겼던 건 유나가 아니었다. 유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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