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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두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일을 하다 일단 육지에 발을 디디면 찰떡을 밟은 작은 새처럼 하코다테나 오타루小樽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면 너무나 쉽게 ‘태어났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알몸이 되어 쫓겨났다. 결국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구축함은 날개를 접은 잿빛 물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선체를 흔들며 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몸 전체가 ‘잠‘을 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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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p.
..버리지 못한 이유를 아는 것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버린 이유를 아는 것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193p.
..시험 삼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읽고 보는 것은 내 인생의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책이나 TV를 보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훨씬 머리에 정보가 오래 남지 않나요?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귀찮다‘고 여겨지면 그 정보는 당신에게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199p.
..앞으로 많은 물건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를 들이면 둘을 버린다‘는 규칙을 세우면 물건을 줄이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옷을 사면 옷을 버린다. 식기를 사면 식기를 버린다는 ‘같은 장르 버리기‘도 괜찮고 ‘버리는 물건에 일용품이나 소모품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등 자기만의 규칙을 만들 것을 추천합니다.
..이 방법이 효과적인 것은 들이기 전 단계에서 ‘버리기‘를 생각함으로써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버리기가 아깝다면 새로 사들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204p.
..물건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형태가 없는 것에 돈을 쓰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나서 물건의 가치와 대면하는 기회가 늘어난 지금, 물건 이외의 가치를 느끼는 힘도 커졌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선물."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한 여행 경비."
.."내 미래를 만들기 위한 투자."
..있어도 없어도 그리 곤란하지 않고 오히려 관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드는 물건에 들였던 돈을 지금은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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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p.
...닥터 지바고가 운명의 어둑한 회랑을 거닐지 않으면 안 되었듯이, 아마 무슨 이유에서인가 역사적 굴곡의 상징이 되어 브래지어는 뜻밖의 비련에 휩쓸리게 된 것 같다. 불쌍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무엇인가의 상징‘ 같은 것만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34p.
..비행기 엔진이 멈추자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오후, 온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해 보였다. 구불구불한 산 능선과 소나무 숲과 곳곳에 흩어진 하얀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고, 저멀리에는 에게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떠돌며 헤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조용하며 아득히 멀리에 있었다. 지금까지 만사를 하나로 묶고 있던 띠 같은 것이 어떤 힘에 의해 풀려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대로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세계가 이미 다 흩어졌으니 앞으로는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다 끝내는 육체를 잃고 오감만이 남아 잔업 처리하듯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신기하고 적막한 느낌이었다.

51p.
...휴대전화의 착신 멜로디도 그렇지만, 후렴이 없는 음악은 함께할 곳이 없어 그런지 묘하게 지친다.
..문득 생각났는데 세상에는 종종 ‘후렴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핏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에 깊이가 없다고 할까, 미로 속으로 들어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여지없이 녹초가 되고 피로도 의외로 오래간다. 물론 이것 역시 비틀스한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얘기지만.

187p.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은 상처가 되는가 하면, 잘못된 칭찬을 받는 것일 터다. 이미 상당 부분 확신하는 바이다. 그런 칭찬을 받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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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내 방 여행‘ 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한겨울의 한강변으로 나가 걸었다. 마치 오랜 외국 여행에서 갓 귀국한 사람처럼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한 선배작가는 장편 출간에 즈음하여 가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탈고하고 밖으로 나오니 자기만 겨울옷을 입고 있더라는 말을 했다. 매일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그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망명이나 피난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이너 언어권에 속한 작가는 모국어가 양수처럼 편안히 감싸주는 곳에 있으려 한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운전자는 일인칭이다. 자동차는 그렇게 설계돼 있다. 운전을 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멋진 곳에 가서 놀라운 것을 경험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인칭의 경험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셀카를 찍어보지만, 셀카는 기본적으로 일인칭의 거울상으로 나타난다. 내가 렌즈를 보면 렌즈가 나를 찍는 것. 완벽한 삼인칭이 되지는 못한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 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적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반면 ‘여기 사시나봐요?‘ 같은 말이 별로 달갑지 않은 나라와 도시도 있다. 그때는 여행자로서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한다. 마치 식민지 인도에 부임했던 대영제국의 관리들이 찌는 듯한 폭염에도 셔츠의 단추를 풀지 않고 긴 소매의 재킷을 고집했던 것처럼 여행자의 표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오히려 여행을 떠나면 특별한 뭔가가 되는 느낌이었는데 작가로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그 반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해외에 나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아는 것 같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일종의 상징으로 제단에 모셔진 것이었다. 마치 과거에 내가 한 어떤 일에 대해 증인으로 참석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내가 비행기를 타고 먼길을 왔기 때문에, 그런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이 모일 수 있었고 그걸 기회로 출판사는 책 홍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한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는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뉴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조이스틱을 내려놓은 뒤부터는 아내와 함께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던 센트럴파크에 자주 나가 걸었다. 자연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상관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주의 시간표에 따라 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랗게 물들며 쏟아져내리는 은행잎을 맞으며 나는 연못과 작은 둔덕들 사이를 오갔다. 뉴욕의 가을을 만끽하려는 수천 명의 이름 없는 관광객들 사이에 묻혀 걸었다. 몇 주 동안 겪은 어둠이 천천히 녹아 사라졌다. 사실 뉴욕에 와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돌아와 새 소설을 시작해 이듬해 여름에 출간했다. 한때 무시무시했던 살인자가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노바디 중의 노바디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여행기는 모험 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여행기의 저자 역시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낸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와 그것을 글로 기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어린 날의 나에게 그것은 모험 소설이었고 여행기였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 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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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찌개 냄새가 났다. 그 소리와 냄새 속에 누워 있자니 한없이 따뜻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째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이 그리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은 곧 내가 혼자 몸을 일으키는 고요한 아침의 온도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이후로 나는 혼자 살기 위해 내가 들여야 하는 에너지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밤이면 잡생각과 일종의 불안 같은 것에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었다. 그 고단함이 혼자 사는 삶의 가뿐함과 즐거움을 넘어서게 된 시점이 그즈음 아니었을까 싶다.

..아열대의 공항에 내리면 코가 먼저 반응한다. 평생 비염과 더불어 살아온 나는 건조한 계절이면 코로 숨 쉬기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동남아 어느 도시나 사이판 같은 더운 섬의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한 발 내딛을 때면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몸을 감싸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그렇게 체온이 훅 올라갈 때 느끼는 기쁨은 천진하게 달려드는 강아지를 온몸으로 껴안는 듯한 기분이다. 몇 시간의 비행 이후 펼쳐지는 전혀 다른 공기와 햇볕, 식물들과 풍경, 건축양식과 음식의 총체적인 경이로움은 각각의 요소를 따로 떼어놓는 게 무의미한, 한 덩어리로 다가오는 그곳만의 특질들이다.

...이제 내 집의 가구와 물건들은 이후의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할 그날 같은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결에 들어서 버리자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아름답게 잘 만든 물건의 힘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내게 있어 자취가 아닌 독신 생활은 정확히 이 책장이 들어온 날 시작되었다.

...몸을 강하게 만들 필요를 알고 또 몸을 사용하는 재미를 느끼는 길에 늦게라도 접어든 것은 다행스럽다. 지금은 돈만큼이나 근육을 모으는 일이 중요한 노후 대비라고 여기게 되었고, 무엇보다 운동의 즐거움을 귀찮음과 겨뤄볼 만하다는 걸 아니까.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려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이 나라 모든 며느리, 사위, 장인·장모, 시부모들에게도 원래의 마음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왜곡 없이 이 원래의 마음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열무김치와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는 우리가 역시 위너인 것 같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도 말이 될 것 같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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