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p.
.."물론 너한테 생색을 낼 마음은 없어. 하지만 진실을 보자는 거야. 한 작품이 주목을 받으려면 어이없을 만큼 수많은 조건을 통과해야만 해."

391~392p.
..이번 사건을 맡으면서 문학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보게 되었지만,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描寫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것이라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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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하얀 개들이 그렇듯, 나를 보는 까만 점 세 개를 금세 사랑하게 됐다....

...어쩌면 아이를 낳는 일은 내 심장이 발을 달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아닐까? 나의 존엄과 목숨까지 좌우할 수 있는 존재, 그러니까 인생에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은 끝없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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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구분해 내는 경계선은 유머 감각이 있고 없고에 달렸다고 본다.

...정의란 단순한 상황에서만 빛이 난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요. 나쁜 놈처럼 생긴 사람은요, 양심의 갈등 때문에 나쁜 얼굴이 되는 거예요.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짜 악당은 실은 평범하게 생긴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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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p.
..하지메는 강의실 차광 블라인드의 승강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까지 이어진 창으로 들어온 늦은 오후의 엷은 오렌지색 햇빛이 계단식 강의실을 채워간다. 군데군데 남아 있던 몇몇 학생의 옆얼굴에 일제히 빛이 비친다. 눈이 부신 듯 창을 올려다보고 그것을 신호 삼아 일어나는 학생도 있다. 그림 같다고 생각한다. 《백과전서》의 동판화 속 양피지 공방의 장인들이 되살아난다. 크고 밝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그들은 익숙한 작업을 하던 손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83p.
..."...다만 다른 사람과 함께 걷지는 말아야 해요. 걸음걸이가 흐트러지고 옆을 향하고 말하며 걸으면 건성으로 걷게 되거든요. 넘어지거나 부딪치는 일은 건성으로 걸을 때 일어나요. 개는 걸어도 기둥에 부딪치거나 하지 않아요. 기둥에 부딪치는 것은 사람뿐이지요. 기분 내키는 대로 혼자 걷는 게 중요해요."

84p.
..선생은 미닫이문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휙 열고 휙 닫았다. 직선 같은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이번에는 천천히 열고 천천히 닫는다. 다다미 위를 기는 듯이 곧 가라앉는 소리.
.."서두르든 서두르지 않든 결국 걸리는 시간은 이 초 차이도 안 나. 그런데도 서둘러 열고 닫지. 서두르고 있다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불과해."

90p.
.."핏줄이 이어진 부모 자식은 사실 성가셔. 핏줄이 이어지지 않은 타인에게 사랑받으며 자란다면 오히려 진정한 신뢰를 키울 수 있을지 모르지. 아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174p.
..성장 방식의 차이는 교제가 깊어져 상대가 눈앞에 세워둔 간판을 옆으로 치운 뒤 부드럽고 약한 부분을 보여주었을 때 아주 조금 엿볼 수 있다. 마치 개가 벌렁 드러누워 부드러운 배를 보여줄 때와 같다....

182p.
...하지메의 주위에는 투명하고 단단한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담장은 바깥에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기력은 있으니까, 한동안 담장 안쪽에서 느긋하게 지내면 되겠지. 살아가는 데는 괴로운 일도 있지만 세포 하나하나가 들끓는 기쁨도 있다. 그런 것을 도저히 말로 전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유미는 먼지를 뒤집어쓴 자전거의 안장을 털어내고 힘껏 페달을 밟았다. 에다루 교회에 돌아와 있는 이치이를 만나러 간다. 이치이에게 지금의 자신에 대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아유미 안에서 온갖 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254p.
..에다루의 자기 방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흔적, 햇볕에 바래고 바람을 맞은 흔적이 있다. 방 하나에 부엌과 식당이 딸려 있는 삿포로의 작은 공동주택의 방에는 바로 지금의 자신이 얇게 도려내져 임시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269p.
.."신앙이 반드시 사람을 구한다, 잔인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각자에게 찾아오는 위기에 정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장면에서 항상 정답은 없습니다. 만약 신앙보다 먼저, 빛보다도 먼저 길 잃은 사람에게 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연민을 느끼는 마음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는 눈도 아닙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귀입니다. 얼마나 귀를 쫑긋 세우고, 얼마나 귀를 기울일 것인가. 이걸 잘못하면 바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 두레박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줄도 같이 말입니다.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게 됩니다. 밑바닥에 있을 지하수도 바싹 말라버립니다. 듣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만약 입으로 말을 해야 한다면 완전히 다 듣고 난 후 주뼛주뼛해야 하는 겁니다."

380p.
..원래 도요코는 그다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미리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 나머지 자신을 좁고 어두운 공간으로 몰아가는 것이 신지로의 방식이라면, 도요코는 확정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작고 적게 뭉쳐 이해했다. 도요코의 근거 없는 낙관성은 종종 신지로를 짜증나게 하고, 때로는 가즈에나 도모요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은 도요코 자신보다 신지로를 구원해왔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 서쪽 하늘에 검은 구름이 보이고 천둥소리가 한 번 들렸을 뿐인데 신지로는 창문을 닫으려 한다. 아직은 이렇게 해가 비치니까, 하며 도요코는 뜰로 내려가 지로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빗질을 해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이 거세지기까지는 되도록 창이나 문을 열어두고 싶다, 하고 도요코는 생각했다. 닫아버리면 여기에 갇히고 빛도 잃고 나갈 수도 없게 된다고 말하듯.

403p.
..하지메는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아유미의 임종 장면을 생생하게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일을, 자신의 머릿속만으로 말한다면 이런 것이었다.
..가족은 가족을 어색하게 보낼 수밖에 없다. 이치이는 아유미가 숨을 거두기 전에 아유미를 편안하게 보내는 절차를 조용히 혼자, 아니 누나와 둘이서 순조롭게 밟았다. 그때 누나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라고.

426~427p.
..아유미는 지로를 끄는 줄을 손에 쥔 채 이미 울고 있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유미는 벤치에 앉아 손수건을 눈에 대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아유미의 왼쪽에 있는 지로는 흐릿하게 하얗다. 주택과 상점이 늘어선 에다루 거리는 파란색과 초록색과 빨간색의 곰팡이가 핀 식빵이다. 언젠가는 죽어갈 바보들은 그저 북적거릴뿐 알아채지도 못한다.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나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지메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일로 나는 울고 있다.
..지로는 알고 있다. 지로밖에 모른다. 둔감한 인간들은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다. 울고 있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다. 이치이에게도. 이치이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왜 그래, 하고 물을 것이다. 나는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왜 그래, 가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이 기분에 적당한 이름을 붙여 정리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멋대로 덮쳐 누르는 것을 여기에 모두 버리기 위해 찾아왔다. 누구도 줍지 못하게 하려고.
..지로가 아유미에게 다가와 앞발을 들고 무릎께에 올렸다. 적갈색 발톱, 근육으로 뒤덮인 굵은 뼈의 무게. 짧고 하얀 털이 빽빽한 지로의 앞발.
..아유미는 지로를 끌어당겨, 지로의 하얀 볼, 하얀 귀밑에 얼굴을 들이댔다. 지로의 냄새를 맡는다.
..멀리 바위 밑에서 디젤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로, 지로. 말하자마자 눈물이 흐른다. 지로는 아유미의 볼과 입을 핥았다. 눈물도 함께. 언젠가 내가 죽으면 이 기분도 영원히 사라져 없어질 거야. 그러니 지로, 핥아둬.

473p.
...어느 것이나 하지메의 관심은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은, 그러나 이상할 정도의 열의에 의해 움직여지는 인물이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뭔가에 몰두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주위와 불화를 일으키고, 그 풍압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긴 장면에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인간의 호흡, 표정, 마음의 움직임을 그리고 싶었다.

474p.
..사라질 준비. 그것은 큰 고리를 중간 정도의 고리로 줄이는 일, 작은 고리를 중심을 향해 더욱 축소해가는 일, 고리였던 것은 결국 점이 되고 그 작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가 그 일이었다. 하지메의 등에서 뻗은 보이지 않는 선 끝에 있는 소실점은 지금 에다루 어딘가에 더는 움직이지 않도록 핀으로 고정되어 있을 터였다.

501p.
..아직 스무 살 안팎의 시인이 경애하는 소설가를 만나러 간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젊은 시인에게 소설가는 "어이, 자네, 그 다박나룻 좀 깎게" 하고 말한다. "남자의 본질은 자상함, 모성이네....... 어이, 자네, 그 다박나룻 좀 깎게."
..나중에 물로 뛰어든 소설가는 죽은 날 아침, 수염을 깎았을까, 다박나룻을 기른 채였을까. 멍하니 생각하는 중에 하지메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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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p.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거의 비슷하다. 어떻게 여자를 꼬드길 것인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한차례 그런 일들을 겪어보고 ‘쳇, 뭐야, 이 정도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잘 쓰고 못 쓰고는 제쳐놓고—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상태다.

79p.
..요즘 세상에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과거에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요즘의 폐쇄된 사회 상황이 무척 염려스럽다. 빠져나갈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116~117p.
..내가 어째서 이 별것 아닌 문장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색깔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선 로멜 장군의 빳빳한 남색 서지 군복, 흰색 테이블클로스, 막 튀겨낸 옅은 갈색의 비프커틀릿, 버터에 가볍게 볶은 누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북프랑스의 푸른 전원 풍경—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을 읽어나가며 언뜻언뜻 떠오른 것이 그런 색깔들의 어울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다 할 의미도 없는 그 문장이 언제까지고 머리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문장의 미덕이라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문장 말입니다.
..가령 소설 같은 걸 쓸 때는, 이렇게 열린 문장으로 시작하면 이야기가 점점 확대되어간다. 반대로 아무리 공을 들인 아름다운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게 닫힌 문장이면 얘기는 거기서 그만 멈추고 만다.

122p.
..식당칸에는 왠지 ‘일시적인 제도‘라고나 할 만한 독특한 분위기가 떠다닌다. 즉 식당칸에서의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맛을 음미하기‘ 위한 식사도 아니다. 우리는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불분명하고 잠정적인 식욕을 품고 식당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어디론가 확실하게 옮겨져간다. 애달프게 보면 애달프기도 하다.

275p.
..때때로 혼자서 토론을 하며 즐기곤 한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꼬리가 있는 편이 좋은가 아닌가‘ 하는 주제를 놓고 꼬리 지지파 A와 꼬리 배척파 B를 차례차례 연기한다. 그래보면 인간의 의견 혹은 사상 같은 것이 얼마나 불분명하고 임기응변적인지 알 수 있다. 물론 그 불분명함과 임기응변적인 부분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울 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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