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p.
..빵은, 먹는다기보다 깨문다고 하는 편이 적합하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도, 빵은 저마다 혼자서 깨무는 것이다. 때로 와삭와삭. 거기에는 무언가 여정을 닮은 맛이 배어 있다. 바깥 공기를 닮은 것, 외로움을 닮은 것, 오기를 닮은 것.

185~186p.
..여행을 할 때는, 기억과 지식과 체력과 사교성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 몸에 지닌 것들만이 그 사람을 뒷받침해준다. 나는 그런 상태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안심감과 단순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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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p.
..산수국이 피었다. 주변의 연보라색 꽃들이 가운데의 진보라색 꽃을 액자처럼 두르고 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고독을 느끼게 했다.
..소리와 풍경과 냄새 모두가 뒤섞이며 점점 흐려졌고, 점점 작아져서 손가락을 내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닿는 손가락이 없다. 닿을 수가 없다. 다섯 손가락에 다섯 손가락을 포갤 수도 없다.
..존재하지 않으면 소멸할 수도 없다.

49p.
..분명 자식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인데, 어머니를 올려다보는 아기가 된 기분이 들어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63p.
..노력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노력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느꼈다.
..나는, 고이치의 죽음을 듣고 나서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일하려는 노력은 해왔지만 지금 이 노력은 살려는 노력이다.
..죽고 싶다기보다도 노력하는 데 지쳤다.

80~81p.
..아침이 되었다.
..고이치가 죽고 나서 다섯번째 아침이었다.
..고이치가 죽기 전에는 늘 눈꺼풀 안에서 잠이 깨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이 언제인지를 인지하고 나서 눈을 떴는데, 고이치가 죽은 이후로는 고이치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집 안에 있는데 밖에서 아이가 친 야구공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것처럼, 외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아침마다 잠을 깨우고 밤마다 잠을 두려워하게 했다.

106p.
..듣는다.
..말하는 일은 넘어지고, 헤매고, 빙 돌아가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곤 하는데 듣는 일은 직통이다—, 언제나 온몸이 귀가 될 수 있다.

114p.
...비밀은 반드시 숨기고 싶은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숨길 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된다.
..늘 여기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내 가족이라 하더라도 여기 없는 사람을 여기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 없는 사람에 대한 추억의 무게를 말을 함으로써 줄이기 싫었다. 내 비밀을 배신하기 싫었다.

137p.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장미가 핀 시기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장미를 그린 르두테라는 화가는 170년 전에 죽었다. 그림 모델이 된 장미 나무도 이제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장미가 피어 있었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화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현실에서 소외된 종이 저편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꽃처럼, 장미는 피어 있다.

166p.
..빗줄기는 이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행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옆에서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한 가랑비로 변했지만 눈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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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잘 맞아서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안 맞는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대에 가려는 녀석은 역시 좀 특이해."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다른 모두와 다른 것을 그 사람들은 아마 그런 표현을 써서 이해했겠지. 알기 쉬운 분류법을 찾아내서 머릿속에 이질적인 인간을 받아들일 장소를 마련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던 사가노 히토미가 ‘미대에 들어가려는 녀석’이라는 팻말이 붙은 ‘흔하디흔한 인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못 있을 법한 이야기를 원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주는 것만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진실인 것이다.
..자주 일어나는 일만 진실이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거짓말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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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p.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방인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랬다. 태어난 나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그저 세상에 던져진,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이상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의 경계를 떠도는 시간이었다.

180p.
...기운가쿠는 ‘구름이 일어나는 집‘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오래된 별장으로 아타미시의 유형 문화재이자 아타미의 3대 별장으로 불린다. 일본의 역사를 장식한 유명한 문인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머물며 작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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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정직하죠.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개는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갑니다. 무엇을 방에 두고 무엇을 장식하고 무엇을 감춰두는지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도 알게 되죠."

.."무엇이든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예요."

...마사에는 고구레와 나쓰미의 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인생에 버릴 수도 열 수도 없는 발신만 되는 우편함을 남겨두고 떠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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