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 ..산수국이 피었다. 주변의 연보라색 꽃들이 가운데의 진보라색 꽃을 액자처럼 두르고 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고독을 느끼게 했다. ..소리와 풍경과 냄새 모두가 뒤섞이며 점점 흐려졌고, 점점 작아져서 손가락을 내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닿는 손가락이 없다. 닿을 수가 없다. 다섯 손가락에 다섯 손가락을 포갤 수도 없다. ..존재하지 않으면 소멸할 수도 없다.
49p. ..분명 자식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인데, 어머니를 올려다보는 아기가 된 기분이 들어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63p. ..노력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노력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느꼈다. ..나는, 고이치의 죽음을 듣고 나서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일하려는 노력은 해왔지만 지금 이 노력은 살려는 노력이다. ..죽고 싶다기보다도 노력하는 데 지쳤다.
80~81p. ..아침이 되었다. ..고이치가 죽고 나서 다섯번째 아침이었다. ..고이치가 죽기 전에는 늘 눈꺼풀 안에서 잠이 깨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이 언제인지를 인지하고 나서 눈을 떴는데, 고이치가 죽은 이후로는 고이치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집 안에 있는데 밖에서 아이가 친 야구공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것처럼, 외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아침마다 잠을 깨우고 밤마다 잠을 두려워하게 했다.
106p. ..듣는다. ..말하는 일은 넘어지고, 헤매고, 빙 돌아가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곤 하는데 듣는 일은 직통이다—, 언제나 온몸이 귀가 될 수 있다.
114p. ...비밀은 반드시 숨기고 싶은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숨길 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된다. ..늘 여기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내 가족이라 하더라도 여기 없는 사람을 여기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 없는 사람에 대한 추억의 무게를 말을 함으로써 줄이기 싫었다. 내 비밀을 배신하기 싫었다.
137p.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장미가 핀 시기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장미를 그린 르두테라는 화가는 170년 전에 죽었다. 그림 모델이 된 장미 나무도 이제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장미가 피어 있었다. 언젠가 어느 곳에 어느 화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현실에서 소외된 종이 저편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꽃처럼, 장미는 피어 있다.
166p. ..빗줄기는 이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행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옆에서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한 가랑비로 변했지만 눈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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