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매사에 리스트를 만들려고 할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리스트를 작성하게 할까? 나는 독서광이 된 뒤로, 애니 서점에서 용돈을 다 탕진한 뒤로 늘 이런 리스트를 작성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열 권. 제일 무서운 책 열 권. 제임스 본드 시리즈 걸작선. 로알드 달 걸작선. 어릴 때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딕 프랜시스가 쓴 소설을 한 권도 빼지 않고 다 읽은 (그리고 그중 최고의 작품 다섯 권을 꼽을 수 있는) 열두 살 소년이었다. 그게 없다면 난 그저 친구도 없고, 사이가 소원한 어머니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아버지를 둔 외로운 소년에 불과했다. 그게 내 정체성이었는데 누군들 그런 정체성을 원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궁금한 점은 왜 아직도 리스트를 계속 작성하냐는 것이다. 이제 나는 보스턴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사실 나는—아마 기만을 바탕으로 한 픽션의 왕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편견이 생겼을 테지만—화자를 믿지 않듯이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결코 완전한 진실을 얻을 수 없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 말을 나누기 전에도 이미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은 옷은 몸의 진실을 가리지만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 옷은 직조이자 날조다.

...내게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과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 서점에 10분간 머물다가 사이먼 브렛의 중고책을 사 가는 나이 든 독일 관광객에게는 엄청난 애정을 느끼지만, 누군가를 잘 알게 되면 상대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들 앞에 유리 칸막이가 있고 그 유리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듯하다. 상대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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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일은 수습 때가 가장 힘들다. 신체 조건이 나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그 여자처럼 바람에 쓰러질 듯 약한 사람이 오면 우리는 아예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괜히 도와주었다가는 이 일이 할 만하다는 오해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버텨낸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건장해 보이는 사람을 오히려 도와주고 약해 보이는 사람은 외면했다.

..다른 지원자에 비해 내 어투가 너무 점잖았던 것도 그의 경계심을 키운 이유 중 하나였다. L매니저도 점잖은 사람이지만 나중에 보니 그는 성격이 좀 ‘거친’ 택배기사를 좋아했다. ‘거친’ 사람은 대체로 자존심이 그리 세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자존심이란 게 정말이지 이 일에 있어 방해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심해의 물고기는 눈이 보이지 않고 사막의 동물은 갈증을 잘 참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내가 처한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업무 환경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음을, 더 조급하고 쉽게 욱하고 무책임하게 바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지켜왔던 기준을 지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제야 문득 1년 넘게 일했는데도 아침 8~9시의 하이퉁우통위안과 치젠카이쉬안 단지를 보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존에 짜놓았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단지로 들어서자 느낌이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내 일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걱정과 불안 때문에 시도할 수 없었던 각도, 아무 목적 없는 각도에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정해진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책망하고 화내는 시급 30위안짜리 배송 기계로 보지 않아도 됐다.

..바로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한 사람을 좋아한다. 단순한 사람들은 표상을 꿰뚫어 보지 못해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날들이 완전히 새로운 날이고 만나는 사람들도 전부 낯선 사람이다. 그들은 똑같은 고통과 행복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느낀다.

..이제 나는 젊었을 때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려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려 하지도 않고, 겉과 속이 다르다는 오해를 살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충동은 맹목적이고 헛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므로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진실함을 믿게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진실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실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비천한 사람들은 불만이 생길 때 권력에 반항해 봐야 힘만 들기 때문에 다른 비천한 사람을 괴롭힌다. 누구도 괴롭힐 수 없을 때는 동물을 학대한다. 흔히 사랑을 맹목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랑은 맹목이나 공리와 동떨어진, 본심에 충실한 감정이다. 맹목적인 것은 오히려 증오다.

..이를테면 나는 ‘남을 실망시키는 상황’을 몹시 두려워했다. 누가 칭찬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곧장 부인한 뒤 스스로를 최대한 낮췄다. 나중에 내가 그들이 생각했던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나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게 나았다. 누가 나를 좋게 보면 언젠가 간파될 거라는 위기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계속해서 칭찬하는 사람은 피하고 멀리했다. 그러면 나는 ‘버리는 사람’이 되지, (상상 속에서) 결국 ‘버려지는 사람’은 되지 않았다. 그건 이성적인 전략이라기보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빙산 이론은 글쓰기를 막 시작한 내게 유익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글로 표현한 부분보다 써내지 않는 부분이 방대하고 묵직해야 했다. 소설의 예술성은 제한된 글자와 이미지 안에 무한한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는 데 있었다. 나의 첫 글쓰기는 그것을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여백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가 아니라 쓰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검소하고 궁핍하게 살면서 소농 의식이 생긴 나는 돈을 쓸 때 거부감이 일곤 했다. 오래전부터 저축이 1만 위안 밑으로 떨어지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1만 위안이 심리적 안전선이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으니, 사업 운영에 무척 소극적이고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반대로 어떻게 파산을 피할지는 늘 고민했다. 답은 돈을 적게 쓰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자유는 고도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개인적 갈망과 자아실현이며 타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신이다. 나는 그런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다양하고 다원적으로, 더욱 평등하고 포용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다각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할 수 있게 돼야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할 것이기 때문에 좁은 외나무다리에서 부딪칠 필요가 없어진다. 유전적 차원에서 환경에 대한 적응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사회 전체의 행복은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다양성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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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p.
여러분의 마음 안에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공간을 만드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품어주세요

124~125p.
잠이 나에게 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내가 잠에 들어간다
라는 것을

잠에
못 들어가면서부터 알았습니다

잠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둠 속에
남겨지는 거더라고요

160p.
내 마음의 선과 악 중에서
선을 꺼내어 쓴다

악은 꺼내어지지만
쓰지는 않아

선은 쓰면서 기억하고
악은 쓰지 않으면서 망각하며
그들을 다스려본다

235p.
뇌 안에서 머무르는 그들이
옅어지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살면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가
꼭 그사람으로부터 치료받아야 하는 것이 아님을

그 사람의 잘못을
새사람이 덮어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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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p.
..경은 주방으로 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에이치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남자의 등은, 바람 많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든든한 방풍막이자 방파제였다. 적어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여러 남자를 사귀면서 남자의 등이 모두 다 아버지나 삼촌들의 등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등은 거짓의 어두운 베일이었고 어떤 등은 짐승의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편 등은 오물뿐인 가죽 부대이자 통곡의 벽이었다....

66p.
.."웃는 늑대와 우는 늑대의 차이는 이빨이야."
..령이 늑대 도안을 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우는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지. 슬프거든.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은데 이빨이 무슨 소용이겠어. 반면에 웃는 늑대는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거야. 늑대한테 그게 뭐겠어. 물어뜯는 일이겠지."

165p.
..자기 앞에 선 누군가와의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무저갱이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런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공포였다.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나와 미지의 존재 사이의 간극, 그것이 공포였다.

257p.
...이제 이곳은 고향도 아니었다. 방파제, 방풍막 같은 든든한 고향 남자들이란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준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여자를 위한 남자의 든든한 등 따윈 없었다. 그녀를 위한 등은 더더욱 없었다.

295p.
..모비는 그 말을, 그 구절을 잊지 않았다. 성경 구절처럼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근본도 없었다. 그는 그 구절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임을 잊지 않았다. 이미 죽어서 태어난, 그러니 또 한 번 죽을 일도 없는 어떤 자에 대한 이야기. 죽어서 태어나 다신 죽지 않을 자. 시작한 날도 끝이 날 날도 없는 자, 시작도 끝도 없는 자.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자. 밖에도 안에도 아무도 살지 않는 자. 아무도 아니면서 모두인 자. 유일한 자이면서 동시에 군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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