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p. ..경은 주방으로 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에이치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남자의 등은, 바람 많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든든한 방풍막이자 방파제였다. 적어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여러 남자를 사귀면서 남자의 등이 모두 다 아버지나 삼촌들의 등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등은 거짓의 어두운 베일이었고 어떤 등은 짐승의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편 등은 오물뿐인 가죽 부대이자 통곡의 벽이었다....
66p. .."웃는 늑대와 우는 늑대의 차이는 이빨이야." ..령이 늑대 도안을 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우는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지. 슬프거든.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은데 이빨이 무슨 소용이겠어. 반면에 웃는 늑대는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거야. 늑대한테 그게 뭐겠어. 물어뜯는 일이겠지."
165p. ..자기 앞에 선 누군가와의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무저갱이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런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공포였다.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나와 미지의 존재 사이의 간극, 그것이 공포였다.
257p. ...이제 이곳은 고향도 아니었다. 방파제, 방풍막 같은 든든한 고향 남자들이란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준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여자를 위한 남자의 든든한 등 따윈 없었다. 그녀를 위한 등은 더더욱 없었다.
295p. ..모비는 그 말을, 그 구절을 잊지 않았다. 성경 구절처럼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근본도 없었다. 그는 그 구절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임을 잊지 않았다. 이미 죽어서 태어난, 그러니 또 한 번 죽을 일도 없는 어떤 자에 대한 이야기. 죽어서 태어나 다신 죽지 않을 자. 시작한 날도 끝이 날 날도 없는 자, 시작도 끝도 없는 자.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자. 밖에도 안에도 아무도 살지 않는 자. 아무도 아니면서 모두인 자. 유일한 자이면서 동시에 군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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