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매사에 리스트를 만들려고 할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리스트를 작성하게 할까? 나는 독서광이 된 뒤로, 애니 서점에서 용돈을 다 탕진한 뒤로 늘 이런 리스트를 작성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열 권. 제일 무서운 책 열 권. 제임스 본드 시리즈 걸작선. 로알드 달 걸작선. 어릴 때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딕 프랜시스가 쓴 소설을 한 권도 빼지 않고 다 읽은 (그리고 그중 최고의 작품 다섯 권을 꼽을 수 있는) 열두 살 소년이었다. 그게 없다면 난 그저 친구도 없고, 사이가 소원한 어머니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아버지를 둔 외로운 소년에 불과했다. 그게 내 정체성이었는데 누군들 그런 정체성을 원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궁금한 점은 왜 아직도 리스트를 계속 작성하냐는 것이다. 이제 나는 보스턴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내게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과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 서점에 10분간 머물다가 사이먼 브렛의 중고책을 사 가는 나이 든 독일 관광객에게는 엄청난 애정을 느끼지만, 누군가를 잘 알게 되면 상대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들 앞에 유리 칸막이가 있고 그 유리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듯하다. 상대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