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 «빛 속으로»
..기분 탓인지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아마도 이 군 앞에서 적어도 이름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였었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기분으로 그를 대할 수 없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비굴함이 존재한다는 증거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조금 허둥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 P-1

118~119p. «천마»
..특히 가도이의 극히 인문학적인 설명에 의하면 조선의 청년은 하나같이 겁쟁이인데다 비뚤어진 근성을 가지고 있고, 뻔뻔하고, 심지어는 당파심이 강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다나카도 그 좋은 표본이 도쿄에서 알고 지내던 현룡이라고 했다. 도쿄의 유명한 작가 오가타가 경성에 왔을 때 오무라의 주선으로 조선의 몇몇 문인들과 함께 자리를 만들었는데, 오가타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룡에게서 조선인 전부를 보았다고 한 것은 역시 날카로운 예술가의 혜안이라고 찬탄했다. 오가타가 여기에 조선인이 있다고 외치면서 현룡을 가리켰을 때, 실제로 조선의 문인들은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현룡은 너무나 득의양양하게 히죽히죽 웃으며 기뻐했던 것이다. - P-1

181p. «풀이 깊다»
..산간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뭔가 하늘에서 내려준 기적이라도 일어날 것을 바란 나머지, 언젠가는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몸을 호랑이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인식은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어서, 그저 이런 두려운 현실로부터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들은 조선인은 흰옷을 벗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의 눈앞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장 입구 포플러 나무 아래 서 있던 작은아버지와 코풀이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 P-1

210p. «노마만리»
..사실 1945년이란 시기의 조선은 참으로 형형색색의 인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기는 모르되 이 베이징 천지에도 얼핏 보기에는 범놀음을 하는 범가죽을 쓴 개들이 많을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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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p.
..하지만 사형 제도의 쇠퇴와 시기를 같이 하여 세계 각국에서 흉악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흉악 범죄가 늘어난 배경은 걷잡을 수 없는 환경 파괴와 수그러들 낌새가 없는 인구 증가세에서 발단된 지구 멸망론이 유포된 탓으로, 사형 제도와는 무관하다고 단언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고삐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한 탓에 말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라 느끼기 시작했다. - P83

286p.
..육체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지만, 과거를 돌이켜볼 수는 있다. 머릿속에서는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 - P286

286p.
..밀실A 내부에 밀실B가 있다고 치자. 이 경우 밀실A에서는 밀실B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요컨대 외부와 다름이 없다. 제리미스탄 종말감옥 자체가 거대한 우리라 할 수 있었다. 철창살 너머로 감옥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옥 밖에 있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내게는 감옥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독방에서는 노동의 의무가 없다. 노동이 면제되는 대신 사흘 후에 나는 처형된다. - P286

343~344p.
..인간의 뇌는 어떨까.
..뇌 속에는 동결된 시간이 잔뜩 비축되어 있다. 뇌가 없으면 시간은 비축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뇌는 타임캡슐과 같다.
..동시에 시간이란 것은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기도 하다. 뇌가 없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뇌는 모래시계와 같다. - P343

357p.
..한 알 한 알의 모래에는 막대한 역사가 있다. 지구의 성립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막대한 역사가.
..과거에는 땅속을 흐르는 작열의 마그마였던 적도 있었으리라. 지상으로 나와 식고 굳어서 딱딱한 암반이 된 적도 있을 것이다. 물과 열과 바람의 힘으로 침식되고 분쇄되고 풍화되어 형태를 바꾸어 왔을 것이다.
..한 알 한 알의 모래에는 막대한 역사가 있다.
..내가 살아온 30년의 인생은 모래 한 알의 역사에 비하면 헛웃음이 날 정도로 짧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죽음의 공포가 아주 조금 완화되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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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p. «줄 서기»
..인류의 적응력은 유명하지만, 향상된 생활 형편만큼 인간이 빨리 적응하는 것은 없다.... - P-1

57~58p. «줄 서기»
..푸시킨은 망설임 없이 줄 끝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도 너덜너덜한 외투를 입은 남자 한 명이 가까운 골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푸시킨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알려주었다. ‘여기예요. 이쪽이에요, 친구.‘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남자가 와서 줄을 서면, 푸시킨은 더 이상 줄의 맨 끝이 아닐 것이다. 아니, 사실 그 무엇의 끝도 아닐 것이다. - P-1

73p.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
..세상이 장원과 오두막으로 나눠져 있던 시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대신 우리 시대에는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이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팔자를 고치려면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거나 철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반면, 지금은 일주일에 추가 수입이 50달러만 생겨도 사다리를 한 단 더 올라가 조금 더 맛있는 수프, 조금 더 세련된 셔츠, 자연광을 조금 더 받는 거실을 누릴 수 있다. - P-1

106p. «아스타 루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는 이미 스미티가 덩치와 달리 부드러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나란히 서고 보니, 그가 십중팔구 그 덩치 때문에 부드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처럼 큰 덩치로 다른 사람들 머리 위로 우뚝 서 있다가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자세를 고치는 법,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는 법, 몸짓에 서투른 느낌을 조금 섞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는 북극곰의 몸을 한 판다였다. - P-1

146p. «나는 살아남으리라»
..넬의 어머니와 계부 존은 파크 애비뉴와 83번가가 교차하는 곳의 웅장한 건물에 살았다. 엘리베이터 여러 대가 두 곳에 나뉘어 설치되어 있고, 도어맨이 네 명이나 되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사는 아파트의 여러 방은 워낙 어둡고 풍부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보자마자 도덕적인 자신감이 느껴졌다. 침실이 하나뿐인 우리 아파트가 달걀 껍질 색이나 아이보리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보면, 넬과 내게는 그런 도덕적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1

189p. «나는 살아남으리라»
...나는 페기가 배신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넬의 작은 카메라 화면 속에서 남편의 비밀스러운 외출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한 기쁨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없는 곳에 존재하는 기쁨, 게다가 그녀가 없어야만 가능할 것 같은 기쁨. - P-1

239p. «밀조업자»
..아, 우리가 얼마나 박수를 쳤는지. 처음에는 의자에 앉은 채, 그다음에는 일어서서. 우리는 이 거장 연주자나 이 작품이나 바흐에게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우리가 공유한 기쁨, 공유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그 기쁨에도 박수를 보냈다. - P-1

253p. «디도메니코 조각»
...그러나 디도메니코가 의뢰받은 작품의 완성보다 예술가들의 교육에 더 많은 힘을 쏟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의 작품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바로 그가 1475년에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그린 <성수태고지>였다. 내 증조부는 1888년 유럽 대륙 순회여행을 하던 중에 파리의 어느 미술품 거래상에게서 그 그림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뉴욕의 집으로 가져와 가장 상석에 걸어놓았다. 그가 식당에서 앉는 자리 뒤편의 벽 높은 곳. 그는 그 그림을 볼 수 없는 위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의 이미지에 그 그림이 융합되는 위치였다. - P-1

262p. «디도메니코 조각»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태어난 뒤 10년 동안 형성되지만, 그 10년의 분위기는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 10년 동안 결정된다.... - P-1

319p. «할리우드의 이브»
..이 나라, 이 삶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자리와 동료를 고르고, 생계를 해결할 방법도 고른다.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간다. 장소와 사람과 방법을 고르는 방식으로. 그렇다면 그런 요소들을 하나씩 잃을 때마다 체에 걸려 사라지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배우자를 땅에 묻는 일, 일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것, 22년 동안 살던 집에서 이사가는 것, 이렇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없던 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통해 시간과 의지가 고독한 영혼을 다시 차지하고 저만의 웅대한 계획을 펼치려 한다. - P-1

325p. «할리우드의 이브»
..그 순간 그것이 다시 보였다. 결정을 내린 사람의 반짝임. 이유도, 충동도, 더 웅대한 계획과 연결된 사슬도 없기 때문에 더 훌륭한 결정. 그 순간 찰리는 자신이 아들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확신했다. - P-1

331p. «할리우드의 이브»
..그녀의 질문에 드러나는 호기심은 또 얼마나 세련됐는지. 젊은 시절의 갈릴레이나 아이작 뉴턴도 아마 그런 호기심을 품었을 것이다. 지난날의 변덕스러운 확신에 노예처럼 매달리지 않고(사실 오히려 그런 확신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관심을 보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우리가 우주공간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붙잡아주는 불변의 법칙에도 관심을 보였다. - P-1

380p. «할리우드의 이브»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내가 말해 주죠. 여긴 대합실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대합실이에요. 우리는 모두 나무 벤치에 앉아 어제 신문을 읽고, 어제 점심을 먹고 있죠. 하지만 가끔 플랫폼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차장이 한 명을 들여보내 페이데이 고속열차를 탈 수 있게 해줍니다. 우편실에서 일하면서 쓴 작품이 어찌어찌 커다란 떡갈나무 책상까지 도달하게 된 삼류 작가가 그 열차에 탈 때도 있고, 우아한 아가씨가, 그러니까 당신 친구 같은 사람이 농장에서 뽑혀 오기도 하죠.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인간에게 그 기회가 올 때도 있습니다." - P-1

403p. «할리우드의 이브»
..목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걸. 이브는 깨달음을 얻었다. 목록이 반드시 숙녀가 되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들의 카탈로그일 필요는 없었다. 얼마든지 계획과 포부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즐거운 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는 일들의 목록! 목록을 좌우하는 것은 생각이었다. - P-1

438p. «할리우드의 이브»
..이렇게 청소를 끝낸 집 분위기가 찰리에게 잘 맞았다. 어느 날 집에 들른 오랜 친구는 찰리가 20년 넘게 산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기차역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누군가가 어딘가로 향하는 길에 잠시 멈춰 서는 곳. 사람은 무거운 몸으로 말년을 맞을 수도 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맞을 수도 있는데, 찰리는 반드시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 P-1

589p. «할리우드의 이브»
..이브는 생각했다. 그래, 산타아나나 사막의 모래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매진하는 사람의 업적을 반드시 무위로 돌리는 건 아니지.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장인들 한 무리가 망치와 붓과 속돌을 들고 나서서 참을성 있게 작업해야만 자부심 높은 자의 궁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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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서문
..해즐릿이 쓴 에세이의 베일은 매우 얇아서 그것을 벗기면 다름 아닌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콜리지가 본 그대로 "이마를 아래로 드리우고, 신발을 관조하는 듯한 기이한" 사람의 모습이다....

47p.
..우리는 누군가의 기지에 당황하고 경계하는 처지에 놓이는가 하면, 누군가의 아둔함은 죽도록 지겹다. 전자의 재치 있는 말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복되면 진부해지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효과를 상실한다. 한편 후자의 무미건조함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재미있거나 지식을 주는 친구는 기껏해야 얼마 뒤에는 그냥 책장에 꽂아 두고 싶은 애독서와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들은 책장에 꽂히기를 꺼려하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싹튼다....

48p.
...지금까지 말한 모든 또는 그 가운데 어떤 이유는 점점 커져 머잖아 냉정이나 노여움에 이른다. 그러다가 냉정이나 노여움을 오래 억눌러 온 것에 대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으로서, 현재의 감정과 어긋난 과거의 친절에 대한 기억을 털어 버리기에 손쉬운 수단으로서 마침내 공공연히 폭력성을 띠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주물러 변조하거나, 사멸한 우정의 잔해를 주워 맞추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자는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할 테고, 후자는 잔해에 향유를 발라 방부 처리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없다!

57p.
...내가 왜 이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림을 떠올려서 불운과 나 사이를 영원히 가로막는 차단막으로 쓰지 않을까? 그 이유는 고통보다 즐거움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정신적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되이 조금 시간을 낭비한 뒤 사랑하는 것에서 미워하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60p.
...나처럼 이 모든 것을 보고, 인생의 직물을 풀어 비열함과 악의, 비겁함, 감정의 결핍, 이해의 결핍,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다양한 실로 구분하고, 관습이 모든 우수성을 압도하고 악행에 길을 내주는 것을 보고서, 타인을 내 관점에서 평가하되 잘못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품은 희망이 와오되었어도, 우정에 속는 얼간이이자 사랑에 우롱당하는 바보인 내가 가장 의지하던 것에 낙담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68~69p.
..왜냐하면 할 수 있는 동안은 현재를 소유하고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를 빼앗기고 현재가 있던 방이 텅 비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별의 아픔, 움켜쥔 것을 놓는 아픔, 단단한 인연을 끊어 버리는 아픔,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죽음에 격렬히 반발하고 "오래 사는 불행을 겪는다."

83p.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고자 할 뿐이라면 우리는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편, 삶에서 얻는 좋은 것 때문에 존재에 애착할 뿐이라면 떠날 때의 고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94~95p.
..그렇다면 질투는 정의감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질투는 사칭과 엉터리에 대한 방어책인 것이다. 우리는 허식적이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숨겨 놓은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내주지 않지만, 정당한 명성을 날릴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런 가치와 자격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이 제거되어 우리에게 방해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숭배와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모든 의혹과 분분한 의견이 죽음으로 일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혀에는 자유가 있어서 죽은 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방종해진다....

136p.
..이와 달리 학교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건강하고 쾌활하다. 자유롭게 행동하되 주의깊은 아이는 자신의 피의 순환과 심장의 움직임을 느낀다. 웃다가도 금방 울 수 있고, 케케묵은 철자 교본을 보다 졸고 만다. 이런 아이는 선생님이 불러 주는 외국어 구절을 따라 말하고 수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붙박혀 앉아 있기보다는, 학기말이나 연말에 즐거움을 누리지 않은 대가로 하찮은 상장이나 받기보다는, 공을 차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얼굴 한가득 자연의 공기를 느끼고, 들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다니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온갖 소소한 갈등이나 이해관계에 기꺼이 끼어든다.

142p.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이 정말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매우 작은 범위(일상사, 경험, 우연히 알게 된 것, 공부나 연습을 할 동기)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꾸밈과 속임이다....

160p.
..물질은 나를 얼마나 압박하는가! 사실이란 얼마나 완고한가! 자연과 예술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언젠가 리치먼드 씨가 "여러 다양한 걸 봐두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닭싸움이 유익한 구경거리라는 말이었다. 도덕에 관한 논문이라도 같은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것보다 이런 실용적인 것을 단편적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 사물의 (마땅히 어찌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됨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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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p.
...그래도, 그렇게 뜰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샌드위치 반쪽씩을 먹고 있노라니 무언가를 함께 나눈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29p.
...돈은 종이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눈에 띄지 않는다. 대체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 때문이다. 돈이 공중에 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걸이나 그런 것과도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때에는 꺼내서 그중 일부를 내준다. 목걸이를 내주는 일은 없다. 그렇다 해도 목걸이는 돈이 있다는 신호다. 그냥 그렇다. 사람들은 숨겨놓은 것이 있다는 신호를 내비친다. 그것도 대화처럼 오고 간다.

41p.
..당신이 젊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도 60세, 70세, 80세, 혹은 90세가 된 여성의 눈에 떠오른 반짝임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 여자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 여자에게 당신은 그저 소녀일 뿐이니까. 아기와 신발과 섹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그저 삶을 장난처럼 즐기는 소녀일 뿐이다.

93p.
...그래, 그렇게 작고 빛나는 눈으로 부드럽고 안전하게 쉬고 있는 머리는 마치 아기가 되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하고, 그럼 나는 그들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으리라. 그 아기의 머리를 나의 사유 재산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정말로 나는 그렇게 여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유가 점점 외로워지고, 지루해지고, 겁을 먹고는, 또 다른 머리와 합류하기를 바라게 되는 일도 무척 잦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머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자신의 머리를 소유하는 일이 다른 이의 머리를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 커져가는 일도 잦아진다. 사랑과 소통을 향한 완벽히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우러난 채로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서, 통제와 권력을 향한 욕망에서 괴물이 자라나기도 한다. 되도록 많은 머리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란다....

129~130p.
...어쩌면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하인이다. 누가 그런 하인을 고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세계는 고용될 준비를 갖춘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각 가정이 작가 하인을 고용하여 자리에 앉힌 뒤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인간적인 골칫거리에 집중하도록 한다면, 모든 가정은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집에 앉아 있을 작가를 고용하는 건 실용적이라고 할 수 없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할 것이고, 작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과 동물들을 조용히 시킬 하인이 한 명 더 필요할 것이며, 작가에게도 모든 생물들처럼 음식을 먹여야 할 테니까. 그리하여 세계는 상대적으로 집에 더 데려가기 쉽고, 공간도 더 적게 차지하며, 먹여 살릴 필요도 없는 책을 이용하는 천재적인 계획을 생각해낸 것이다. 각각의 책 속에는 손가락에 못이 박인 하인, 즉 작가가 들어앉아 우리가 세상의 걱정거리를 떨쳐낼 수 있도록 우리 대신 그런 것들에 집중한다....

141p.
...그게 무엇이든 모기장을 그 위에 쳐놓으면 안에 있는 물건은 부드럽고 신비해 보인다. 언젠가 무척 지적인 불교도였던 여성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여자는 되도록 집에 물건을 안 두고 하얗게 꾸미길 바랐지만, 수천 권이나 되는 책 때문에 그 공간의 활기를 살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여자는 간단하게 책을 세로 기둥으로 쌓아 그 위에 모기장을 씌움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평화가 바람처럼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 사는 효과를....

165~166p. 옮긴이의 말
..나이가 들어가면 분과에 얽매이지 않고 합일된 삶으로 향한다. 이것은 메리 루플이 <Between the Covers>라는 포틀랜드 기반의 문학 팟캐스트에 출연해 《나의 사유 재산》에 관해 나눈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가족 안의 딸로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친밀한 사이에서의 나…. 젊었을 때는 이같이 분화된 영역들에서 살아가지만, 노년에는 이 모든 것이 시접 없이 맞물리고 그 안에서 부드럽게 헤엄친다. 섬세한 차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니나, 이를 하나로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노년이 주는 선물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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