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p.
..생과 사, 삶과 성, 죽음과 성, 그런 것들은 처음부터 구분하기 힘들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나는 여태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섹스를 숨기는 것, 살인은 안 된다는 것, 인간의 목숨은 귀하다는 것. 나도 모르게 그런 하찮은 약자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129p.
..농담이 아니다. 이 세상은 모두 웃을 수 없는 농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78p.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몇 번이고 사랑을 나눌 수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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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디너인가 보죠?"
..병에 하얀 망을 씌우면서 아저씨가 웃었다. 굳이 디너라고 말하는 장난기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면이 있는 사람이 좋다. 나이를 먹었든 어리든, 남자든 여자든.

..참고로 이 필터란, 생각을 그대로 말해도 될지 안 될지 판단해주는 필터다. 필터에 걸러져 세상 밖으로 나와도 좋다고 판단한 생각만 말로 표현한다. 속으로는 ‘바보 같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독특하네’라고 어느 정도 부드럽게 변환해서 출력해주는 편리한 필터인데, 좀 취했다고 기능하지 않으면 문제다. 다른 사람 앞에서 술을 마실 때는 신중해야겠다.
.."나이를 먹었을 뿐이야."
..자신에게는 애초에 그런 필터가 없다고 웃으면서 카에데 씨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냉장고로 갔다.
.."어렸을 때 아줌마들은 왜 말을 함부로 할까 싶었는데, 유미코가 말한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필터의 역할을 내팽개친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들었어."

..내가 아닌 사람의 체온을 느끼거나, 귀엽다고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한때는 달콤한 과자다. 과자로는 배를 채우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배를 채우지 못하기에 과자를 먹고 싶다. 이 과자는 아마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술에 취하지 않은 엄마는 아주 가끔 면도칼을 휘둘렀다. 자기 몸에 상처를 낼 때도 있었고 내게 휘두를 때도 있었다. 좁은 집에 같이 살다 보니 어디까지가 자기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딸의 몸인지 분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바보 같다고 생각하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나는 웃었다. 스무 살이든 마흔 살이든 바보 같은 짓은 한결같이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왕자님을 원하지 않는다. 시즈 씨는 원한다. 원하는 것이 다를 뿐인데 어느 쪽은 옳고 어느 쪽은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원하는 것을 원할 권리가 있다. 얻으려고 할 권리가 있다.
..나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삶은 분명 아름답지 않다. 수도 없이 틀리고 남에게 수도 없이 상처를 주고, 과거에 저지른 죄와 부정을 불에 태워 용서를 받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옳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게 산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원하는 대상을 가치 없다고 비웃거나 부정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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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구루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무너진다기보다 녹아내린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내부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을 드러내듯 구루미의 단정한 얼굴이 별안간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나오코는 뭉크의 「절규」를 떠올렸다.

.."죽인 아이의 사체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시킨 거지. 암호를 풀면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하고, 풀지 못하면 영원히 파수꾼을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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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로 남자, 특히 중년 이상의 남자가 너무 무서웠고, 줄곧 그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그 마음이 점점 부풀어 올라 어느덧 소위 ‘여우짓’이라는 갑옷을 몸에 걸치게 됐다. 중년 이상의 남자와 마주할 때만 걸치는 갑옷이지만, 그 덕분에 득을 볼 때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귀여움과 비호를 받았다. 회사원 시절도 마찬가지였고 프리랜서가 된 후에도 ‘여우짓’의 갑옷은 크게 유용했다. 같은 여자들이 그걸 나쁘게 보고 뒷말을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이렇듯 처음 보는 편의점 점원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아양을 떨 만큼, 여우짓은 호흡처럼 살아가기 위한 생리현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때 좀 더 의심해야 했다. 애당초 스스무의 말이 적중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 그럴듯한 소리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리와 그 자리의 분위기에 맞추어 적당한 말을 꺼내놓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말을 곧이듣다가 뼈아픈 경험을 몇 번이나 했으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듣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스스무는 상대방이 바라는 말을 해줄 뿐이리라. 그러므로 그 말을 들으면 뭔가 면죄부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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