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 둬, 어린 풋내기야, 이 세상에서 제일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하늘이야.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 그의 마음에 들건 말건, 우리는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아. 인간들에 대해 그가 아무 힘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그에게 도전하고 있으며, 우리의 정열은, 그의 의도를, 혹은 멍텅구리들이 그의 의도라고 우리에게 확언하는 것들을 거스를 때에만 진정한 매력을 가질 수 있어. 신의 의도라는 것의 실체는, 사기꾼이 가장 강한 자를 포박하는 데 사용하는 환상의 쇠사슬이야.

...나 역시 그 부자들이나 법관들, 관리들의 말을 듣는 것이나, 그들이 우리들에게 미덕을 설교하는 것을 구경하기 좋아해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의 세 배 이상을 소유하고 있을 때 도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받기가 지극히 어려우며, 아첨꾼이나 항복받은 노예들로만 둘러싸여 있을 때 살인 사건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고, 관능이 그들을 도취케 하고 가장 기름진 음식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을 때 절제하고 검약하기가 기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여도 그것이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때 그들이 솔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때마다 그는 싫어하는 기색 없이 제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누구든 각 개체를 지배하고 있는 악습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악습은 수천의 다양한 형태로 재생되며, 나이에 따라 그 특유의 가지들을 가졌고, 10년마다 그 소유자에게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 악습에 한번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 가는 날까지 그것을 고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인정하는 그 신이라는 것은, 한편 무지의 결과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폭정의 결과에 불과해요. 강자가 약자를 속박하고자 할 때, 강자는 자기가 약자를 핍박하는 데 사용하는 그 무기가, 어느 신에 의해 성스러워졌노라고 약자를 설득하였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얼이 빠진 약자는, 강자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믿게 된 것이에요. 그 최초의 거짓말의 숙명적 결과인 모든 종교는 그 최초의 거짓말처럼 경멸을 받아야 마땅하며,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 사기와 어리석음의 표징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종교는 단 하나도 없어요. 모든 종교에는 우리의 이성을 전율케 하는 교리와, 자연을 모독하는 교조, 그리고 조롱을 금치 못하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의식이 있어요.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 쏘피, 나는 그 외설스러운 짓들을 강렬하게 배척하였으며, 그것들을 내 발아래 짓밟아 버리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 종교로 귀의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였어요....

...그러한 일에 대한 당신의 혐오감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사리가 밝기 때문에, 당신이 그토록 엄청나다고 생각하는 그 범죄도 기실 지극히 단순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당신의 혐오감을 지워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어요. 별로 철학적이지 못한 당신의 눈에는 이 일이 내포하는 두 가지 죄악이 보일 것이에요. 그 하나는 자신의 유사체(類似體 semblable)를 파괴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유사체가 내 어머니이므로 해서 증대되는 파괴의 괴로움이에요. 자신의 유사체를 파괴한다는 것, 쏘피, 분명히 확언하건대, 파괴한다고 믿는 것은 순전한 환상이에요. 파괴의 능력은 인간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아요. 기껏해야 형태를 변화시킬 수는 있으되, 절멸시킬 수는 없어요. 그런데 자연의 눈에는 모든 형태가 평등해요. 다양성이 실현되는 이 거대한 도가니 속에서, 상실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속에 던져지는 모든 물질 덩어리들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생되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작용이 어떻든 간에, 그 작용의 어느 것도 그 도가니를 손상하거나 모독할 수 없고, 우리의 파괴는 그의 능력에 활기를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에너지를 지속시켜 줄지언정, 어떠한 파괴도 그것을 약화시키지는 않아요. 오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살덩이가, 내일 각양각색의 수천 마리 곤충으로 재생산된다고 하여, 끊임없이 창조를 계속하고 있는 자연의 눈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들과 같은 개체의 축조가 한 마리 구더기의 축조보다 자연에게 더 큰 수고를 끼치며, 따라서 자연이 우리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노라고 당신은 감히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애착의 도가, 아니 무관심의 도가 같을진대, 소위 죄라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이 저질러, 다른 사람이 파리나 상추로 변한들 그것이 자연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우리 인간이라는 족속의 고귀함을 누가 내게 증명해 보인다면, 또 인간이 자연에게 하도 중요하여, 인간의 파괴에 대해 자연이 필연적으로 노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 준다면, 나 역시 그러한 파괴가 하나의 범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자연에 대한 가장 심오한 연구 결과, 이 지구 표면에 붙어 서식하는 모든 생물들이, 비록 그것이 가장 불완전한 작품일지언정, 모두 자연의 눈에는 평등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이상, 그 존재들을 수천의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의 법칙을 위배한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인간, 모든 식물, 모든 동물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서식하며 서로 파괴하는 과정에서, 절대 실질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 속에서 하나의 다양성을 맞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무심하게 서로 밀치고 파괴하며 번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는 얼마 후 또 다른 형태를 취하며, 그들을 움직이기를 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의 뜻에 따라, 단 하루 사이에도 수천 번씩 그 형태를 바꿀 수도 있으되, 자연의 어느 한 법칙도 그 일로 인해 단 한순간이나마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불행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작은 징후라 할지라도 놓치지 않는 법이라, 우리가 의존해 있는 사람의 억양에 따라 희망이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며 즐긴 쾌락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상대방에게 할애할 동기가 된다는 것은 절대 자연의 법칙에는 존재하지 않았어. 죽을 때까지 우리들을 위해 일하는 짐승들에게서 지금 네가 그토록 뽐내어 내세우는 그러한 감정의 예를 볼 수 있어? 나의 부와 힘으로 내가 너를 지배할 수 있는 처지인데, 네가 네 자의로 내게 도움을 주었다든가 혹은 너의 기본 책략이 너로 하여금 나에게 봉사함으로써 너의 자유를 회복하라고 명령했다 해서, 내가 나의 권리를 너에게 양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야? 도움이라는 것이 아무리 평등한 관계에서 주고받아졌다 할지라도, 고상한 영혼의 자존심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하시키지는 않는 법이야. 무엇을 받는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모멸받는 처지에 있지 않겠어? 그리고, 그가 느끼는 그 모멸감이 이미 그가 받은 도움의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는 것 아니겠어? 다른 인간보다 스스로를 높임이 자존심에게는 일종의 즐김 아니겠어? 그런데 은혜를 끼치는 사람에게 또 무슨 보상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게다가 그러한 은혜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의 자존심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될진대, 무슨 권리로 그 짐을 계속 지고 있으라는 것이야?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와 부딪칠 때마다, 도대체 왜 나 자신이 번번이 그 모욕에 동의해야 한다는 말이야? 따라서 배은망덕이라는 것도 하나의 악덕이 아니라, 선행이 나약한 영혼의 미덕이듯, 기개 높은 영혼의 미덕이야. 노예는 자신의 필요에 이끌려 상전에게 자기의 미덕을 역설하지만, 자신의 정열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상전은, 오직 자기에게 봉사하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만 허리를 굽혀야 돼. 그 짓이 즐거우면 마음껏 은혜를 베풀 것이로되, 자신이 즐긴 것에 대한 보상을 추호라도 요구해서는 안 돼.

...숱한 법률이 질서를 회복하고 인간을 미덕으로 다시 인도해 오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예요. 그 일을 시도하려는 법률 자체가 우선 너무 사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너무 약하여, 이미 닦인 길에서 인간을 잠시 떼어 놓을 수는 있으되 그 길을 영원히 버리도록 할 수는 없어요.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 가고자 할 때, 어느 특정인이 자기만은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의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끊임없이 다수의 이권에 반대만을 일삼는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은 무엇이지요?....

...회한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돈담무심하게 고찰하는 습관을 가지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윤리와 관습을 깊이 고려하여 그 행위 자체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러한 사유에 입각하여 어떠한 행위이든 부단히 반복하면, 이성의 횃불이 즉시 회한을 불태워 버릴 것이고, 무지와 소심함, 그리고 교육의 소산에 불과한 그 음침한 마음의 움직임을 절멸할 거예요....

(해설)
...디오게네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묻자, 플라톤은 그가 〈미쳐 버린 소크라테스〉라고 대꾸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야유하며 심지어 소피스트(돈벌이 선생)라고까지 부르던 디오게네스를 그렇게 평한 플라톤의 말 속에는, 디오게네스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애정과 존경이 서려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싸드를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듯도 하다. 품은 뜻은 고결하되, 검도 무리도 시운(時運)도 얻지 못한 기사나 외로운 군주, 그리하여 몽상이 오히려 잔혹하고 변덕스러우며 섬세하고 역설적일 수밖에 없게 된, 네로나 칼리굴라처럼 중병에 걸린, 다시 말해 미쳐 버린 근본주의적 혹은 급진적 치자(治者)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싸드의 작품을 읽으면서 『여우 이야기』를 쓴 중세 어느 문인의 다음 말을 뇌리에 떠올리는 것도, 우리의 경직된 시선을 완화시키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학교에서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지혜로운 말은 미친 자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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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과몰입 파티»
...원래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기대할 미래가 있을 때 행복하다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이세계 과몰입 파티»
..이런 식으로 역사서 찬술 내용의 상당 부분이 자화자찬이라고 봐야 했다. 암묵적으로 우리들 넷은 각자의 영웅적 행위에 무조건 호응했다. 그게 우리들 머릿속 깊은 곳에 봉인된 기억에서 꺼낸 진짜 사건이니까 말이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이런 자화자찬에도 각자의 취향이 확고하게 나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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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p.
..어느 연배의 남자는 나에게 집을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마당에 나무를 심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그 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매일 보면서 그곳이 틀림없이 자신의 땅이고 집이라는 자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61p.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문학 주변에 감도는 놀이 분위기나 축제 분위기가 좋아서, 혹은 수입이 안정된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에 안주하면서 나부랭이 글과 함께 문학 놀이에 빠지고 싶어 하는 그런 녀석하고는 일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하고 나서도 후회는 없고, 내 마음의 소각로가 갑자기 확 타오르는 것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은 평소와 달리 푹 잤다.

69p.
...가장 큰 수확은 끊기 힘든 것을 끊었다는 자신감이 아닐까 한다. 의존할 것이 한 가지 줄어, 그 몫만큼 얽매이지 않는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71p.
...나는 "응. 분명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거나 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 그런 건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비꼬는 투로 "고집이 세네요"라고 했다. "세진 거지."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업을 몇 십 년에 걸쳐 계속할 수가 없어."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났다. 흡연자를 볼 때 나는 득의의 웃음을 짓고, 마구 먹어대는 사람을 볼 때 또 한 번 빙긋이 웃는다.

96~97p.
..이 정도로 밝고 느긋한 새가 일단 울기 시작하면 듣던 사람은 이내 한없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젖어든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몸의 기운이 거의 다 빠지고 마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는 그토록 힘이 넘쳤는데, 지금은 피리새 울음소리에 완전히 정복당해 있다. 한 시간 전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는커녕 근처에 핀 잡초보다 끈질기게 이 세상에 들러붙어 있었음에도, 고작 들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에 휘둘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든다. 만약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 듣는다면, 어지간히 마음이 꿋꿋한 사람이라도 죽음의 방향으로 확 끌려가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몇 편의 소설에 이 피리새를 등장시키고 있다.

106p.
..잡혀도, 잡히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도도한 의견에는 승복하기 힘들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이야말로 낚시꾼의 미학이라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나르시시즘의 냄새가 느껴져 좋아할 수가 없다.

117p.
...20대는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대는 스스로 불을 붙이지 않으면, 말하자면 구체적인 것을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담과 저항을 감수해야 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처자식을 가지면 안 된다, 라고. 안된 일이지만 남자는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127p.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것밖에 없고, 또한 그것을 쓰지 않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있었던 암살사건을 쓴다면 그다지 애를 먹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자료를 정성껏 모으고 공백 부분을 완성시키면 그런대로 형태가 갖추어진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질질 끄는 문장이 이어지면 그 사건을 아는 독자는 일단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공의 암살을 쓰면, 게다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보다도 생생하게 묘사하려면, 크고 작은 온갖 영감이 필요하다. 게다가 단 한 문장을 잘못 쓰면 전체가 망가질 위험성이 있다.

133p.
..그 무렵, 내 양쪽 손바닥에는 낚시로 인한 못이 박여 있어, 펜을 잡는 데 거슬릴 정도였다. 지금은 깨끗이 없어졌다. 잉어든 뭐든 결국은 온전한 생명체로, 자칫하면 내가 잡아먹히고 마는 상대가 아니라 ‘약한 놈을 괴롭히고 있다‘라고 느낀 순간, 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142p.
..영화나 소설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찾거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고자 하는 실험은 분명 의의와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실험이란 어디까지나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미리 세워둔 가설이나 목표를 향해 행하는 다양한 시도를 말한다. 그런데 실험예술의 대부분은 실험을 위한 실험이고, 기성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나머지, 고생 끝에 선택한 손쉬운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험과 엉터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가설이나 목표를 세워 성공하기 위한 시도라면, 혹 실패하더라도 그 의도나 노력의 흔적이 적잖이 전달될 것이다.

155p.
..나는 믿고 있다. 좋은 영화며 좋은 소설이며 좋은 음악이며 좋은 그림, 그 밖의 좋은 예술에는 그것을 만드는 측과 접하는 측 사이에 돈이 끼어 있어야 한다고.

174p.
..구로사와는 다음 작품으로, 자신이 보통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뭔가 무거운 주제를 노리고 있는 듯하지만, 나로서는 나쁜 병이 도졌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가 그런 것을 노리면 꼭 실패한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그런것을 깨달아도 좋을 법한데.

179p.
...진정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179p.
..헤밍웨이가 쓴 문장에 이런 것이 있다. "투우장으로 향하는 무리 속에서 누가 투우사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들떠 있어도 투우사 혼자만 묵묵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흥의 최고는 술도 여자도 도박도 아니고, 아첨하는 사람을 몇 명 거느리고 떠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맛들이면 다른 유흥 따위는 재미가 없어서 못 한다고....

181p.
..영화는 오락이 주된 목적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재미의 질로, 내가 좋다고 하고 기대하는 것은 남자 어른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확실한 신념과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고뇌가 있고, 그래도 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주인공을 다룬 영화를 보고 싶다....

186p.
...이런저런 발견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가장 큰 수확은 요 2~3년 사이에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영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이 아닐까 한다.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게 되고, 다가가려고도 하지 않게 되고, 본질 주변에 있는 무의미한 것 혹은 될 대로 되라는 식에 흥미를 가지고 추구하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고, 본질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여, 편안한 쪽으로 편안한 쪽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영화는 여러 종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남자 주제에 여자 행세를 하고 싶어 한다든지, 어른 주제에 어린애 행세를 하고 싶어 한다든지, 혹은 그 양쪽을 노리는 것으로 이것은 소설의 세계에서도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다....

196~197p.
..결국 우리는 이 논쟁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를 불행한 인간이라고 했다. 나는 그저 <해 뜨는 집>이야말로 청춘의 노래라는 말만 했으니, 그가 보기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을 것이다. 그는 청춘이 장밋빛이라고 믿었고 나는 회색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회색은 속에 꿈틀거리는 붉은 피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폭력적이고 위험해서 약자와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색은 결코 아니었다.

200p.
..어쩌다가 소설 같은 것을 쓰려고 생각한 것일까. <해 뜨는 집>을 더더욱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어서, 실제 행동 외에 이미지로써 문장이라도 부여잡고 싶어서였을까. 신인상 상금이 탐이 났던 것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216p.
..핸들을 잡은 남자의 표정은 분명 전철 손잡이를 쥐고 있을 때와는 다르다.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몸 전체에서 생기 같은 것이 솟구치는 듯하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속도를 내고는 모두 똑같은 착각을 한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것은 가솔린 엔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덕분이 아닐까, 라고. 그렇다고 해도 이 얼마나 위험한, 이 얼마나 엄청난 착각인가.

217p.
..왜 논으로 떨어지거나 하는가 하면, 요컨대 그런 속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열차나 버스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타고 훨씬 더 빠른 속도를 경험하긴 했지만 그것은 내가 조종한 속도는 아니다. 그런 습성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직접 운전하고 있는데도 누군가가 태워준다고 착각해서는 주변 경치를 둘러보는 사이에 사고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점이 부모에게 떨어져 홀로서기를 하려는 아이들 마음과 닮아 있어서,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가 있다.

224p.
..그 당시 나는 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내가 타지도 못하는데 차종 따위를 외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흥미를 가지고 지식을 흡수하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236p.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눈이었다. 어떤 경우든 한 점을 응시하고 있으면 심한 전복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은 뜨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감고 있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241p.
..이 ‘죽자‘라는 말은 서른을 넘고부터 어쩐지 입에 담게 되어, 지프만이 아니라 오프로드 바이크로 급한 경사를 한창 내려가는 중에도 중얼거린다. 그러면 공포심이 싹 사라지고 33년 인생을 한 일이라곤 고작 소설 몇 권을 쓴 것밖에 없는데도, 너무 오래 산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 이상 살더라도 좋을 일은 없다고 굳게 믿어버리고, 마음의 공백이 점점 넓어져, 차체가 받는 것보다도 훨씬 강한 바람이 그 안으로 휭휭 스며든다. 이윽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그 이상한 황홀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261p.
..어른이란, 필요에 따라 필요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상냥함만이 장점이고 한바탕 말썽이 일어나면 잽싸게 도망치는 사람은 어엿한 어른이 아니다. 또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난폭한 짓을 하려는 사람도 어른은 아니다. 그런 자일수록 막상 때가 되면 겁을 낸다. 예를 들면 전쟁을 좋아하는 자들이 그렇다. 용감하게 싸운 군인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모두 전쟁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쟁을 하고 싶어 하던 자들은 완전히 무기력한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2p.
..각별히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요즘 들어 일본 소설이 재미없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필자 대부분이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여서 자신이 과연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용기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수롭지 않는 주제를 관념적이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로 포장해서 어떻게든 무게있어 보이게 하는 눈속임 문학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같은 부류의 독자에게 지지를 받아 이럭저럭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을지.

271p.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어느새 무엇이든 변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지배당하고, 휘둘리고, 결국은 누구의 인생이었는지 모른 채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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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p.
...알리시아는 섬세한 후각을 누구에게 물려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나 아빠는 아니다. 어쨌거나 그 순간 셀리아에게서는 금방 껍질을 벗긴 감자 냄새가 났다. 식물이라기보다는 식품에 가까운 냄새였다.

47~48p.
...그날 오후를 생각할 때마다 새록새록 생겨나는 느낌, 자기들 같은 여자아이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요로운 삶을 목격한 일에 대해 회상하는 메일이었다. 학기 내내 알리시아가 셀리아에게 불러일으킨 부러움의 감정, 후드티에 바지를 맞춰 입는 거로 만족해야 했던 자기들에 비해 값비싼 상·하의 운동복을 입었던 아이. 그리고 또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낀 안도감.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와 이모, 숙제를 막 끝마친 동생과 사촌들, 한밤중처럼 블라인드를 내린 채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를 보았을 때 느낀 그 편안함, 그리고 이모와 사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을 때, 좀 더 후에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카센터에서 일을 마치고 기름 얼룩투성이로 돌아온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끌어안은 바람에 셔츠가 더러워졌던 일.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셀리아가 보낸 그 메일의 제목은 <불가사의Wonders>. 겉보기에 그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150p.
...아빠가 보고 싶긴 해요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건 결코 살아보지 못한 그 무언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어떤 삶이죠. 일할 필요도 없고, 냉장고는 가득 차 있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그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 아마도 내가 그리워하는 건 아빠도 아니고, 아빠와 함께하던 삶도 아니고, 아빠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 그리고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158p.
...영화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으면 금세 이어붙인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개연성 없는 행동,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법하지 않은 방향으로 줄거리가 흘러가는 걸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199p.
...어린 시절 알리시아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밖을 내다보려고 거실 정중앙에 앉아있곤 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건 예고 없이 닥치는 재난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애들 놀이나 같은 반 친구들과의 소풍, 직장에서 돌아온 어른들, 그런 데는 끼고 싶지도 않았다. 필요한 건 오로지 최소한의 공간.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두 발이 들어갈 만한 딱 그 정도의 공간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누구와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현실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렇게 일생이 흘러가기를 바랬다....

232p.
...지금까지 겪은 그 모든 일이 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모두, 처음부터,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예를 들어 오늘,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거실 불을 켠 것까지? 이 코딱지만한 집을 빌린 것. 자신의 소파, 자신의 책장, 자신의 텔레비전, 전부? 마리아는 잠시 쉬려고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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