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
.."별로 없습니다. 장례식도 무덤도 필요 없어요. 다만 한 가지, 샴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는데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키우지 못했으니, 내가 죽으면 나 대신 샴 고양이를 키워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우유는 그냥 접시 말고 커다란 부삽에 따라 먹였으면 좋겠군요. 처음 한두 모금 날름날름 핥고 나면, 부삽으로 고양이의 턱을 툭 올려 치세요. 고양이 얼굴이 우유로 흥건해지겠지요. 그걸 하루에 한 번은 꼭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일이니 잊지 마세요." - P-1

25p.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줄에 매달려 걷는 인형처럼, 책임 없는 행위의 가뿐함에 자신이 자살을 시도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고 느꼈다. 인생은 가벼움으로 가득했다. - P-1

58p.
..‘남들이 보면 고독한 인간이 고독에서 헤어나려 애쓴 나머지 별 희한한 짓도 다 벌인다 싶겠지. 하지만 고독을 적으로 돌리면 안 돼. 나는 언제나 내 편으로 여길 거야.‘
..하니오는 드뷔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P-1

85p.
..세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기분과, 세계가 무의미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어디서 서로 화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하니오에게는 죽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P-1

93p.
..그러다 점차 일상의 감각이 되돌아왔다. 일상의 감각이란 자살미수 이후,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감각을 말한다. 슬픔도 기쁨도 없는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윤곽이 부옇고, 밤이나 낮이나 ‘무의미‘가 간접조명처럼 부드럽게 인생을 비춘다. - P-1

97p.
..여자의 몸에서는 시골의 마른 풀더미 같은 냄새가 났다. 나중에 하니오가 자기 옷에 마른풀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겼을 정도로. - P-1

169p.
..오랜만에 보는 시내 경치 어디에도 죽음의 기운은 없었다.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생활에 푹 잠겨, 인생의 장아찌 같은 모습으로 걸어 다녔다. ‘저기 가면 나는 새콤한 피클이겠군‘ 하고 하니오는 생각했다. 그에게 장아찌는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다. 삼시 세끼와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내 운명이니 어쩔 수 없지.‘ - P-1

190p.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하기 쉽지만, 무의미하게 살기 위해선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니오는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 P-1

206p.
..하니오는 ‘이유‘를 지닌 모든 인간을 경멸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었다. - P-1

208~209p.
..즉 하니오는 무의미에서 시작해, 그 무의미에 하나하나 의무를 부여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 절대 의미 있는 행동을 시작해서는 안 되었다. 의미 있는 행동을 시작하는 바람에 좌절하거나 절망하고 무의미에 직면한 인간은, 일개 감상주의자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들이다. - P-1

290p.
..혼자였다. 별 돋은 아름다운 하늘 아래, 경찰서 앞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경찰을 상대하는 술집의 빨간 초롱이 두세 개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니오의 가슴에 밤이 들러붙었다. 밤이 그의 얼굴에 납죽 들러붙어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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