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p.
...하지만 그날 오타케는 집요했고 미치광이와도 같았다. 내가 나뒹굴어도 뼈를 내리치는 폭력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울부짖고 소리를 내질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숨도 내쉴 수 없는 고통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그가 절대 지배자로서 내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나를 때리는 것이었다. 쇠막대기로 한 대씩 때릴 때마다 그가 지배자라는 것을 그도 느꼈고 나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실은 섬을 뒤덮는 폭풍이나 섬을 둘러싼 해류보다도 더 견고한 철칙이 되어 전신에 통증과 함께 스며들고 있었다....

80p.
..본산에 틀어박혀 수행을 하겠다고 결정한 그날 오후, 나는 단골 이발소로 가서 삭발을 했다. 사회주의 학생답게 덥수룩하고 빗질도 하지않은 장발이 그렇게 잘려나가고 있었고, 새삼스럽게 서글프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머리를 밀었다는 게 생리적으로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매끈한 두상을 어루만지고 얼굴까지 쓰다듬어봐도 머리와 얼굴은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제 죄다 얼굴처럼 매끄러워져서 머리카락이 나는 두상이라는 게 소멸되어버린 것이다. 막 깎아내린 두상은 속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기 피부처럼 연분홍색의 얇은 막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꽉 차 있는 나의 모든 지능은 이제 더 이상 머리카락의 위장으로 보호받을 길도 없이 부끄러운 모양으로 수축되어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주에 몸을 맡겨버린 것처럼 보였다.

97p.
..눈을 감으면 하얀 종이 위에 뚫린 검은 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으로 여자의 생식기를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의 에로티시즘에는 그런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찬란하게 빛나는 ‘여인의 화엄 세계‘에는 노골적인 생식기의 모양은 아직 혼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얀 살결과 같은 종이와 무의미할 정도로 뚜렷하고 검게 뚫린 구멍이 눈꺼풀의 이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검은 점이 오점인지 아니면 아름다움의 중심인 것인지 그런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흑과 백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거침없이 내 얼굴 전체로 다가왔다.

129p.
..바다와 친숙하고 바다에 투정을 부리다가 결국 바다 그 자체의 부스럼 딱지로 변해버린 듯한 이 고둥의 기분 나쁜 모습이 그녀에게는 이 마을을 둘러싼 나른하고 미끈거리는 온순함처럼 느껴졌다. 이 고장은 평온하고 안전하며 아름다운 지형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모범적인 마을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경제조직을 수십 년 전에 이미 만들어냈다. 거친 분쟁과는 동떨어져 있는, A섬의 물 밑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기질이 이치코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56p.
..이치코는 방심한 듯이 뱃전에 기대어 섰다. 웃음으로 아늠이 느슨해지고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157p.
..배가 해안에 다다랐을 때 하얀 길도 잿빛 바위도 정기를 잃어 시들어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치코는 산지나 수목, 집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오래된 뼈를 그대로 드러낸 추한 송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피비린내 나는 물고기들이 부풀어 오르고 몸싸움을 벌이는 섬뜩한 광경이 눈의 저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는 생기 있는 아름다움에 압도된 뒤, 눈에 보이는 안정된 지상이라는 것은 마치 사멸된 것처럼 꺼림칙했다.

171p.
..상대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려봐도 이끼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심코 바라본 곳에서는 아주 일부였지만 금녹색의 고귀한 융단이 잇달아 나타났습니다. 빛이라는 것이 이토록 희미하고 조심스러우며, 또 스스로 결정체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던가 하는 감동을 받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었습니다. 이끼가 금녹색으로 빛을 낸다기보다는 금녹색의 이끼가 어느 순간 빛 그 자체로 변한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빛이 반짝이는 게 아니라 빛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빛을 밖으로 퍼뜨리는 게 아니라 빛을 내부로 흡수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227p.
"...사마천은 ‘인간은 절대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견해로 가볍게 정리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운명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을 좌절시키는 대상으로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즉 ‘상식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에 의해서 진보하거나 성장해나가는 인간이, 집단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반성도 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생각, 그것을 상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면, 상식은 그 범주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개인을 압박하고 좌절시킨다. 「열전」에 등장하는 백이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폭력혁명이라는 시대적 상식에 대해 백이는 저항을 했다. 그리고 자멸한 것이다. 하늘, 즉 운명의 자의(恣意)로서 상식을 정리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사마천은 실은 인간의 자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역사가는 상식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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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비록 헤어졌다고 해도 예전에 같이 살았던 여자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가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
..구태여 말하자면 허무함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위해서 헤어졌는데, 결국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 다 행복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인생에는 밝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유족의 승리가 아니다. 유족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다만 필요한 순서, 당연한 절차가 끝났을 뿐이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사형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만약 범인이 살아 있으면 ‘왜 범인이 살아 있는가? 왜 범인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주는가?’라는 의문이 유족의 마음을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번씩 끈질기게 말하지만, 사형 판결을 받는다고 유족의 마음이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족에게 범인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곳을 지났다고 해서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가야 행복해질지는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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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다보면 몸과 머리가 무뎌지게 됩니다. 원래 할 수 있던 것도 못하게 되죠.
..옛날에는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잖아요. 가스도 전기도 없고, 전기밥솥 같은 것도 물론 없었으니 매번 불을 피워야 밥을 지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 피우는 법을 모릅니다.
..이전에는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된 거죠.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절임류와 저장식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노하우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요.
..물론 필요하다면 의존해도 되지만, 지진 같은 예측불허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곤란을 겪게 됩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편리한 것들이 주위에 늘어날수록 우리의 능력과 체력은 조금씩 쇠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과 노하우를 잃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 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제한하고 가능성을 좁히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판단이 빨라진다는 장점도 있어요. 매사에 결정을 잘 못하거나 인생을 방황하는 것은 선택지가 너무 많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 이라고 하면 귀찮고 힘든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거예요. 검소한 생활, 아끼는 생활 같은 말을 하면 힘들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을 즐기게 되면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생은 생활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떤 사람이든 매일 생활을 하지요. 어차피 해야할 생활이라면 즐겁게 해야 인생이 즐거워지는 것이고요.
..옛날에는 인생의 한복판에 ‘생활‘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회사일의 비중이 커져 ‘생활은 되도록 생략하고 간단히‘ 라는 생각이 더 큰 것 같아요.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편리한 도구를 사서 되도록이면 편하게 생활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되겠지만, 의식주라는 생활 자체도 즐긴다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특히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가 올라가는 시대가 될 거라 생각해요.
..새로 지을 경우, 요즘 같으면 짧은 기간에 단독주택을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집‘은 단기간에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죠. 당연한 얘기겠지만요.
..제가 사는 집은 건축된 지 60년 된 집이에요. 그래서 60년만큼의 가치가 있는 거죠. 똑같은 것을 만들려면 적어도 60년은 걸리니까요.
..오래된 것에는 그 시간만큼 남아온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 법입니다. 집뿐 아니라 오래된 모든 것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수거나 버리는 건 아까워요.

..물건을 살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물건의 인생‘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장수할 수 있는 물건일까(오래 사용하다 행복하게 죽을 물건일까)‘라고 물건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죠.
..사람들은 대부분 충동구매를 할 때 산 직후만 생각해요. 약간의 편리함과 쇼핑의 기쁨을 위해 물건이 ‘소비‘되는 경우가 많죠. 그 결과로 물건은 불행해집니다. 물건을 살 때는 버려질 때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산 물건이 어떤 운명의 길을 걷게 될지 잠깐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쉽게 충동구매 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요즘은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인터넷을 이용하면 클릭 몇 번만으로 당일 혹은 다음날 상품이 배달되는 매우 편리한 시대가 되었죠.
..반면에 줄이고 버리는 건 힘들어요. 쓰레기봉투를 사야하고 버리는 날도 정해져 있어요. 대형쓰레기나 가전제품은 그 나름대로의 절차와 돈도 필요하죠. 지금은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수고스러운 시대예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방에 물건이 늘어나는 건지도 몰라요.
..우선은 쓸데없는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세요. 자기 나름의 기준을 확실히 갖고 신중하게 쇼핑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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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5p.
..일반적으로 인간은 장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찰나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다가 도덕불감증에 빠지는 것이다.

98p.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나만 만족하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현실에 잘 착지시킬 수 없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뜬구름 같은 덧없는 꿈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내 재능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다.

170p.
..평소의 생활 습관을 면밀히 검토하여 자기 나름대로 확실한 금전 감각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장차 당신을 위험한 ‘돈‘의 함정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돈은 다른 사물보다 유난히 외로워하는 존재이다.
..돈은 친구들이 많은 사람에게 곧 떠나버린다.

225p.
..돈은 이처럼 가족을 폭풍우로부터 지켜주는 힘도 가지고 있다.
..‘소중한 누군가를 안심되는 편안한 장소로 이끌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일하라. 일해서 돈을 벌라. 그리하여 강하게 되라.
..이것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슬프고 괴로운 사건·사고를 많이 지켜본 어린 시절의 그 마을로부터 온갖 고생 끝에 나도 마침내 그 장소에 겨우 도착했다. 가족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행복하고 안심되는 우리 집이라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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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p.
..지금도 나의 가죽 구두는 지하실 한 구석에 놓여 있고, 아름다운 소녀는 이 지상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프다. 내가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 어쩐지 그것조차도 나로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지난 주 화요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이 있었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오전 2시의 어둠 속에서 그도서관 지하실을 생각하고 있다. 어둠 속은 아주 깊다. 마치 초승달의 어둠같이.

77p.
..그녀는 누구하고도 짝을 짓지 않고 혼자서 춤을 추었다. 오케스트라는 탱고를 연주했다. 그녀는 훌륭한 솜씨로 탱고를 추었다. 보고만 있어도 황홀해지는 춤이었다. 그녀가 몸을 구부리자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이 바람처럼 플로어에 날리고, 가느다란 하얀 손이 공기의 현(弦)을 부드럽게 연주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것은 마치 꿈의 연속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 머리는 조금 혼란했다. 만약 내가 하나의 꿈을 위하여 다른 꿈을 이용하고 있다면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81p.
..난쟁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몇 번이고 이길 수 있어. 그러나 지는 것은 단 한번 뿐이야. 네가 한 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나. 그리고 너는 언젠가 질 거야. 그걸로 끝이야. 잘 들어. 나는 그때를 끝까지 기다릴 거야."
.."왜 하필이면 나지?"
..나는 난쟁이를 향해서 외쳤다.
.."왜 다른 사람이면 안되냐고?"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하, 하하하 웃었을 뿐이었다. 난쟁이의 웃음소리는 주위를 떠돌다 곧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87p.
..여동생은 아까 나온 스파게티처럼 보기만 해도 맛없어 보이는 싱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맛없는 요리를 남긴다는 것도 하나의 식견이 아닐까?"
하고 나는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해졌죠?"

117p.
.."그건 오빠가 멋대로 놀아도 내가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짜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진짜 어른들의 생활이란 말이지, 진짜 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죠. 하긴 오빠와 함께 지낸 5년 간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자유롭고, 속 편하고.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것은 진짜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생활의 실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빠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진지하게 말하려고 해도 이죽거릴 뿐이고."
.."소극적일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오만한 거예요."
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
.."소극적이고 오만하고, 소극적인 것과 오만의 되돌리기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지."

132p.
..물론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계속 가지고 있는 한, 나이를 먹는 것이 그다지 고통이랄 수는 없다. 그것이 일반론인 것이다.
..스무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계속해서 나는 그러한 생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나는 타인들로부터 수많은 타격을 받고 당하며 오해받는 동시에 또한 많은 불가사의한 체험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고 마치 다리를 건너듯이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를 통과하고, 그리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쭈욱 입을 다물었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20대의 마지막 남은 한 해를 맞이했다.
..지금 나는 말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이 되어 있지 않고, 말을 마치는 시점에도 사태는 전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기 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조촐한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정직하게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말은 어둠의 밑바닥으로 빠져든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여기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이다. 덧붙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식으로도 생각하고 있다. 잘 하면 훨씬 앞서, 몇 년이나 몇십 년 앞서 구제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리고 그때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보다 아름다운 말로써 세계를 이야기하겠지.

134~135p.
..하트필드는 좋은 문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문장을 쓴다는 작업은 곧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尺)이다." (‘기분이 좋아서 뭐가 나쁜가?‘ 1936)
..내가 자를 한 손에 들고 주삣주삣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해로,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15년에 걸쳐서 나는 실로 여러가지 것을 방출했다. 마치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 짐을 내버리고, 좌석을 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버리듯이 15년 동안 나는 온갖 것을 내버리고, 그 대신 거의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그것이 과연 옳았던 일인지 어떤지를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편안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다. 나를 화장한 후에는 뼈 한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갖고서는 어두운 꿈밖에 꿀 수 없어. 아주 어두운 마음으로는 꿈조차도 꿀 수 없지."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팔을 뻗쳐 할머니의 눈꺼풀을 가만히 감겨준 것이었다. 내가 눈꺼풀을 내리는 동시에 그녀가 79년 동안 계속 품어왔던 꿈은 마치 길바닥에 떨어지는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고요히 사라져 나중에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135p.
..내게 있어서 문장을 쓰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런 작업이다.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한 적이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도, 그 결과 그것이 모두 잘못됐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비해서 거기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10대 시절,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일주일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던 적이 있다. 약간만 솜씨를 부리면 흐름을 바꾼다…….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고 깨닫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훗날이었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한 줄의 선을 긋고 왼쪽에는 그 동안 얻게 된 것을 쓰고, 오른쪽에는 잃어버린 것을 썼다. 잃어버린 것, 짓밟은 것, 특히 내버려 둔 채 돌보지 않은 것, 희생시킨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을 끝까지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아무리 긴 자를 가지고도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내가 여기에서 쓸 수 있는 것은 다만 리스트이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거니와 예술도 아니다. 한가운데 선이 하나만 그어진 다만 한 권의 노트이다. 교훈이라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146p.
..쥐의 소설에는 좋은 점이 두가지 있다. 우선 섹스신이 없는 점과 그리고 한 사람도 죽지 않는 점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사람은 죽고, 여자와 잔다. 그런 것이다.

189p.
..세번째의 걸 프렌드가 죽은 보름 후 나는 미슈레의 ‘마녀(魔女)‘를 읽었다. 뛰어난 책이다. 거기에 이러한 한 구절이 있었다.

..로렌느 지방의 특이한 재판관 레미는 8백 명의 마녀를 화형시켰는데 그 자신 이러한 ‘공포정치‘에 대해 우쭐대고 있다. 그는 말하길 ‘나의 정의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요전 날 체포된 16명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스스로들 목매어 죽어버렸을 정도이다.

..나의 정의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라는 대목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210p.
..일찍이 나도 냉정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의 반밖에는 입밖에 내지 말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잊었지만 그 착상을 몇년인가에 걸쳐서 나는 실행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발견했다.
..그것이 냉정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모른다. 그러나 연중 서리 제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냉장고를 차갑다고 부를 수 있다면 역시 그럴 것이다.

217p.
.."하지만 말야, 잘 생각해보라구. 조건은 모두 마찬가지야.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과 같다구. 물론 운이 좋은 자도 있고 운이 나쁜 자도 있어. 그리고 건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어,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어. 하지만 말야, 보통사람과 다른 강함을 가진 자란 아무도 없는 거야. 모두가 마찬가지지. 뭔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 잃을지 몰라 겁내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거야. 모두가 마찬가지야. 그래서 빨리 그걸 깨달은 인간이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야. 하는 척을 하기만 해도 괜찮아. 그렇지? 강한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235p.
.."열 두세 살부턴가……. 아버지가 병이 나던 해예요. 그보다 옛날 일은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아요. 쭈욱 나쁜 일만 있었어요. 머리 위를 말예요, 언제나 나쁜 바람이 불고 있는 거예요."
.."풍향도 변하는 거라구."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언젠가는 말이지."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사막 같은 건조한 침묵 속에서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삼켜졌고 쓰디쓴 입맛만이 남았다.

249~250p.
..내가 바깥으로 눈길을 두는 한, 비는 쉼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뜨면 항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비라고 하는 것이 순수하게 개인적 체험이 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비가 회전한다 —대단히 막연한 표현이지만— 그런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머리는 지독히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비가 어느쪽 비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비는 단지 비 일 뿐인 것이다.

273p.
..그녀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곧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듯이 사라졌다.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307p.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좋으니 무작정 떠들어대고 싶은 기분이 든답니다. 무엇이라도 좋아요. 불완전이든 뭐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기의 진동입니다. 의미가 아니죠. 그저 공기의 떨림일 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양식이랍니다.

316~317p.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나는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러한 나의 희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몹시 불쾌한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나의 이 희망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다는 것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개, 네 개도 아닌 ‘단지 두 개‘ 입니다. 나는 콘서트 홀에서 관현악을 들으면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백화점의 상품 관리과에서 있으면서 맥도날드의 쿼터 파운드 햄버거이고도 싶다는 말입니다. 나는 연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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