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 ..지금도 나의 가죽 구두는 지하실 한 구석에 놓여 있고, 아름다운 소녀는 이 지상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프다. 내가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 어쩐지 그것조차도 나로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지난 주 화요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이 있었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오전 2시의 어둠 속에서 그도서관 지하실을 생각하고 있다. 어둠 속은 아주 깊다. 마치 초승달의 어둠같이.
77p. ..그녀는 누구하고도 짝을 짓지 않고 혼자서 춤을 추었다. 오케스트라는 탱고를 연주했다. 그녀는 훌륭한 솜씨로 탱고를 추었다. 보고만 있어도 황홀해지는 춤이었다. 그녀가 몸을 구부리자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이 바람처럼 플로어에 날리고, 가느다란 하얀 손이 공기의 현(弦)을 부드럽게 연주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것은 마치 꿈의 연속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 머리는 조금 혼란했다. 만약 내가 하나의 꿈을 위하여 다른 꿈을 이용하고 있다면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81p. ..난쟁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몇 번이고 이길 수 있어. 그러나 지는 것은 단 한번 뿐이야. 네가 한 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나. 그리고 너는 언젠가 질 거야. 그걸로 끝이야. 잘 들어. 나는 그때를 끝까지 기다릴 거야." .."왜 하필이면 나지?" ..나는 난쟁이를 향해서 외쳤다. .."왜 다른 사람이면 안되냐고?"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하, 하하하 웃었을 뿐이었다. 난쟁이의 웃음소리는 주위를 떠돌다 곧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87p. ..여동생은 아까 나온 스파게티처럼 보기만 해도 맛없어 보이는 싱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맛없는 요리를 남긴다는 것도 하나의 식견이 아닐까?" 하고 나는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해졌죠?"
117p. .."그건 오빠가 멋대로 놀아도 내가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짜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진짜 어른들의 생활이란 말이지, 진짜 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죠. 하긴 오빠와 함께 지낸 5년 간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자유롭고, 속 편하고.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것은 진짜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생활의 실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빠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진지하게 말하려고 해도 이죽거릴 뿐이고." .."소극적일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오만한 거예요." 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 .."소극적이고 오만하고, 소극적인 것과 오만의 되돌리기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지."
132p. ..물론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계속 가지고 있는 한, 나이를 먹는 것이 그다지 고통이랄 수는 없다. 그것이 일반론인 것이다. ..스무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계속해서 나는 그러한 생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나는 타인들로부터 수많은 타격을 받고 당하며 오해받는 동시에 또한 많은 불가사의한 체험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고 마치 다리를 건너듯이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를 통과하고, 그리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쭈욱 입을 다물었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20대의 마지막 남은 한 해를 맞이했다. ..지금 나는 말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이 되어 있지 않고, 말을 마치는 시점에도 사태는 전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기 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조촐한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정직하게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말은 어둠의 밑바닥으로 빠져든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여기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이다. 덧붙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식으로도 생각하고 있다. 잘 하면 훨씬 앞서, 몇 년이나 몇십 년 앞서 구제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리고 그때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보다 아름다운 말로써 세계를 이야기하겠지.
134~135p. ..하트필드는 좋은 문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문장을 쓴다는 작업은 곧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尺)이다." (‘기분이 좋아서 뭐가 나쁜가?‘ 1936) ..내가 자를 한 손에 들고 주삣주삣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해로,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15년에 걸쳐서 나는 실로 여러가지 것을 방출했다. 마치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 짐을 내버리고, 좌석을 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버리듯이 15년 동안 나는 온갖 것을 내버리고, 그 대신 거의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그것이 과연 옳았던 일인지 어떤지를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편안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다. 나를 화장한 후에는 뼈 한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갖고서는 어두운 꿈밖에 꿀 수 없어. 아주 어두운 마음으로는 꿈조차도 꿀 수 없지."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팔을 뻗쳐 할머니의 눈꺼풀을 가만히 감겨준 것이었다. 내가 눈꺼풀을 내리는 동시에 그녀가 79년 동안 계속 품어왔던 꿈은 마치 길바닥에 떨어지는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고요히 사라져 나중에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135p. ..내게 있어서 문장을 쓰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런 작업이다.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한 적이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도, 그 결과 그것이 모두 잘못됐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비해서 거기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10대 시절,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일주일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던 적이 있다. 약간만 솜씨를 부리면 흐름을 바꾼다…….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고 깨닫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훗날이었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한 줄의 선을 긋고 왼쪽에는 그 동안 얻게 된 것을 쓰고, 오른쪽에는 잃어버린 것을 썼다. 잃어버린 것, 짓밟은 것, 특히 내버려 둔 채 돌보지 않은 것, 희생시킨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을 끝까지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아무리 긴 자를 가지고도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내가 여기에서 쓸 수 있는 것은 다만 리스트이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거니와 예술도 아니다. 한가운데 선이 하나만 그어진 다만 한 권의 노트이다. 교훈이라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146p. ..쥐의 소설에는 좋은 점이 두가지 있다. 우선 섹스신이 없는 점과 그리고 한 사람도 죽지 않는 점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사람은 죽고, 여자와 잔다. 그런 것이다.
189p. ..세번째의 걸 프렌드가 죽은 보름 후 나는 미슈레의 ‘마녀(魔女)‘를 읽었다. 뛰어난 책이다. 거기에 이러한 한 구절이 있었다.
..로렌느 지방의 특이한 재판관 레미는 8백 명의 마녀를 화형시켰는데 그 자신 이러한 ‘공포정치‘에 대해 우쭐대고 있다. 그는 말하길 ‘나의 정의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요전 날 체포된 16명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스스로들 목매어 죽어버렸을 정도이다.
..나의 정의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라는 대목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210p. ..일찍이 나도 냉정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의 반밖에는 입밖에 내지 말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잊었지만 그 착상을 몇년인가에 걸쳐서 나는 실행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발견했다. ..그것이 냉정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모른다. 그러나 연중 서리 제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냉장고를 차갑다고 부를 수 있다면 역시 그럴 것이다.
217p. .."하지만 말야, 잘 생각해보라구. 조건은 모두 마찬가지야.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과 같다구. 물론 운이 좋은 자도 있고 운이 나쁜 자도 있어. 그리고 건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어,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어. 하지만 말야, 보통사람과 다른 강함을 가진 자란 아무도 없는 거야. 모두가 마찬가지지. 뭔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 잃을지 몰라 겁내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거야. 모두가 마찬가지야. 그래서 빨리 그걸 깨달은 인간이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야. 하는 척을 하기만 해도 괜찮아. 그렇지? 강한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235p. .."열 두세 살부턴가……. 아버지가 병이 나던 해예요. 그보다 옛날 일은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아요. 쭈욱 나쁜 일만 있었어요. 머리 위를 말예요, 언제나 나쁜 바람이 불고 있는 거예요." .."풍향도 변하는 거라구."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언젠가는 말이지."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사막 같은 건조한 침묵 속에서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삼켜졌고 쓰디쓴 입맛만이 남았다.
249~250p. ..내가 바깥으로 눈길을 두는 한, 비는 쉼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뜨면 항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비라고 하는 것이 순수하게 개인적 체험이 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비가 회전한다 —대단히 막연한 표현이지만— 그런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머리는 지독히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비가 어느쪽 비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비는 단지 비 일 뿐인 것이다.
273p. ..그녀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곧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듯이 사라졌다.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307p.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좋으니 무작정 떠들어대고 싶은 기분이 든답니다. 무엇이라도 좋아요. 불완전이든 뭐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기의 진동입니다. 의미가 아니죠. 그저 공기의 떨림일 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양식이랍니다.
316~317p.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나는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러한 나의 희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몹시 불쾌한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나의 이 희망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다는 것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개, 네 개도 아닌 ‘단지 두 개‘ 입니다. 나는 콘서트 홀에서 관현악을 들으면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백화점의 상품 관리과에서 있으면서 맥도날드의 쿼터 파운드 햄버거이고도 싶다는 말입니다. 나는 연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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