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비록 헤어졌다고 해도 예전에 같이 살았던 여자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가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
..구태여 말하자면 허무함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위해서 헤어졌는데, 결국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 다 행복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인생에는 밝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유족의 승리가 아니다. 유족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다만 필요한 순서, 당연한 절차가 끝났을 뿐이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사형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만약 범인이 살아 있으면 ‘왜 범인이 살아 있는가? 왜 범인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주는가?’라는 의문이 유족의 마음을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번씩 끈질기게 말하지만, 사형 판결을 받는다고 유족의 마음이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족에게 범인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곳을 지났다고 해서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가야 행복해질지는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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