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p.
...하지만 그날 오타케는 집요했고 미치광이와도 같았다. 내가 나뒹굴어도 뼈를 내리치는 폭력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울부짖고 소리를 내질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숨도 내쉴 수 없는 고통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그가 절대 지배자로서 내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나를 때리는 것이었다. 쇠막대기로 한 대씩 때릴 때마다 그가 지배자라는 것을 그도 느꼈고 나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실은 섬을 뒤덮는 폭풍이나 섬을 둘러싼 해류보다도 더 견고한 철칙이 되어 전신에 통증과 함께 스며들고 있었다....

80p.
..본산에 틀어박혀 수행을 하겠다고 결정한 그날 오후, 나는 단골 이발소로 가서 삭발을 했다. 사회주의 학생답게 덥수룩하고 빗질도 하지않은 장발이 그렇게 잘려나가고 있었고, 새삼스럽게 서글프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머리를 밀었다는 게 생리적으로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매끈한 두상을 어루만지고 얼굴까지 쓰다듬어봐도 머리와 얼굴은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제 죄다 얼굴처럼 매끄러워져서 머리카락이 나는 두상이라는 게 소멸되어버린 것이다. 막 깎아내린 두상은 속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기 피부처럼 연분홍색의 얇은 막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꽉 차 있는 나의 모든 지능은 이제 더 이상 머리카락의 위장으로 보호받을 길도 없이 부끄러운 모양으로 수축되어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주에 몸을 맡겨버린 것처럼 보였다.

97p.
..눈을 감으면 하얀 종이 위에 뚫린 검은 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으로 여자의 생식기를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의 에로티시즘에는 그런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찬란하게 빛나는 ‘여인의 화엄 세계‘에는 노골적인 생식기의 모양은 아직 혼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얀 살결과 같은 종이와 무의미할 정도로 뚜렷하고 검게 뚫린 구멍이 눈꺼풀의 이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검은 점이 오점인지 아니면 아름다움의 중심인 것인지 그런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흑과 백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거침없이 내 얼굴 전체로 다가왔다.

129p.
..바다와 친숙하고 바다에 투정을 부리다가 결국 바다 그 자체의 부스럼 딱지로 변해버린 듯한 이 고둥의 기분 나쁜 모습이 그녀에게는 이 마을을 둘러싼 나른하고 미끈거리는 온순함처럼 느껴졌다. 이 고장은 평온하고 안전하며 아름다운 지형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모범적인 마을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경제조직을 수십 년 전에 이미 만들어냈다. 거친 분쟁과는 동떨어져 있는, A섬의 물 밑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기질이 이치코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56p.
..이치코는 방심한 듯이 뱃전에 기대어 섰다. 웃음으로 아늠이 느슨해지고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157p.
..배가 해안에 다다랐을 때 하얀 길도 잿빛 바위도 정기를 잃어 시들어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치코는 산지나 수목, 집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오래된 뼈를 그대로 드러낸 추한 송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피비린내 나는 물고기들이 부풀어 오르고 몸싸움을 벌이는 섬뜩한 광경이 눈의 저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는 생기 있는 아름다움에 압도된 뒤, 눈에 보이는 안정된 지상이라는 것은 마치 사멸된 것처럼 꺼림칙했다.

171p.
..상대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려봐도 이끼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심코 바라본 곳에서는 아주 일부였지만 금녹색의 고귀한 융단이 잇달아 나타났습니다. 빛이라는 것이 이토록 희미하고 조심스러우며, 또 스스로 결정체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던가 하는 감동을 받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었습니다. 이끼가 금녹색으로 빛을 낸다기보다는 금녹색의 이끼가 어느 순간 빛 그 자체로 변한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빛이 반짝이는 게 아니라 빛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빛을 밖으로 퍼뜨리는 게 아니라 빛을 내부로 흡수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227p.
"...사마천은 ‘인간은 절대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견해로 가볍게 정리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운명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을 좌절시키는 대상으로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즉 ‘상식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에 의해서 진보하거나 성장해나가는 인간이, 집단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반성도 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생각, 그것을 상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면, 상식은 그 범주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개인을 압박하고 좌절시킨다. 「열전」에 등장하는 백이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폭력혁명이라는 시대적 상식에 대해 백이는 저항을 했다. 그리고 자멸한 것이다. 하늘, 즉 운명의 자의(恣意)로서 상식을 정리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사마천은 실은 인간의 자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역사가는 상식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