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p.
...영화 속 뉴욕을 보고 있으면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거주하며 내 마음속에 새겨진 뉴욕의 실상보다 뉴욕의 환상을 향한 그리움이 더 강렬하게 싹텄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을 다 끄고 애인과 매트리스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어쩌면 뉴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살아 본 적 있는, 실제로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대중의 상상을 통해 어느 정도는 살아 본 적 있는 유일한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72p.
..뉴욕에서 보내는 첫 여름 동안 나는 그렇게 걷고 사진 찍는 루틴을 거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지속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주일에 닷새를 그렇게 보냈다. 6월, 7월, 8월 내내. 나를 고양시켜 준 것은 심오하고도 음울한 만족감이었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계속 걷는 것, 하릴없이 계속 걷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세 시간이나 네 시간 혹은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 정도가 흐르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통째로 뒤섞였다. 도로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와 괜찮은 거냐고,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저한테 뭐가 필요해 보이는데요? 내가 그렇게 되물었더니 남자는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눈길을 피했다.

129p.
...사무실 벽이 유리로 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한번 누워서 어떤 느낌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이클은 그렇게 누워 있을 것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느낌이란 게 어쩌면 그런 것일 터였다. 모든 직원이 사무실에서 뭔가에 쫓기듯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공공연하게 낮잠을 자는 느낌....

201~202p.
..6학년 역사 시간에 투탕카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고고학자들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 개방했을 때 마치 칼로 옷감을 베듯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무덤 안에 있던 모든 왕실 직물이 불시에 신선한 공기에 노출되면서 찢어지는 소리였다.

204~205p.
..저넬이 내 팔을 붙잡고 거실 끝에 있는 부엌으로 부축했다. 공기가 탁해서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마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숨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조리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만지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 영원히 두 손을 내 몸에만 딱 붙이고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이러하게 숨을 쉬어 보라고 소리치며 나를 도와주려는 저넬마저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저넬이 너무도 역겹다는 것, 저넬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닌 그가 가진 인간이라는 형상과 그의 동물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박테리아가 미친 듯이 우글거리는 입을 벌려 나를 향해 초소형 구더기를 내뿜는 그 숨결도, 손톱 밑에 낀 모래알도, 팔과 쇄골 위에서 번들거리며 머리카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금방이라도 내 몸으로 쏟아질 것 같은 땀도 다 역겨웠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간신히 구토를 참아 냈다. 그 집에는 어디 하나 깨끗한 물건도, 깨끗한 장소도 없었다. 거실이며 이 방이며 저 방이며 사방에서 죽어 가고 또 증식하는 세포들만이라도 없었더라면. 그냥 세포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더라면. 단 하나라도 청결한 뭔가를, 부디 나를 붙잡아 줄 뭔가를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 풀을 먹여 바스락거리는 싸늘한 병원 침대 시트 한 장만이라도. 내 목구멍을 막아 줄 얼음 한 조각만이라도.

259p.
..타임스스퀘어에 모인 군중이 나를 맞이했다. 뉴욕은 정말 대도시였다. 뉴욕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선택지는 저녁 식사 자리의 앙트레와 칵테일, 나이트클럽에서 내는 봉사료처럼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280p.
..러시아인 교환 학생은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유타를 두 눈으로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신에 관한 영화의 배경으로만 삼았어야 할 공간에서 서부극을 촬영한 미국인들이 상스러운 족속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일화였다.

335~336p.
..난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단,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난 널 너무 잘 알아. 넌 이상주의자처럼 사는 사람이지.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 일정한 수입도, 의료보험도 없으면서. 툭하면 일도 그만두고. 넌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넌 철두철미하게 자린고비처럼 아끼고 아껴가며 볼품없고 값싼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그런 삶 역시 자유는 아니야. 넌 외접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어. 불법 복제 영화를 보고 1달러짜리 조각 피자를 먹으면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 그 변두리만 돌고 도는 거지.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자기 신념을 붙들고 사는 너를—고결하다고 생각했고—동경했었지만, 그런 네 삶의 방식을 5년간 지켜보면서 난 조금 바뀌었어. 이 세상에서는 돈이 자유야. 이탈하는 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야.

360p.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린다. 밥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몇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른다. 판에 박힌 일상에 묶여 있지 않은 정신은 무한히 낙하한다. 시간이 구부러진다. 그러면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가 불가분의 상태가 된다.

416~417p.
..나는 언제나 뉴욕의 현실보다 뉴욕의 신화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뉴욕에 그렇게나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도 어떤 것의 본질보다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더 사랑해서였다. 그러나 끝을 향해 가는 몇 주 동안 곳곳을 거닐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어떤 것 그 자체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건 어느 정도 내가 기록하는 일 자체를 좋아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몰락해 가는 도시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이—뉴욕은 지나치게 방대하고 나는 지나치게 작은 데다가 내가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멀고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들이 있었기에—결코 달성할 수 없는 과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462p.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 조너선이 말했다. 그런 장소가 네가 한 인간이 되는 최초의 장소이자 네가 네 자신이 되는 최초의 장소야.

467p.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의 설계 목적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을, 도시의 일정과 리듬에 적응한다는 것을, 동시간대에 출퇴근하는 무수한 동지들 틈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며 출퇴근을 위해 마련된 교통수단의 이동 경로 내에서 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가 내놓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도시의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다. 도시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도시의 매장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도시의 소비세를 지불하는 것이다. 도시의 노숙인에게 1달러를 기부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그 도시의 시스템에 가담하고 그 시스템을 선전하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아침에 일터로 출근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시스템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대체 누가 세세연년 그런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살 수 있겠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4p.
..브라이트너 씨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면아이는 깊은 심리적 과정을 설명하는 비유적 용어입니다. 당신의 내면아이는 아주 이른 유년 시절의 심리적 부상들이 저장된 무의식의 일부죠. 이런 부상의 결과가 퍼런 멍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오래된 이 상처들은 평소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가 당신 내면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죠. 하지만 누군가 이 멍을 건드리면 내면아이는 아주 큰 통증을 느낄니다. 당신은 내면아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고함 소리를 들을 뿐, 누가 그렇게 소리치는지 알지 못하는 거죠."

71p.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도 부모님 책임인가요?"
.."어쨌든 당신 부모님은 지금 당신 내면에 살고 있는 아이에게 최상의 기본 신뢰를 제공하지는 않았죠."
.."기본 신뢰?"
.."모든 게 잘될 거라는 기초적인 신뢰 말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보호할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신뢰. 살면서 당신의 소망과 그 실현을 위해 합당한 공간이 마련될 거라는 신뢰. 이런 기본 신뢰를 지닌 사람은 미래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220p.
.."어떤 의미에서 말인가요?"
.."기후변화, 지속 가능성, 탄소 중립적인 생활."
..이런, 정말 그런 사람이구나. 텅 빈 미사여구로 묘사되는 사람.
.."아, 그렇군요.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참여 지향적인 사람인가요?"
.."이미 말했듯이... 저는 신중한 사람이에요. 균형 잡힌 삶을 좋아하죠. 부정적인 습관을 하루아침에 내던진다면 긍정적인 요구가 담긴 한쪽 저울판과 함께 아주 빠르게 현실이라는 바닥에 아프게 부딪히겠죠."
..이 얼마나 현명한 여자인가. 텅 빈 미사여구가 없는 사람.

335p.
..나는 이 상황이 완전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유 없는 포옹은 이유 있는 위협만큼이나 수상쩍었다.

343p.
..그는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멸시를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완벽히 관계 불능이라는 형태로 갚는 중이었다. 그래서 복수하고자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381p.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되는 짝짓기 행위에도 병참학적으로 머뭇거리는 두 지점이 늘 존재한다. 한 번은 바지를 벗을 때고, 다른 한 번은 콘돔을 끼울 때다. 언젠가 누군가 맥박 수와 호르몬 수치에 따라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저절로 씌워지는 콘돔으로 변하는 바지를 발명한다면 그는 떼돈을 벌 것이다.

398p.
.."걱정하지 마"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걱정했어야 한다는 의미의 가장 강한 지시어다.

401p.
..인간은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둘 다 깎인면이 있다. 깎인면 각각은 빛이 어떻게 비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반짝인다. 누군가 다이아몬드를 단 한 단어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보통 다이아몬드의 단순함 때문이 아니라 관찰자의 단순함 때문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411p.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요구가 없다. 현재에 대한 특별한 요구가 있을 뿐이다. 이 요구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다. 유년 시절이라는 이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32p.
..아야카와 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난 이 사건의 진상을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계율은 원래 인생을 걸고 지켜야 하는 규범이잖아. 그저께 낮에 아야카와 씨는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계율이었다.
..앞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고, 학교에 다니고, 프리랜서로 생계를 꾸리고, 그게 안 되면 취직하고, 누군가와 사귀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어쩌면 아이를 낳고......, 무슨 일이 있든 어디까지 가든, 나는 이 비밀과 함께한다.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뭐가 그리 성급한 거냐. 스스로에게 물었다. 히나코의 성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릴 터인데, 만날 때마다 어른의 전조를 찾고 있었다. 그걸 바라는 것이다. 혼내지도, 안아주지도 못하는 딸을 어떻게 대할지 모른 채, 언제까지고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다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어주기를.

..각 지역마다 추억이 있었다. 그곳에만 있던 새며 꽃, 나무들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한 번도 과거에 살았던 지역을 찾아가 보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불안정한 생활, 단절된 기억.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는 일 없이 마음의 그늘에 맥락도 없이 드러누워 있었다.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혹은 도무지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절로 떠오르는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면 아오세에게는 숫제 고향이 없었다.

...언덕 위 새집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소년이 꿈꿨던 건 정주의 상징으로서의 집이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는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있기에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가상의 적에 관한 정보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 진짜 적이 되지 않고 끝난다....

...불을 켜는 순간은 늘 낯설고 움츠러들었다. 아침에 나설 때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보다 과거의 한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이들도 언젠가는 그런 불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만둘 거라고 기대했지만, 아이들은 그만두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고 나면 이전에 아팠던 기억 같은 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기억 때문에라도 반드시 한 번 더 해야만 했다. 마치 그 고통이야말로 물건을 되돌아오게 만드는, 그리하여 그것을 떨어뜨리는 즐거움을 한 번 더 맛볼 수 있게 하는 이유인 것 같았다. 맨 처음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내가 그것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은 다른 무언가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뭐였을지는 나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나로서는, 속물적인 자기 과시나, 심지어 자기 정의定意로서의 문학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어떤 책이 다른 책보다 더 나은 책임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실 감탄할 만한 책을 읽을 때마다 점점 더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누구를, 그리고 그 무언가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통해 라이언이 배운 것은 실패는 자꾸만 되돌아오는 반면, 성공은 끊임없이 스스로 확인해야만 하는 무엇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글쓰기, 고통이 변질된 것 같은 그 작업에서 아일랜드가, 트랄리에서 보냈던 그의 과거가 완벽한 뼈대가 되어주었다. 갑자기 미국의 근본적인 익명성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가장 뛰어난 수강생은 아니었다. 그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또한, 동료 수강생들은 바로 그 익명성을 붙들고 씨름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댈 수 있는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더 좋은 작가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을 덜 뒤틀린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 있을 때보다 미국에 있을 때가 더 아일랜드인다웠다.

..나로서는 교향곡을 하나씩 차례대로 들으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을 읽으며 보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클레리아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가 같은 것을, 그러니까 개별적인 것들이 지워지고 인간사의 부분들을 모아둔 총합에 초점을 맞출 때 드러나는 어떤 객관성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그것 역시 일종의 규율, 자아와, 자아가 하는 말을 일시적으로 지워버리는 금욕주의의 한 형태겠지만, 어쨌든 빽빽하게 꽂혀 있는 클레리아의 교향곡들은 압도적이었다....

...한때는 그런 더 큰 세상이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 그 충동은 내가 가졌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일 뿐이었다. 그 끈은 어디로도 나를 데려가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펼쳐진 익명의 황무지로 데려갈 뿐이었다. 나는 원하는 만큼 멀리 헤엄쳐나갈 수도 있었고, 거기서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충동, 자유롭고 싶다는 그 욕망마저도 내게는 여전히 어떤 강박이었다. 나는 그 충동과 관련한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함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만큼은 여전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들이 너무 많았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눈에 띄었고, 유용했던 것들이 번거로운 것들이 되어버렸다. 두 아이는 이전에 잘 어울렸던 것만큼 이제는 적대적이 되었는데, 조화는 시간을 초월하고 무게도 없는 것인 반면, 적대감은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을 차지했다. 손에 잡히지 않던 것들이 단단한 실체를 가지게 되었으며, 머릿속에만 있던 것들이 형체를 띠게 되었고, 사적인 것들이 공개되었다. 평화가 전쟁이 될 때, 사랑이 증오로 바뀔 때, 무언가가 세상에 등장하게 마련인데, 그건 유한성이 지닌 순수한 힘이었다. 사랑이 우리들을 무한한 세계에 붙잡아둔다면, 증오는 그 반대였다. 놀라운 점은 증오는 아주 세세한 것들에까지 미치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언가 개선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에 말입니다. 중독되었기 때문에 삶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그 이야기에 깊이 휘둘리는 거예요. 심지어 소설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제 그 소설이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책에서 기대했던 대로 풀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점점 더 나아지는 삶에 대한 이런 감각을 나는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더 겁에 질렸지만, 어쩌면 두려움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은 거기에 옷을 입혀주는 거잖아요. 말하자면 번역을 하는 거죠. 그저 번역을 해주는 단순한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이 무해한 것이 될 때가 많으니까요...."

.."저는 세계가 다시 순수해지는 걸 보고 싶어요. 개인적인 의미가 없는 그런 공간이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곳, 아무도 저를 모르고 제가 아는 사람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는 방법 말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지, 도대체 그런 곳이 있기는 한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관계나 책임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것들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데,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생략’ellipsis이라는 단어는, 그 친구들의 설명에 따르면, 어원 그대로는 ‘침묵 속에 숨다’라는 의미였다.

.."그건 우리가 동물들이 인간 의식의 순수한 반영이라고 보는 경우 아닐까요? 동시에 우리는 동물들의 존재에서 어떤 도덕적 힘을 끌어내서는, 거기에 비춰 인간들의 존재를 객관화하고 안전하게 보호하기도 하잖아요. 노예나 하인들처럼, 그들이 없어지면 주인들이 불안함을 느끼는 그런 존재인 셈이죠. 동물들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우리가 진짜라는 걸 확인해줍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거예요. 동물들과의 상호 관계에서 우리는─동물들이 아니라요─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지죠. 아무래도─적어도 인간 입장에서는─동물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녀석들이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언어 장벽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없다고,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웃긴 생각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영어를 쓰게 만드는 추세에 대해서는 거의 죄의식이 들 정도였고, 언어가 바뀌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뒤처질지 생각하면, 그건 필수품 몇 개만 챙겨 집을 떠나는 것과 비슷한 일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 속에는 어떤 순수함이 있었고,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에 그녀는 끌렸다. 정신적인 면에서나 언어적인 면에서 기존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벗어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호소력이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무언가를 두고 떠나야 했다....

.."저는 요약병이라고 불러요."
..그녀가 쉰 듯한 목소리로 기운차게 말했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려고 할 때마다, 어느 정도의 양을 채우기도 전에 그 작품이 정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가끔 ‘긴장’이나 ‘시어머니’처럼 한 단어로 요약될 때도 있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시어머니는 복합어지만 아무튼 그랬다. 질투라는 단어가 이미 모든 것을 요약하는데, 뭐 하러 힘들여서 질투에 관한 희곡을 쓴단 말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대가들의 작품, 언제나 존경해 마지않았던 작가들의 작품도 대부분 요약이 가능했다. 심지어 그녀가 신처럼 모시는 베케트의 작품들도 의미 없음이라는 단어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런 요약한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 어떻게든 눌러보려 애썼지만, 단어들은 오르고 또 올라와 결국 머릿속에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박혀버리곤 했다. 책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그녀는 며칠 전 밤에 친구와 술을 마셨는데 테이블 건너편을 보며 친구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 결과 자신들의 우정이 끝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