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p. ...영화 속 뉴욕을 보고 있으면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거주하며 내 마음속에 새겨진 뉴욕의 실상보다 뉴욕의 환상을 향한 그리움이 더 강렬하게 싹텄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을 다 끄고 애인과 매트리스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어쩌면 뉴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살아 본 적 있는, 실제로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대중의 상상을 통해 어느 정도는 살아 본 적 있는 유일한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72p. ..뉴욕에서 보내는 첫 여름 동안 나는 그렇게 걷고 사진 찍는 루틴을 거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지속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주일에 닷새를 그렇게 보냈다. 6월, 7월, 8월 내내. 나를 고양시켜 준 것은 심오하고도 음울한 만족감이었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계속 걷는 것, 하릴없이 계속 걷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세 시간이나 네 시간 혹은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 정도가 흐르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통째로 뒤섞였다. 도로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와 괜찮은 거냐고,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저한테 뭐가 필요해 보이는데요? 내가 그렇게 되물었더니 남자는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눈길을 피했다.
129p. ...사무실 벽이 유리로 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한번 누워서 어떤 느낌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이클은 그렇게 누워 있을 것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느낌이란 게 어쩌면 그런 것일 터였다. 모든 직원이 사무실에서 뭔가에 쫓기듯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공공연하게 낮잠을 자는 느낌....
201~202p. ..6학년 역사 시간에 투탕카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고고학자들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 개방했을 때 마치 칼로 옷감을 베듯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무덤 안에 있던 모든 왕실 직물이 불시에 신선한 공기에 노출되면서 찢어지는 소리였다.
204~205p. ..저넬이 내 팔을 붙잡고 거실 끝에 있는 부엌으로 부축했다. 공기가 탁해서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마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숨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조리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만지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 영원히 두 손을 내 몸에만 딱 붙이고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이러하게 숨을 쉬어 보라고 소리치며 나를 도와주려는 저넬마저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저넬이 너무도 역겹다는 것, 저넬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닌 그가 가진 인간이라는 형상과 그의 동물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박테리아가 미친 듯이 우글거리는 입을 벌려 나를 향해 초소형 구더기를 내뿜는 그 숨결도, 손톱 밑에 낀 모래알도, 팔과 쇄골 위에서 번들거리며 머리카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금방이라도 내 몸으로 쏟아질 것 같은 땀도 다 역겨웠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간신히 구토를 참아 냈다. 그 집에는 어디 하나 깨끗한 물건도, 깨끗한 장소도 없었다. 거실이며 이 방이며 저 방이며 사방에서 죽어 가고 또 증식하는 세포들만이라도 없었더라면. 그냥 세포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더라면. 단 하나라도 청결한 뭔가를, 부디 나를 붙잡아 줄 뭔가를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 풀을 먹여 바스락거리는 싸늘한 병원 침대 시트 한 장만이라도. 내 목구멍을 막아 줄 얼음 한 조각만이라도.
259p. ..타임스스퀘어에 모인 군중이 나를 맞이했다. 뉴욕은 정말 대도시였다. 뉴욕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선택지는 저녁 식사 자리의 앙트레와 칵테일, 나이트클럽에서 내는 봉사료처럼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280p. ..러시아인 교환 학생은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유타를 두 눈으로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신에 관한 영화의 배경으로만 삼았어야 할 공간에서 서부극을 촬영한 미국인들이 상스러운 족속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일화였다.
335~336p. ..난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단,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난 널 너무 잘 알아. 넌 이상주의자처럼 사는 사람이지.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 일정한 수입도, 의료보험도 없으면서. 툭하면 일도 그만두고. 넌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넌 철두철미하게 자린고비처럼 아끼고 아껴가며 볼품없고 값싼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그런 삶 역시 자유는 아니야. 넌 외접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어. 불법 복제 영화를 보고 1달러짜리 조각 피자를 먹으면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 그 변두리만 돌고 도는 거지.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자기 신념을 붙들고 사는 너를—고결하다고 생각했고—동경했었지만, 그런 네 삶의 방식을 5년간 지켜보면서 난 조금 바뀌었어. 이 세상에서는 돈이 자유야. 이탈하는 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야.
360p.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린다. 밥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몇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른다. 판에 박힌 일상에 묶여 있지 않은 정신은 무한히 낙하한다. 시간이 구부러진다. 그러면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가 불가분의 상태가 된다.
416~417p. ..나는 언제나 뉴욕의 현실보다 뉴욕의 신화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뉴욕에 그렇게나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도 어떤 것의 본질보다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더 사랑해서였다. 그러나 끝을 향해 가는 몇 주 동안 곳곳을 거닐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어떤 것 그 자체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건 어느 정도 내가 기록하는 일 자체를 좋아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몰락해 가는 도시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이—뉴욕은 지나치게 방대하고 나는 지나치게 작은 데다가 내가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멀고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들이 있었기에—결코 달성할 수 없는 과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462p.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 조너선이 말했다. 그런 장소가 네가 한 인간이 되는 최초의 장소이자 네가 네 자신이 되는 최초의 장소야.
467p.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의 설계 목적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을, 도시의 일정과 리듬에 적응한다는 것을, 동시간대에 출퇴근하는 무수한 동지들 틈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며 출퇴근을 위해 마련된 교통수단의 이동 경로 내에서 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가 내놓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도시의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다. 도시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도시의 매장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도시의 소비세를 지불하는 것이다. 도시의 노숙인에게 1달러를 기부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그 도시의 시스템에 가담하고 그 시스템을 선전하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아침에 일터로 출근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시스템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대체 누가 세세연년 그런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살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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