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 ..실제로 나와 하스노의 관계는 인간관계라기보다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와 비슷했다. 하스노는 존경스럽지만 개인적인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는 대가의 걸작 같은 존재였다.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밑바탕에 뭔가 일관된 주제가 있음이 느껴졌고, 내가 완수하고자 하는 예술적 사명이 그와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의 외모나 능력을 시샘할 필요도 없었다.
188p. .."의분은 성욕 비슷한 감정입니다. 친인척도 아닌 생판 남이 살해당했는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는 건, 자신의 아내도 아닌 여자에게 욕정을 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꼴불견이에요. 그래도 낫살이나 잡수신 영감님들이 요정에서 여급을 품평하는 것처럼, 세상의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저런 일은 괘씸하다고 평가하는 걸 미덕처럼 여기는 사람이 꽤 많죠. ..그 정도라면 악취미에 그칠 뿐 남에게 폐를 끼칠 정도는 아니겠습니다만, 살인자는 용서할 수 없다, 꼭 찾아내겠다며 남의 집에 쳐들어가는 건 유부녀의 잠자리에 숨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죠. ..애당초 저는 의분이라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263p. ..하스노는 분명 피곤해서 녹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적이 전혀 없는 밤거리로 나오자 묘하게 정신의 활기를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뭐랄까, 액자 속의 불길한 초상화가 주인이 외출한 사이에 멋대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람 냄새가 풍기는 평소의 거죽을 벗어던지고 그림자같이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하스노가 이렇게 그림 속 인물처럼 변하면, 설명하기 힘든 그의 인간 혐오 성향이 아주 당연하게 이해된다. 액자가 그림에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자아내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장식은 하스노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329~330p. .."이제 거짓말을 하겠다고 잔뜩 벼르다가 꺼내놓는 거짓말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해. 속여 넘겨야 할 순간에, 주변에서 필요한 재료를 모아서 냉큼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게 거짓말쟁이의 법식이지. 그것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사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거짓말의 길을 선택하는 게 진짜 거짓말쟁이야."
439p. .."난 분명 그다지 인간답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걸 거야. 오늘 깨달았어. 그리고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좋겠지. 그런 사람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바라보며 사는 것처럼 질리지 않을 테니까."
453p.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불철저야. 인간을 싫어한다면서 산속에 혼자 살지는 않는 불성실함이지."
463p. ..하스노가 하루카와에게 쏟아낸 증오는 특별히 하루카와를 위해서만 잘 벼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미네코는 이모부가 하스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인간 혐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직접 체감했다. 거기에 합리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하스노는 지금 그야말로 거친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하스노의 철두철미한 이지는 아까 본인이 말한 것처럼 거친 바다 위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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