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
..내가 없는 45년 뒤의 세계에서 핼리 혜성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을 상상하니, 마음속에 쓸쓸함이, 공허함이 퍼졌다.

41p.
..어묵을 다섯 가지 정도 주문해서 계산대로 갔다. 아버지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주머니에서 동전지갑을 꺼내 어묵을 샀다. 아버지가 내게 사주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돈을 내는 모습이 좋았다. 인색하지 않고, 계산대 사람에게도 언제나 정중했다.

44p.
..옛날에 내가 갖고 있던 것은 원룸 타입이었다. 다 놀고 나서 ‘리카짱 하우스‘ 뚜껑을 닫는 순간,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것은 가짜 세계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고, 나를 다시 현실로 돌려보내기 위해, ‘리카짱 하우스‘의 뚜껑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98p.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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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p.
..실제로 나와 하스노의 관계는 인간관계라기보다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와 비슷했다. 하스노는 존경스럽지만 개인적인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는 대가의 걸작 같은 존재였다.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밑바탕에 뭔가 일관된 주제가 있음이 느껴졌고, 내가 완수하고자 하는 예술적 사명이 그와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의 외모나 능력을 시샘할 필요도 없었다.

188p.
.."의분은 성욕 비슷한 감정입니다. 친인척도 아닌 생판 남이 살해당했는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는 건, 자신의 아내도 아닌 여자에게 욕정을 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꼴불견이에요. 그래도 낫살이나 잡수신 영감님들이 요정에서 여급을 품평하는 것처럼, 세상의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저런 일은 괘씸하다고 평가하는 걸 미덕처럼 여기는 사람이 꽤 많죠.
..그 정도라면 악취미에 그칠 뿐 남에게 폐를 끼칠 정도는 아니겠습니다만, 살인자는 용서할 수 없다, 꼭 찾아내겠다며 남의 집에 쳐들어가는 건 유부녀의 잠자리에 숨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죠.
..애당초 저는 의분이라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263p.
..하스노는 분명 피곤해서 녹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적이 전혀 없는 밤거리로 나오자 묘하게 정신의 활기를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뭐랄까, 액자 속의 불길한 초상화가 주인이 외출한 사이에 멋대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람 냄새가 풍기는 평소의 거죽을 벗어던지고 그림자같이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하스노가 이렇게 그림 속 인물처럼 변하면, 설명하기 힘든 그의 인간 혐오 성향이 아주 당연하게 이해된다. 액자가 그림에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자아내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장식은 하스노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329~330p.
.."이제 거짓말을 하겠다고 잔뜩 벼르다가 꺼내놓는 거짓말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해. 속여 넘겨야 할 순간에, 주변에서 필요한 재료를 모아서 냉큼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게 거짓말쟁이의 법식이지. 그것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사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거짓말의 길을 선택하는 게 진짜 거짓말쟁이야."

439p.
.."난 분명 그다지 인간답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걸 거야. 오늘 깨달았어. 그리고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좋겠지. 그런 사람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바라보며 사는 것처럼 질리지 않을 테니까."

453p.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불철저야. 인간을 싫어한다면서 산속에 혼자 살지는 않는 불성실함이지."

463p.
..하스노가 하루카와에게 쏟아낸 증오는 특별히 하루카와를 위해서만 잘 벼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미네코는 이모부가 하스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인간 혐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직접 체감했다. 거기에 합리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하스노는 지금 그야말로 거친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하스노의 철두철미한 이지는 아까 본인이 말한 것처럼 거친 바다 위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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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p.
.."저 애는 이렇게 말하곤 해. 태양의 빛은 너무 강해서 견딜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있대. 한겨울의 태양이라도 마찬가지래."
.."나도 저녁형 인간이라 알 것 같아. 달빛이 창가에 비쳐 들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다는 그건가."
.."아니야. 달빛은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게 아니라, 그 신비한 힘으로 속박하는 거야. 인간은 달의 작용으로 광기에 몰린다고 믿고 있는걸."

144p.
.."정답. 과학수사라는 건 미스터리에 있어서 암적인 존재지. 혈액 응고 상태를 근거로 사망 시각을 산출해내려는 말도 안 되는 연구를 하는 대학도 있다나 봐. 그런 방법을 고안해 내면 수십 퍼센트의 알리바이 트릭이 무효가 돼. 우주개발이 달과 화성 생명체의 존재를 부정해서 SF 작가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166p.
.."인간의 의식에는 ‘수면‘과 ‘깨어 있는 상태‘와 ‘자각‘의 세 단계가 있는데, 상황에 휘둘려 자유가 없는 현재의 인간은 단지 깨어만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는 거야. 아리스가 지금, 나는 깨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주관적인 자각이지 객관적인 자각이 아니야. ‘자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이 하나의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는 은자, 승려, 요가의 세 가지 길을 승화시킨 네 번째 길이 인간을 자각으로 이끌어 준다고 하지."
.."음. 그런데 에가미 선배가 요가를 했던가요?"
..에가미 선배는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껄껄 웃었다. 육체의 그늘진 부분에 성감대가 있듯이 사고의 그늘에도 그러한 것이 있어서, 내가 지금 에가미 선배의 그 부분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167p.
"..그는 몽상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어. 예술에도 주관적인 예술과 객관적인 예술이 있어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푹 빠지게 만들 뿐인 피상적이고 주관적인 것 따위는 예술이라 부를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지. 예를 들어 쳐다만 봐도 감상자의 눈을 멀게 하는 그림, 연주만 해도 물을 동결시키는 음악, 낭독만 해도 벽을 무너뜨리는 시처럼, 물리적인 힘을 가진 예술이야말로 객관적인 예술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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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p.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절제된 표현을 쓰는 데 후아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후아가 전염병이 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로 가공할 위력의 전염병이라는 뜻이다. 지반은 이게 시작이라는 갑작스러운 확신이 들었다. 후아가 말한 이 질병이 그의 생애를 전과 후로 나누는 분수령이 될 거라는 확신이었다.

100p.
.."아름다웠지." 그가 말한다. "지금도 아름답고." 그러고는 화제를 바꾼다. 그다음 부분은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 아름다웠어. 내가 이제까지 본 곳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지. 아름답고, 밀실공포증을 느끼게 해. 사랑했지만 항상 탈출하고 싶었지.

122~123p.
...그녀는 자신을 울게 할 함정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가 한 푼만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을 때마다 자신이 조금씩 죽어간다는 것을, 그건 자신이 이 세상에서 혹은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연약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한없이 작아진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녀는 확신하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지만, 부도덕한 사람만이 상황이 안 좋을 때 떠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182p.
...커스틴은 이마를 창문에 딱 대고 어둠 속에 빛이 점점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빛의 바다를,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홀로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빛의 성단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에서 아름다움과 외로움을 느꼈던 것과, 저기 저 빛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했던 것과, 하나의 현관 등이 하나의 집을, 또는 하나의 가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311~312p.
...그는 매점에서 얼 그레이를 한 잔 사서 천천히 우유를 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홍차에 우유를 섞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클라크는 지금 이 순간을 미리 그리워했다.

445p.
...그는 자신이 거의 모든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빛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처럼 후회할 일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후회의 총량이 스물한 살과 쉰한 살의 주된 차이점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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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p.
...이불을 턱까지 올려 덮은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여서, 그 노인네를 방해하지 말고 그냥 길고 넓은 무덤에 침대째로 넣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대장은 말했다. 안 피플스는 가만히 서 있는 나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죽음을 내려보낸 것은 바로 그런 나무였다.

43p.
..이 첫 키스로 그는 구멍에 빠졌다가 다른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힘을 쓰다가 몸을 돌려 하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꽃들 사이에서 키스를 하며 그날 오후를 다 보냈다. 그는 찬란한 기분이었다. 원래 몸속에 있어야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온몸을 채운 것 같았다.

58~59p.
...하지만 그뒤로 그레이니어는 황혼녘에 늑대 소리가 들리면 자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늑대처럼 울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이곤 하는 묵직한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늑대 합창단과 저녁에 이렇게 한바탕 공연을 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그는 쿠트나이 밥에게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늑대처럼 운다고, 자네가?" 밥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 사람들 말로는 살아 있는 늑대가 언제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이야."

88p.
...비행기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가파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장기들이 척추에 달라붙었다. 여름밤에 오두막에서 아내와 딸이 후드의 사르사를 마시던 순간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오두막이 나타나고, 그의 숨겨진 유년 시절에 갔던 장소들, 광대한 황금빛 밀밭,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그를 감싼 두 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번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었다....

118p.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한창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119p.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아내 글래디스)이었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자주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십 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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