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나 복도 같은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물길도 길이고 바람 골도 길이다. 세상만물이 지나는 길.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숲속을 걸을 때도 가끔 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람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주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 병원에서 그 좁은 복도를 보기 전까지 내게 길이나 복도는 그저 건축의 물리적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이는 이 저택이 감추고 있는 놀라운 비밀의 서막에 불과했다.

...보통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가 은연중에 한두 개의 사실을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완벽하게 믿게 된다. 궁금증이 커지면서 어느 순간 논리적 판단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이다. 하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같은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위로해 온 하늘이다. 나는 지금 나뭇잎으로 수놓은 오늘만의 하늘을 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생각’이다. 사람의 생각은 경계가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도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잘 정제해 실현하면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위험한 도구이기도 하다. 선악과처럼 잘 쓰면 이롭지만 잘못 쓰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와는 폐허가 된 수도원의 상처를 그대로 지키는 것을 선택했고,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 복제가 아닌 다른 재료와 다른 방식을 이용했다. 바로 벽돌을 사용한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 이 벽의 어느 부분이 정말 중세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진짜인지, 어느 부분이 보수된 곳인지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벽돌로 채워진 부분 또한 하나의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다. 이는 진정 차곡차곡 쌓여가는 적층된 역사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멋진 액자를 가졌다고 그림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림의 주인이 액자를 가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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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p. «12번 트랙»
..맥스티드는 이제 거의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자아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에 부식되어 거의 모습을 감춘 작은 섬일 뿐이었다.

99p. «세마외르»
..죽음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노련한 배우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저 노련한 배우가 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251p. «교회의 승인 없이»
...인간의 영혼은 아주 외로운 것이어서, 아주 멀리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에는 안개 같은 경계지에 그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곳까지 따라갈 수가 없다....

364p. «마지막 말»
"...어떤 면에서 믿음이란 노년과도 같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니까요. 공산주의는 노화되어 사망했고, 제국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05p. «사자의 잘난 척»
..이 사자들은 죽은 다음 바로 화장되는 사자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조에 떠 있는 사자들은 완전한 ‘물체‘로서의 긴밀성,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죽고 난 다음 바로 화장된 시체는 이토록 완벽한 ‘물체‘가 되어 보지 못하는 거다. 그것은 의식과 물체의 애매한 중간 상태를 천천히 움직이던 중에 급하게 화장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완전하게 물체화될 시간이 없다. 나는 수조를 채우고 있는, 그 위험한 추이를 완주한 ‘물체‘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확실하고 견고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바닥이나 수조, 혹은 천창처럼 단단하게 안정된 ‘물체‘라는 생각이 들어 약간의 전율 비슷한 감동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441p. «사자의 잘난 척»
..여학생이 몸을 비틀며 작은 소리로 웃자 웃음소리는 작고 긴 방의 벽에 부딪혀 짧은 반향을 일으켰다. 나도 웃었지만 웃음은 목구멍 근처에서 눌어붙어 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학생 몸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고쳐 덮어 주었다. 여학생의 몸은 내 팔 안에서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웃음이 여학생의 피부 아래서 숨죽이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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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잘못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아. 코이케 군, 바로 눈앞에서 있으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네. 그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지. 하나의 도구가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 우리의 시야에서는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 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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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이고 쌓인 콤플렉스나 질투심이 끓는점을 넘어서 일어나는 대폭발, 분명 그것이야말로 ‘펑크’일 것이다. 쓰레기 산에서 발생한 가스가 자연 발화하며 일어나는 폭발과 닮았다. 당연히 그것은 빛이 닿지 않는 바닥 부근에서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아니, 바닥에서 생겨나지 않는 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해설 中)
..미스터리는 레고와 비슷하다. 둘 다 미리 형태가 정해져 있는 크고 작은 파트를 조합하여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 나간다. 세상에는 엄청난 사람이 많기에 레고든 소설이든 같은 파트를 사용해 잘도 이런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하고 놀라는 일이 종종 있다. ‘작은 블록’을 모아서 실제 크기의 인간이나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고, ‘있을 법한 일’을 차곡차곡 쌓아서 대모험이나 대범죄를 그리거나, 혹은 멋지게 독자를 속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밖의 온갖 것과 마찬가지로, 레고나 미스터리도 진화한다. 레고를 예를 들자면, ‘스타워즈’의 전함이나 중세의 성 등 사전에 미리 모양이 정해진 상품이 있다. 모든 파트가 ‘그것 전용’으로, 일종의 프라모델처럼 정해진 파트를 정해진 방식대로 확실히 조합해나가면 최종적으로 작품이 완성된다. 완성품을 보면 세부적인 표현까지 무척이나 정성껏 만들어져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만 이런 진화된 레고 세트에 대해서 "이런 식이라면 뭐든 가능한 거 아닌가? 이런 건 레고가 아니야"라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레고 조각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완전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재미있지 않느냐, 하는 주장이다. 분명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미리 형태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아름답게 완성된 모습을 보면 역시 순수하게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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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은 항상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난 슬퍼요." 슬프다는 건 대개 시간이 남아돈다는 뜻이다. 진짜다. 내가 자격증 있는 상담사는 아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슬프다는 건 대체로 시간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사기를 당했든 아니든, 나는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고 믿기로 선택했다.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속여서 수많은 일을 믿도록 했던 나다. 그런 나에게도 이번 일은 그야말로 생애 최고의 업적이 될 참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합리적이라고 나 스스로 믿도록 만드는 것! 옳진 않더라도 나름 합리적인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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