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내게 오래 전부터 화두였고 그것은 사실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정이현이 서문에
하여, 내가 사랑에 대해 조금쯤 더 알게 되었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오로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깊이 사랑할 것이다.(p.7)
라고 쓴 걸 보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사실 동의하기도 하는 게,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건 역설적으로 사랑을 하지 않을 때이다.)
예전에 한 친구가 사랑과 결혼과 연애와 섹스의 네 가지는 각자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다. 이후로 또 다른 친구로부터도 우리가 이 넷을 한꺼번에 보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니 이 책이 내게 '전복적'이라거나 '혁신적'이라거나 이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들의 모음. 마치 82년생 김지영처럼.
두 책의 주인공들은 정말로 평범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나 자신을 가장 평범하다고 느낄 때는 연애할 때다. 연애할 때, 나는 연인과 카페에 마주 앉아서 옆 테이블의 연인을 바라보며 그들과 우리가 똑같다고 느낀다.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별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별 다를 바 없는 데이트 코스를 짜고 별 다를 바 없는 언어를 속삭이는 것.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가장 평범해지는 순간에 가장 우리를 특별한 무엇이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종종 나는 앞으로 그런 식의 사랑은 못할 것이라 예감하는데 그것은 정이현이 그려내고 있는 닮은 꼴 연인의 모습과 내가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이다. 열렬하지 않고, 열렬할 만큼 간절하지도 않고, 쏟아내고 싶지 않고, 소모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은 이 시대 자본주의가 낳은 연애의 양상인 걸까 잘 모르겠다.
오늘 새 신발을 신었고 뒷꿈치가 까졌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이 길이 들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내가 인간 관계에 신발에게 쏟는 노력만큼도 쏟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서늘하게 다가왔다.
두 책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이해이다. 오늘 수업에서 교수님이 '그들을 이해해보자는 거지 공감해보자는 건 아니에요.'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다. 예전에 한 친구가 그저 내 말을 들어주길 원했다는 내 말에 그게 네가 생각하는 친구냐고 물었던 말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사랑보다는 이해를 원한 인간일 지도 모르겠다. 그 이해는 반드시 거리를 전제로 하고.., 거리 없는 관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결혼에 반감을 품는 이유도 그런 것에서 연유하는 지도.
알랭 드 보통은 결혼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던지지만, 결정적으로 절망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건 단순한 낙관인지 시대와의 타협인지 아니면 정말로 최선을 다하는 희망인지 잘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은 작가 대담에서 이 이야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썼다. 만약 언젠가 기혼자가 되면 이 한 줄기 희망의 공동체에 기대고 싶을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