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일열 > 루이스의 [예수와 유다의 밀약-유다복음]을 읽고
-
-
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지금의 이해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서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때문에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2년 동안을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친구 한 명과 헤어지게 된 사건이다. 그것의 발단은 성모 마리아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다. 아버지쪽 집안도, 어머니쪽 집안도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태어나자 마자,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물론 물어 봐도 아무 말 못했겠지만, 차디 찬 성수로 세례를 받았고, 지금의 이름도 그 때 받은 세례명을 그냥 호적에 올려버린 것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유아세례를 시작으로, 국민학교 때 영세, 고등학교 때 견진 성사, 대학원 마치고 혼인성사, 이제 죽어가면서 종부 성사만 받으면 천주교 신자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다 받는 것이다.
태생교우란 천주교 내력을 가진 나에게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도전을 한 것이다.
“야! 너희 천주교 신자들은 왜 사람을 믿냐?”
“사람을 믿어? 예수님 말하는 거야?”
“아니 예수님말고, 마리아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예수님 엄마 말이야!”
“야! 너 성모 마리아님에게 감히 예수님 엄마가 뭐냐? 넌 느그 할머니한테도 할망구라고 부르냐!”
이렇게 말로 옥신각신하다 그 다음엔 몸싸움으로, 그리곤 주먹 싸움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발이 상대방의 얼굴로 가슴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엔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 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언제인지 날자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주일미사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리고 성당 제단 앞에 놓여 있는 성모 마리아상으로 눈길이 갔다. 그 때 그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친구가 그립죠! 누구의 잘못이든지 간에. 난 이미 축복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고, 하늘에 올라 성스러운 자리에 있어요. 세상의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버림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헐뜯는다고 해서 나의 성스러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죠. 나는 이미 성스러움 그 자체로 있어요. 마치 하느님(하나님)의 존재와 성스러움이 인간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를 위해서 화 내지 말고 사소한 일로 친구와 헤어진 자신을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바로 자신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함이니까요.'
홀로 성스럽고 홀로 존재하는 신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 종교란 이쁘다고 해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다니는 패션의 한 방법이거나,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명상과 같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그 사람의 근본적인 신념체계이자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종교의 이름으로 어떤 시대엔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였고, 어떤 시절엔 자신의 종교를 강제로 전파하고자 조용히 살고 있는 나라를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한 종교성을 이용해서 한 민족의 말살정책을 거리낌없이 선포하고 실행했으며, 또 언젠가는 신의 이름으로 대도시 한 복판에 있는 대형빌딩을 스스럼없이 비행기로 폭파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 유다복음을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면, 세계의 3대 종교 중 2개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이단적인 악음(Demon Words)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도 못한 새로운 종교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다복음의 내용은 이 책을 감수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신화를 그대로 이어 받은 듯한, 그래서 그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바로 진리라고 말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구약성서에서의 야훼, 신약성서에서의 하느님/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모두를 하급 신으로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신은 하급 신이며 그 위의 더 높은 천상에는 다양한 영계가 있고, 이러한 영계들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영이 아닌 혼을 가진 사람은 셋의 자손일 뿐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닌 지식이 필요하며, 이 세상의 모든 중계자들은 모두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있다. 등등’
그러나 긍정적으로 이 유다복음의 내용을 바라본다면, 이 복음은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필요한 지식을, 필요한 만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고마운 복음이라고도 규정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의식혁명]을 쓴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인간의 정신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진화단계는 아주 낮은 단계, 즉 미움과 질투, 공포를 느끼는 수준에서부터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랑의 단계, 그리고 그 위에 예수와 같은 수준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는 점진적인 진화가 아닌, 계단식의 진화로 발전되어 나가는 데, 이러한 진화는 인간 스스로가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디에 선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려 받음으로써 이루어 진다고 한다. 불의 사용, 농경시대의 시작, 그릇과 무기 사용, 그리고 수많은 이론과 발명 등등.
그리고 [아직도 가야 할 길]로 유명해 진 심리학자 M. 스캇 펙박사는 이러한 정신적인 진화를 통해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의 목적지는 바로 우리가 태어난 곳,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호킨스 박사나 스캇 펙 박사의 논리가 맞다면 우리들이 어떤 사물이나 이론, 그리고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거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이미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정신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본다.
띠라서 유다복음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이 감내할 수 없는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어쩔 수 없이 오랜 세월 잠자고 있다가, 우리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라도 해석한다면 너무 허무맹랑한 논리일까?
유다복음은 분명히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하는 것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지 간에. 그러나 나의 지적 수준이 부족하기에 , 그래서 유다복음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지 지금 내가 가진 지적 수준으로는 알 수 없기에, 이 책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는 것과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정의 내려진 것이구나’ 하는 두 가지만을 이해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