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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평점 :




얼마 전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토트넘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가
같은 팀 동료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들어
꽤나 큰 이슈가 되었었다.
벤탄쿠르 라는 선수가
우루과이 매체와의 인터뷰 진행 중,
진행자가 손흥민 유니폼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그의 사촌 것도 괜찮지 않으냐며
그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는 발언을 내뱉은 것이다.
그보다 한참을 먼저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선수 역시
그라운드에 발을 디디면 야유가 따라나오기도 했고,
일명 '개고기 송'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응원하는 응원가에서조차
인종과 문화에 대한 차별이 담겨 있어
불쾌했지만 너무 어렸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뒤늦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라 한들
그저 아시아인이라는, 소수자라는 이유 하나로
과거나 15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별과 멸시가 만연하는 현실이 참 씁쓸했다.
세계화 시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어우러져
단 몇 시간이면 서로의 땅을 밟을 수 있고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공유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발전했다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나라, 인종, 성별,
그리고 사회적인 계급을 이유로
같은 문제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차별은 아시안인
우리나라에만 해당된 것은 아니다.
해외 시상식의 레드 카펫에서
경호원에게 인종차별로 과도한 제지를 받은
유색인종 배우의 사연,
여행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유튜버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눈 찢는 모습을 보이거나
아시아인들에게는 제대로 주문을 받아주지 않고
불친절한 서비스로 응대하는 식당 등을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비단 우리가 '피해자'인 것 말고도
흑인에게 튀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거나
서양인에게는 관대하고 친절하면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무시하고 '아랫것'으로 보는
우리가 '가해자'인 사례 또한 참 많다.
서슴지 않고 '우리'와 다른 타인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우리의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는 모르겠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파란 피부의 혼혈인이라는 극희소성을 가진,
그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모든 곳에서 둥 떠서 부유하는 한 소년의
삶과 성장의 과정을 담았다.
《멜라닌》의 주인공 소년 재일은 어린 시절부터
파란 피부 탓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은근한 냉대와
이웃들의 노골적인 멸시 속에서 자라났다.
학교에서는 이름 대신 피부색이나 혼혈아라는 이유로
아바타, 스머프, 도라에몽, 똥남아 튀기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늘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늘 고독하고 외로웠던 재일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대차고 강직한 성격의 엄마였다.
새 빌라로 이사를 가던 날 윗집 부부가
“파란 피부가 어쩌네, 집값이 어쩌네” 하며 쑥덕거리자
엄마는 바로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두드린다.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할머니의 위독한 건강을 이유로 동생만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자
재일은 크게 상심하게 된다.
난생처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경험,
두 아들 중 '더 나은 애'를 데려오지 않은
후회의 감정을 드러내는 아버지 앞에
재일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외롭고 험난한 미국 생활에도
그를 돕는 이들은 나타났다.
이렇다 할 능력도 없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아버지에게
선뜻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강우 삼촌과
학교에서 만난 클로이, 셀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강우 삼촌은 세탁소 겸 세차장을 운영하며
재일을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었다.
재일에게 ‘제이’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고
미국 문화와 생활 방식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클로이는 백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파란 피부로,
다른 아이들이 재일에게 거리를 두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셀마는 수업 시간에 ‘칭챙총’ 같은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재일을 돕는다.
이후로도 클로이와 셀마는 공격적인 혐오나
괴롭힘으로부터 재일을 보호한다.
셋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학교생활, 진로,
음악, 영화, 연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든든한 조력자이자 친구가 되어준 그들로 인해
재일은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지만
평온한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클로이는 미네소타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셋은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소통하며 소식을 이어간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며 클로이는
파란 피부로서 자신의 느낀 차별적 시선,
재일이 경험했던 모욕에 대한 폭로까지
블로그에 많은 글을 쓰게 되고,
그 내용이 일파만파 퍼지며 클로이는 유명세를 얻는다.
“변혁을 꿈꾸는 십 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언론의 조명까지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에 반발심을 느낀 범죄자에게
클로이는 끔찍한 일을 당한다.
재일은 클로이가 당한 일에서 쉬이 헤어나지 못한다.
같은 파란 피부로서 평생 이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클로이의 사건에서 재일이 채 헤어 나오기도 전
불행한 사건은 연달아 그를 찾아온다.
재일과 아버지의 미국 생활을 보살펴주던 강우 삼촌도
갱의 총격을 받아 치료를 받던 중 목숨을 잃는
불의의 사건을 겪고,
셀마는 숲에 난 화재에 휘말려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른다.
그러자 재일은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을
제 탓으로 여기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경멸과 야유를 떠올리며
삶에 대한 비관에 빠져드는 것이다.
과연 재일은 이러한 역경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재일의 시선을 따라 구미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함께 존재하고 살아보며
지난한 불평등의 시간 속,
'과연 나라면, 잔혹한 이 상황에
절망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 한구석이 갑갑하고
꽉 막힌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년에 불과한 재일이
선의를 잃지 않고 현실 속에서 용기 있게,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이웃들의 손가락질 앞에 본인 역시
'소수자'이자 '이민자'이지만
그들과 마주해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보여 살포시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일방적인 구타와 수없이 비꼬는 조소에
때로는 움츠러들고
때로는 스스로 외로움을 자초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선에서 생겨난 증오의 감정이
자신을 해치게 두지 않는 재일의 안간힘 어린 노력에서
쉬이 국적과 인종으로, 혹은 사회적 지위나
나의 이익이나 입장 등에 따라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했던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르게 해 부끄럽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특별히 모날 것 없는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는 재일의 아버지 역시
미국이라는 환경에서는 이주민이자 소수자로서
그들의 편견 어린 시선 아래 위축되고 작아졌으며,
무력감과 그들에 대한 분노로
아스라이 무너져 자립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유약하고 어린 나이의 재일이
그럴듯한 낙관이나 순진한 낭만 없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용기 있고 강단 있는 한걸음 한 걸음은
여전히 혐오와 멸시가 만연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싶다.
그를 규정하는 차가운 불평등의 시선에서 벗어나
더 먼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는 재일,
그리고 그런 그를 기다리는 엄마 응우옌 우 녹,
그저 '파란 피부 이방인' 과
'베트남 여자'로만 보이던 그들이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비로소 제 이름을 찾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대신
모든 곳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
스스로 충만함을 찾고 희박한 희망의 탐색자로
세계를 떠돌기로 결심한 그의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찬란한 푸른빛일지 기대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파란 피부의 재일'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을 거두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써 내려가야 할
공동체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독서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