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지음, 신준호.안희철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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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계의 수준은 플라톤 저작에 대한 번역 수준이라고 한다기독교 신학 수준도 학문 성취와 함께 학자들의 저작을 번역하는 양에 비례한다이러한 대업을 신생 업체인 새물결(대표 김요한 목사)이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신학도로서 큰 감사를 표하며 격려한다대한기독교서회에서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13권의 전권이 아직까지 완역되지 않은 상태에 있어 아쉬움이 있다일본 기독교는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너무나 미진하지만수십 년 전에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을 완역했다천주교는 분도출판사에서 교부 문헌 등 근본 신학 도서를 번역하여 출판하고 있다이것은 구교 입장에서 번역하기 때문에 개신교 번역도 필요하다.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1988-1993)은 총 3권으로 구성하고 있다그 중에서 1권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고, 3권까지 완역되기를 기대하며 성원한다. 2003년에서 은성출판사가 1권을 번역한 뒤에 중지된 상황이 있는데새물결에서 3권을 완역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기를 성원한다.

 

판넨베르크(1928-2014)는 최근에 가장 유력한 신학자이다판넨베르크에 대한 신학은 이제 연구자들이 형성되고 있는 과정이다좋은 연구자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번역물과 그 연구물을 평가할 수 있는 후학들에게 번역서는 매우 좋은 학문 도구이다우리 신학 연구자들이 명료하게 판넨베르크의 신학 사상을 해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그 과정은 연구자와 출판사가 협력해서 진행한다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구입할 독자가 많지 않다는 것 같다그래서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서평하는 사람으로 완간을 기대한다. 그래서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이 아니더라도, 새물결출판사의 서적을 더 구입하는 것도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전 3권"이 완간되는 과정에 기여한다고 우회해서 독려하고 싶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서평한다는 것은 성급한 면이 있다분명한 것은 고대신학종교개혁신학을 계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판넨베르크 신학은 종교다원주의 체계를 선도하는 신학 체계일 것이다판넨베르크의 연구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동조하는 연구자와 반대하는 연구자로 구분할 수 있다우리 사회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이다이 사회를 선도하는 판넨베르크 사상이기 때문에 어떤 자세를 취할지를 제시하고 싶다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는 연구자는 판넨베르크 신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자세로 독서한다면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그것은 판넨베르크가 제시하는 많은 개념들의 근본 지식을 해부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7년 기독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그런데 현재 기독교 안에는 유대교 이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그리고 판넨베르크는 일반종교에 대한 자세를 제시한다기독교 신학은 유대교와 일반종교까지 개방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는 자기 위치와 방향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종교 이해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변론을 위해서 르네 지라르(1923-2015)/정일권 박사의 연구를 제안하고 싶다


http://www.cbooknews.com/?m=bbs&bid=book_review&uid=9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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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사랑과 그 설렘 이운연 시리즈 1
이운연 지음 / 그라티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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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사랑과 그 설렘/이운연/그라티아/고경태 편집위원


이운연의 <성전사랑과 그 설렘>은 신간은 아니다그런데 그 추천자가 허순길 박사인 것에 좀 더 새롭다한국 교회에 개혁신학 사상을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셨고얼마 전에 소천하셨다허순길 박사가 제자로 소개하는 이운연의 설교이다.

 

서평자가 이 저서를 기쁘게 제시하는 것은저자 이운연을 만나서 들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우연히 저자와 만났다이운연은 자기 자신을 책장사라고도 표현하는데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고 기독교 일인출판사 대표이다매월 ‘re’라는 월간지를 제작하고 있다.

 

이운연은 그레고리 비일의 <성전신학>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그런데 그 가치가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했고그 <성전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그래서 <성전신학>의 원문과 번역본을 독서하면서 자기 이해로 설교를 했고문장을 정돈해서 출판을 했다는 것이다그래서 이운연의 <성전사랑과 그 셀렘>은 비일의 <성전신학예비독서용으로 최적화된 것이다.

 

비일의 <성진신학>이 매우 정교한 신학 과정이라면이운연의 <성전사랑과 그 설렘>은 개략적이고 접근이 용이한 저술이다이운연은 자기 저술만 읽고비일의 <성전신학>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자평을 했다독자가 두 책을 읽고 이운연의 자평이 맞는지 구분한다면 독서의 최고위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외국 신학자들이 한국 신학자들보다 더 유일한 언어 환경학문 환경에 있다그렇기 때문에 다른 학문 체계에 있는 한국에서 외국 서적을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고번역해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이운연은 비일의 학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학문이 한국 교회에 잘 이해되기를 바란 것이다그래서 <성진신학>과 짝을 이루어 <성전사랑과 그 설렘>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서평자는 <성전신학>을 읽지 않았다이운연의 제시처럼 <성전사랑과 그 셀렘>을 읽은 뒤에 읽으려고 계획하고 있다두 책은 출애굽기에서 등장하는 성막에서부터 성전교회요한계시록의 새하늘과 새땅까지 연결한 매우 유익한 저술이다성경전체를 성전으로 관통하는 것이다성전이 주는 의미를 이운연은 사랑과 그 설렘으로 표현했다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백성이 갖는 경험을 사랑과 설렘으로 축약했다.

 

이운연은 책을 제작할 때 항상 소지가 편리하게 제작한다고 한다. <성전사랑과 그 설렘>도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손쉽게 읽을 수 있는 저술이다독자가 편하게 읽으면서도 심오한 신학 지식에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목사가 제시하는 진솔한 성경 주해를 근거한 설교문장은 독자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다정선된 설교 문장은 어떤 방송 설교를 청취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이 유익하다자기 담임목사의 설교는 듣고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는 읽는 태도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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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란 무엇인가
최갑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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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란 무엇인가?/최갑종/새물결플러스/고경태 편집위원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2016년에 한국 교회에서는 다양한 칭의 이해를 위한 세미나와 출판이 진행되었다. 2017년에 연구의 결실들이 다양하게 출판되고 있다이러한 한국 교회의 흐름에 최갑종 교수도 자기 이해를 <칭의란 무엇인가>로 명확하게 제시했다학자가 자기 견해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독려할 일이며 후학들도 명료하게 인식하면서 자기 길을 정립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한국 교회 신학계에서 바울 이해에 큰 역할을 갖고 있는 최갑종 교수가 자기 견해를 명료하게 밝힌 것에 대해서 독자로서 찬사를 보낸다.

 

세계 교회는 이미 탈루터주의(delutheranizing)’가 완료된 것으로 생각한다. 1970년대 새관점주의가 등장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정점을 찍고 새로운 기독교로 진입을 시도했다그러나 한국 교회는 아직까지 루터주의를 지키자는 견해와 수정보완하자는 견해 그리고 새롭게하자는 견해 등이 공존한다필자는 새관점 학파의 칭의 전개는 루터의 칭의론을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생각한다.

 

최갑종 교수는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와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칭의 이해를 전개했다그럼에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최갑종이 이해하는 칭의 이해를 탐구할 수 있다최갑종은 저술 목적을 한국교회가 겪는 칭의 이해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것으로 밝혔다독자로서 혼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신학계보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을 제안한다최 교수처럼 두 견해를 잘 조화시킨 제언으로는 혼란을 잠재우기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그럼에도 저자의 의견이 명료하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할 수 있다최갑종의 견해가 세계적이고 한국적인 결정은 아니며연구자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인지해서독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 있다.

 

최갑종은 샌더스의 유대교적 재구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자세를 제시하기 때문에 새관점 학파 라인이 아님을 제시한다(53). 그러나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해서 복음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지만이방선교까지 연결하는 형태로 김세윤 교수와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다(72). 그러나 칭의가 법정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구원론(법정적), 교회론선교적인 모든 면에서 개방시킨다새관점 학파의 견해까지 포용하는 것이다칭의의 근거는 매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95-168). 그만큼 저자가 중요하게 배려하고 있다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칭의의 근거로 삼는다새관점의 하나님의 단일계획(single plan)이기 때문에 다르다칭의의 수단으로 믿음을 제시하는데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기독론에 아닌 구원론으로 제시한 모호한 어휘를 사용했다(204). 김세윤의 주제인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이 분리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김세윤의 주장(칭의와 성화가 동의어)을 반복한다전가 교리에 대해서는 법정적 이해가 아닌 연합 사상을 제시한다(253). 그래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고 주장했다그리고 2016년을 달구었던 영원한 칭의구원의 탈락가능성에 대해서 김세윤의 주장을 반복한다.

 

최갑종의 견해 전체를 개략하면 김세윤의 사상을 중요하게 반복한다그러나 새관점 학파에서 주는 견해를 곳곳에 첨가해서 자기 견해를 구축했다독자가 김세윤과 새관점학파의 견해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매우 유익한 정보이다그러나 김세윤과 새관점학파종교개혁파의 칭의 이해 등이 명료하지 않다면최갑종의 견해를 칭의 이해의 정점으로 삼고 다른 견해들을 비교할 수 있다최갑종은 가기 견해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을 목표했기 때문이다최갑종의 견해는 종교개혁의 칭의 이해도 아니고김세윤의 칭의 이해도 아니고새관점 학파의 칭의 이해도 아닌자기 칭의 이해를 구축했다그리고 학자가 명료하게 제시하는 견해가 한국 교회에 세워지길 목표했다독자는 학자가 제시하는 견해를 바르게 습득하여 자기를 세울 수 있다.

 

독자는 칭의에 대해서자기 이해를 세우든지최갑종의 견해를 따르든지종교개혁의 칭의 이해김세윤새관점 학파의 견해를 따르면 된다종교개혁의 칭의 이해를 사랑하는 서평자로서독자가 자기 칭의 이해를 명료하게 세우는 과정에 최갑종의 칭의 이해 제시는 유익한 가치가 있다그것은 자기 이해를 글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훈련이다최갑종 교수가 제시하는 주제를 따라서 자기 이해를 글로 표현한다면 지도자에 대한 좋은 이해가 될 것이다필자는 목사가 자기 이해를 글과 언어로 명료하게 표현해야 하고팔로우들은 그것을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필자가 학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양심적이고 명료한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최갑종은 자기 학문의 최정점에서 자기 과제를 한국교회에 수행했다고 생각한다이 과업은 한국 신학의 자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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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육의 역사 -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 속의 교리교육 이야기
정두성 지음 / 세움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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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교육의 역사/정두성/세움북스/고경태 편집위원


교리는 교회의 시작이고 체계이고 완성이다교리는 전하고 교육하면 교회는 세워지고거짓 교리가 유포되면 교회는 무너진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교리교육의 역사>의 저자인 정두성은 영국 웨일즈 대학에서 교리 교육을 주제로 박사학위(The importance of catechism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n South Korea, 2014)를 취득했다.

 

첫째저자는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 교회 전체 교회 역사를 탐구했다그리고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교리 교육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확립했다학자가 탐구한 요체를 제시했다신약성경고대 교회에서 종교개혁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까지 연결되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다.

역사적인 교회의 도식을 소개하기 때문에 <교리 교육의 역사>가 독자에게 유익을 준다한국이나 해외에서 발생한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역사적인 교회사도행전 2장에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와 역사적인 연결을 추구하지 않는다그런데 정두성은 교리 교육의 관점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한국 교회까지 한 교리로 연결된 것을 제시했다이것은 진리를 시대에 따라 적용하는 준용(準用mutatis mutandis)’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매우 기쁘게 추천하는 이유는 31쪽에서 4개의 공교회 결정을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에베소(431), 칼게돈(451)의 결정들을 한 문장에 배열한 연구자는 거의 없다네 개의 신경의 원천을 사도신경으로 제시했다(31). 저자는 사도신경에서 4개의 신경 그리고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카테키즘)를 연결시켰다.

 

둘째, <교리 교육의 필요성>에서는 중세 시대가 자연스럽게 공백을 갖고 있다저자는 중세 시대를 암흑기로 정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종교개혁신학을 고대 교회의 부흥즉 교리 교육의 재생(renewal)으로 보았다저자는 고대 교회의 교리 교육을 수직적(입문)으로종교개혁의 교리 교육을 수평적(신자 교육), 내용별로 정리해서 신자를 교육하는 형태로 세웠다그래서 교리 교육이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 항목임을 제시했다.

 

셋째, <교리 교육의 필요성>에서는 결국 한국 교회까지 연결시켰다한국 교회 초기에는 교리문답교육을 충실하게 수행했다그런데 1970년대 무렵부터 교리 교육이 사라졌고함께 교회에 대한 신뢰성도 몰락했다정두성 박사는 현재 한국 교회의 쇠퇴 상황을 교리 교육의 부재로 평가한 것이다사회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성장은 추락했는데지표에서 교리 교육의 부재와 함께 발생한 것으로 연관시켰다한국교회가 신뢰를 찾는 방안을 교육 교육을 체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제안했다세례를 받을 때 체계적인 수직적 교리 교육과 입교 후에 수평적 교리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두성은 <교리 교육의 역사>에서 교리에 대한 좋은 이해와 교육 방안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제시했다그리고 한국 교회에 대한 다양한 교육 정보들을 제시하고교리 교육의 회복과 활성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교리교육의 역사>를 읽는 독자는 교리에 대해서기독교 역사에서 교리의 위치에 대해서종교개혁 시대에 교리교육(카테키즘)에 대해서한국 교회 역사에 대해서 바른 정보를 접하게 된다저자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연결한 것은 좋은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교리교육의 역사>는 탁월한 학문 저술이면서도어떤 독자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좋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교리 교육에 관한 많은 학문적 관점을 볼 수 있으며기독교 전반을 볼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저술이다.

 

<교리교육의 역사>는 신학생목회자그리고 기독교 교육을 연구하는 교사나 학도에게 매우 긴요한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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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
나빌 쿠레쉬 지음, 박명준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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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

나빌 쿠레쉬/박명준 역/새물결플러스/고경태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서방 교회는 동성애 법제화(성소수자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그리고 이슬람의 확장도 막지 못하고 있다이슬람의 확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아시아에서 중동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강력한 이슬람 국가이다대한민국도 꾸준히 무슬림이 유입되고 있고대한민국 사람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이슬람은 인문학적인 관심과 함께 믿음의 관점(종교적)에도 보아야 한다기독교 출판계에서 이슬람은 복음 전도개종을 목표로 출판한다그러나 단순하게 전도 대상자로 보는 방식은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전도자가 단순하게 영적능력 강화로 복음을 전도하겠다는 발상은 무슬림 지역이나 타 무슬림 지역에서도 지양해야 할 자세이다나빌(Nabeel Qureshi)의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는 무슬림 이해와 무슬림 전도에 대해서무슬림에서 개종한 당사자의 수기로 표현하고 있다.

 

나빌의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는 무슬림이 그리스도인 된 사례이다나빌은 아시아계(파키스탄)로 미국에서 거주한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례이다마크 가브리엘은 이집트에서 유력한 학자에서 우연하게 개종한 사례도 있다나빌의 개종 사례는 매우 독특하고 감동적이다모든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큰 신비이다무슬림이 개종하는 역사를 볼 때에한국 사람도 전도할 수 있겠다는 도전을 받는다무슬림을 이해하고 전도하려는 의도와 함께한국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 동력까지 얻을 수 있고누구든지 전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나빌의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를 보면 이슬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그 외 분파 이슬람에 대한 것이고나빌은 그 중에서 소수파의 무슬림이지만 매우 정통적인 가계(쿠레쉬 가문)이라고 했다나빌은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거주했지만 전혀 자기 종교적 신념과 패턴을 포기할 의도가 없었다외국에 거주한 무슬림이 그 문화에 함몰되지 않고 이슬람을 유지한다는 것이다그런데 성경으로 토론하면서 꾸란에서 왜곡한 이사에 대해서 기독교적 예수로 인식하며 믿게 되었다나빌이 제시한 이슬람 전반의 모습도 매우 실제적이고 확고했다그런 나빌이 이사에서 예수로 찾아가는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인 모습이다그 무슬림의 강력한 생활양식과 지식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성경과 성령의 역사로 이슬람의 거짓체계를 인식해야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이 열린 마음으로 학문 모임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감당할 수 있는 모습이다학문 훈련과 인격 훈련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왜곡된 정보를 갖고 있는 무슬림과 대화하며 변화하기까지 기다리며 변화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무조건 전도를 하는 방식이 아니고맹신으로 공격적 전도를 하는 방식이 아니다나빌을 만났던 토론팀은 성경공부를 열린 마음으로 무한 토론과 공감으로 진행했다나빌이 가졌던 이슬람의 맹목적인 체계가 천천히 무너졌고예수를 이사가 아닌 구주로 믿었고결국 자기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던 길에서 복음 전도자의 길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읽는 독자는 매우 신선한 도전을 받는다한 무슬림이 개종한 사례를 보면서 무슬림 전도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그리고 중요한 전도 전략의 한 방편을 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성경 공부가 아니라불신자 전도를 위한 성경 공부 운용에 대한 것이다.

 

나빌의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는 수기(手記)이기 때문에 빨리 읽을 수 있다그러나 모든 과정이 매우 정교한 지식 체계로 진행한다그래서 정보를 조목조목 점검하면서 읽으면 이슬람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그리고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는 전문적인 책과 짝을 이룬 매우 정교한 저술이다나빌은 체계적으로 <알리인가예수인가?>를 저술했다.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는 쉽게 읽을 수 있다그러나 하나씩 점검하면서 읽으면 이슬람 전체 체계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그리고 다시 무슬림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는 과정을 볼 수 있다그리고 후속작인 <알리인가예수인가?>를 기대하게 한다.

 

대한민국 그리스도인이 무조건 복음 전도를 하는 방식이 아닌 매우 체계적인 성경 공부와 역사 지식이 필요한 이유까지 알게 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단지 무슬림 전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한국인에서 한국인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는 성경공부 토론 모임을 기대해본다그리고 이 책이 지시하는 <알리인가예수인가?>를 함께 놓고 꾸준히 독서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무슬림 탐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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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ooknews.com/?m=bbs&bid=book_review&uid=9645


http://ctimes.or.kr/news/view.asp?idx=2151&msection=2&ssection=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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