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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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p.132

 

가르칠 수는 없되 배울 수 있는 것들이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배움인 것들이다. 그런 배움에서는 흔히 시행착오라고 부를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 시행착오에서 발행하는 작은 기스들조차 파국의 조짐처럼 느끼는 분위기 속에서 배움은 실종되고 교육만이 남았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잡종인 것이고 누군가와의 마주침인데, 그 마주침을 다 위험이라고" 생각하기에, 최적화된 매뉴얼과 솔루션의 습득과 학습만이 공부라고 여기며 교육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 삶과 공부가 전도되어 마치 공부를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며, 그런 사람들의 삶은 굉장히 허약해지고, 빈약해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

 

그러나 '진짜 삶이란 이러이러 한 것이다'는 언명은 결국 아프고 흔들려봐야 어른이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명은 아닐까. 삶이라는 것이 그런 관념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작은 생활기스조차 병리화하여 절대 생기면 안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건 물론 심각하다. 하지만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부러 아파봐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들이라 여겨졌던 일들이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표준모델을 들이미는 방식은 교육이 삶을 식민화한다는 저자들의 비판의 대상과 무엇이 다른가.

 

배움이 실패하더라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은 끝내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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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김종옥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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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커피맛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아. 커피맛쯤이야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 분명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카페를 들락거렸고, 그만큼 자주 커피를 마셨지. 근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때 마신 커피맛이 어땠는지 말이야. 그래서 생각이 났지. 아마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커피맛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만 했던 게 아닐까. 그게 맞을 거야. 정말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되면, 맛있다고 말하고, 맛이 없다고 말해야 했어."(「그녀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p.23~24)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고 해서 앞으로 좀 더 커피맛에 신경을 쓰게 될까? 그럴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조금 더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충만한 삶을 가져오지도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충만한 삶이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서만 상상되는 무엇일 때 더 가치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아직까지 진실로 살아본 적은 없다. 눈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그것을 똑바로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삶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붙들 수 없다. 우리 앞의 대상들이 저 자신인 채로 있을 때의 충만함, 그러한 대상들 안에 이미 고여 있는 내밀함, 그러한 충만하고도 내밀한 대상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뿌듯함 같은 것들, 그것들을 소유하면서 결국 우리 자신의 존재 또한 충만하고 내밀하고 뿌듯하게 만들 수 있는 매 순간의 기회들은 그때 그 순간에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해설 |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권희철, p.319)

 

그런데 문제는 "그 떨리는 시작과 지속의 순간들"이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손으로 틀어막고 망가뜨리면서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표정에 어리는 어떤 암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정작 준비한 말을 꺼내지도 못한 사이에 이미 어느 정도는 깨져버린, 아니 깨뜨려버린 것이다.

 

인생이 "삶을 끊임없이 조금씩 깨뜨리고 잃어버리는 과정"이라 해도, 여기 회상을 통해서나마 "접혀 있던 삶의 주름들을 펼치며 이제는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와 그것을 감촉하고, 혹은 기억 안에서나마 잃어버린 삶을 다시 살아내면서 그것이 삶 안에서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증언하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화자들은 그러한 증언들을 통해 "삶 그 자체를 보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소설을 읽는 일이 독자들에게도 '삶을 아주 조금 되찾아줄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이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닌 독자에게, 이미 사리지고 없는 것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음을 혹은 있을 수도 있었음을 증언"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는 아닐 것이다.

 

결국 소설을 읽을 때 각자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회상에 기꺼이 유혹당하며 각자의 과천행 버스를 타야만 할 것이다. 비록 격렬한 쓰라림만을 남길지라도, 스스로 증언해야만 하는 깨뜨림의 순간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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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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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는 전혀 모르는 곳에 대해 향수병을 앓는다." p.23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라는 이 넌센스같은 말을 한 카슨 매컬러스에 따르면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한 향수와 낯설고 이국적인 것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 방황은 경험상 여행지에서도 끝날 줄 모른다. 저 낯선 골목길로 들어가볼지, 아니면 여기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이렇게 끝나지 않는 방황의 한 가운에서 어떻게 정반대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가 되는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의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p.2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나보코프식으로 설명하자면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는 넓은 장소에서 찾는 은밀한 자유와 같다. 서로 모순된 충동이 동시에 발현되는 이 기묘한 병은 여행으로만 앓을 수 있는 질환이다.

 

알베르 카뮈는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다"라고 썼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나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오랜 습관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사소한 접촉조차도 우리의 존재를 깊이 전율케 한다. 우리는 빛의 폭포와 조우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영원함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즐거움을 위해 여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여행에 즐거움은 없다." p.462

 

감히 한 마디로 "존재하기 위해 떠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떠나야만 존재할 수 있다"일지도. 폴 서루는 이 감동적인 발언이 무색하게 카뮈는 결코 멀리 여행한 적이 없는 소심한 여행자였다고 말한다.

 

소심하기로는 누구 못지 않기에 폴 서루가 제안하는 '당신만의 여행을 위한' 열 가지 팁에서는 한 가지만 실천해보기로 한다.

여덟.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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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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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은 영화제에서 어느 비평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당신은 죽음과 기억의 작가라고 자주 소개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늘 '뒤에 남겨진 사람'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는가?" p.21

 

히로카즈는 비평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허나 당사자의 깨달음과 무관하게 그런 성향이 그의 본질임은 관객들은 이미 눈치챘을 듯 싶다. 깨달음이 찾아오기 전이었는지, 그 다음이었는지 히로카즈가 제목에 이끌려 샀다는 책에는 그의 이상형이라고 부를만한 이런 철학이 담겨 있었다.

 

"단가는 기본적으로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단가 형식의 기본이다. 따라서 짧은 단어에서 그 느낌을 해석해내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시형이기도 하다."p.19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던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 또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였다.

 

바닷마을에 건너온 소녀 스즈의 언뜻 행복해보이는 일기 속 행간에는 표현되지 못한 말들과 감정들이 있었다. 세 언니들 또한 말하지 않는 것들의 주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의 주변에 남아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 건 무얼 직접 털어놓아서가 아니었다.

 

말하지 않고 있는게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어떤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털어놓아도 된다는 환대의 형식이 그들을 가족으로 묶어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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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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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 붙이기 힘은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p.105 <1987년 2월 11일>

누군가 왜 일을 하고 사냐고 묻는다면 당분간은 다음과 같은 답을 일시적인 전범으로 제시해야겠다.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p. 43 <1986년 6월 29일, 김욱동 편의 [윌리엄 포크너](문지, 1986) p.255>

그런데 김현은 왜 이 문장에 "과연!" 하며 무릎을 쳤는가. 행복한 책읽기는 하루에 여덟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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