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김종옥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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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커피맛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아. 커피맛쯤이야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 분명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카페를 들락거렸고, 그만큼 자주 커피를 마셨지. 근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때 마신 커피맛이 어땠는지 말이야. 그래서 생각이 났지. 아마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커피맛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만 했던 게 아닐까. 그게 맞을 거야. 정말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되면, 맛있다고 말하고, 맛이 없다고 말해야 했어."(「그녀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p.23~24)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고 해서 앞으로 좀 더 커피맛에 신경을 쓰게 될까? 그럴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조금 더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충만한 삶을 가져오지도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충만한 삶이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서만 상상되는 무엇일 때 더 가치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아직까지 진실로 살아본 적은 없다. 눈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그것을 똑바로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삶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붙들 수 없다. 우리 앞의 대상들이 저 자신인 채로 있을 때의 충만함, 그러한 대상들 안에 이미 고여 있는 내밀함, 그러한 충만하고도 내밀한 대상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뿌듯함 같은 것들, 그것들을 소유하면서 결국 우리 자신의 존재 또한 충만하고 내밀하고 뿌듯하게 만들 수 있는 매 순간의 기회들은 그때 그 순간에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해설 |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권희철, p.319)

 

그런데 문제는 "그 떨리는 시작과 지속의 순간들"이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손으로 틀어막고 망가뜨리면서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표정에 어리는 어떤 암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정작 준비한 말을 꺼내지도 못한 사이에 이미 어느 정도는 깨져버린, 아니 깨뜨려버린 것이다.

 

인생이 "삶을 끊임없이 조금씩 깨뜨리고 잃어버리는 과정"이라 해도, 여기 회상을 통해서나마 "접혀 있던 삶의 주름들을 펼치며 이제는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와 그것을 감촉하고, 혹은 기억 안에서나마 잃어버린 삶을 다시 살아내면서 그것이 삶 안에서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증언하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화자들은 그러한 증언들을 통해 "삶 그 자체를 보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소설을 읽는 일이 독자들에게도 '삶을 아주 조금 되찾아줄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이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닌 독자에게, 이미 사리지고 없는 것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음을 혹은 있을 수도 있었음을 증언"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는 아닐 것이다.

 

결국 소설을 읽을 때 각자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회상에 기꺼이 유혹당하며 각자의 과천행 버스를 타야만 할 것이다. 비록 격렬한 쓰라림만을 남길지라도, 스스로 증언해야만 하는 깨뜨림의 순간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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