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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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 첫날 영국에서는 860만명의 시청자가 셜록 시즌4 에피소드1을 '본방사수'했다고 한다. 영국만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극장 개봉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혹자는 배급사의 농간이라고 했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세계는 다시 한 번 셜록홈즈 증후군에 빠졌다.

 

조너선 갓셜에 따르면 우리가 셜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의 뇌에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의 홈즈는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쉽게 이뤄질리는 없다. 우리는 아서 코난 도일이 아니다.

 

셜록 홈스의 인기 비결이자 아서 코난 도일의 작업 비결은 "가장 애매모호한 단서를 가장 그럴듯하고 완벽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다."(p.132) 우리가 스스로 완벽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을때, 우리의 이야기하는 마음은 이미 만들어진 신화로 향한다. 신화의 대표적인 두 버전이 종교와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이야기하는 마음이 의미를 강박적으로 추구한 결과이다. 음모론은 인간 조건의 거대한 미스터리, 이틀테면 '세상에는 왜 이토록 나쁜 일만 일어나는가?'같은 물음에 궁극적 해답을 제시한다."(p.146)

 

"우리가 종교를 가진 이유는 설명의 공백을 질색하는 천성 때문이다. 성스러운 픽션에서 우리는 이야기하는 마음이 구사하는 말 짓기의 최고봉을 본다."(p.152)

 

도대체 왜 뇌 속의 셜록 홈즈는 강박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설명의 공백을 질색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는 '개인 신화'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떄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라면 차라리 배우를 때려치우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연기자와 같다. (그러므로 마틴 프리먼은 얼마나 훌륭한 배우인가.)

 

우리는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왜곡해서라도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려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이유는 삶 이야기에서 주인공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일인칭 드라마에 나오는 결함이 있을지언정 고귀한 주인공으로 둔갑시키는 이야기를 평생 만들어 낸다. 삶 이야기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즉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자리에 왔으며 이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개인 신화'이다. 삶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이자 우리 정체성이다. 하지만 삶 이야기는 객관적 서술이 아니다. 전략적 망각과 교묘하게 빚어낸 의미로 가득한 정교한 서사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독일의 유대인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희곡 『알만소르』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예사로운 예언이 아닌 것이다.

 

"책이 소각되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소각되고 말 것이다."(p.189)

이야기하는 마음은 이야기에 의해 빚어진다. "픽션은 정말로 마음을 빚는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작거리고 주물럭거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동의도 받지 않고서 우리의 마음을 빚어낸다."(p.183) 그러므로 문제는 이야기의 영향력이 아닌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가이다.

 

앞서 말했듯 삶 이야기는 "전략적 망각과 교묘하게 빚어낸 의미로 가득한 정교한 서사이다." 《뉴욕 타임스》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카가 말했듯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기억을 더 간직한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이런 의문이 든다. 진실은 무엇떄문에 중요한가? 진실이 그 자체로 가치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철학자 윌리어 허스타인 말마따나 "진실은 우울하다." 진실에 따르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대개는 앓다가 죽을 것이며,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행성 위의 작고 보잘것 없는 점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이러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 이런. 결국 도돌이표처럼 '의미'의 강박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인가. 이야기든 진실이든 우리는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나보다.

 

세상을 혼란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진실을 찾으려했던 한 남자의 몰락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비극으로 남았다. 이상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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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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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솔닛의 경험을 빌리지 않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자들은 자꾸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들며, 이는 명백히 젠더적 현상이다. "많이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p.15)

 

이런 남자들을 상대로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전선이다." (p.25)

 

레베카 솔닛의 생에에서는 끝나지 않을, 인류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상대로 벌이는 이 전쟁에서 나머지 절반은 반드시 져야만 한다. 문제는 어떻게 질 것인가이다. 그냥 전쟁을 포기해서도, 무조건적인 항복을 해서도 안 된다. 상대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어야만 한다. 이 확실한 승패에 따라 모두가 자유로워질 것인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지의 여부가 달려있다.

 

모두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한쪽이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단순히 "남자들이 수행하는 제도적 활동의 일부를 여자들이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지리적 차원에서든 상상력의 차원에서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도록" "여러 실제적인 형태의 자유와 힘이" 주어져야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에는 "여성에게는 또한 대학과 전세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술집에서의 식사, 한밤중의 거리 산책, 도시의 자유로움은 우리의 자유에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체성을 잃기 위해서다."(p.144)

전쟁에서 지는 것. 그것은 젠더차이가 차별과 동일시 되는 고리를 끊는 것이다. 어떻게?

 

"오늘날 우리 중에 존재하는 현실의 카산드라들에게는 우리가 그 저주를 걷어줄 수 있다. 누구의 말을, 왜 믿을 것인가 하는 선택을 우리가 스스로 내림으로써"(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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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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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 영혼의 총체를 만난다는 기분, 그 영혼의 나약함과 위대함, 한계, 비루함, 편견, 믿음, 요컨대 그 영혼을 감동시키고, 그 영혼의 관심을 끌며, 그 영혼을 흥분시키고, 그 영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만난다는 기분은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다."(p.13)

 

오직 문학만이 "직접적이고 보다 완벽하며 보다 심도 깊은 방식으로" 망자와의 영혼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데, 주인공 프랑수아가 슬펐던 젊은 시절 내내 삶의 동반자로 삼았던 벗이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다. 위스망스의 문학은 곧 프랑수아의 영혼과도 같지만 그 영혼은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

 

"내 삶이 혐오스럽고 나 자신에게 염증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이제부터 또다른 삶을 이끌어나간다는 것도 너무 먼 이야기이리라! …… 결국, 결국 나는 예배를 보고서도 경직되고 암울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구나,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출행』)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심지어 학문적 업적도 인정받은, 물질적 측면에서도 불평할 거리가 전혀 없는 주인공은 어째서 이러한 곤경에 처했는가. 그가 말한대로 "절망감이나 심지어 특별한 슬픔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지 비샤가 말한 "죽음에 저항하는 활동의 총체"가 서서히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p.251)일까?

 

프랑수아는 "단순한 생의 의지만으로는 평균 서구인의 삶에 점철된 고통과 근심의 총체에 저항하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의 의지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걸까? 대의? 신? 인류애? 그런데 정말 그런것들이 필요했단 말인가? 결국 스스로 밝히듯이 그가 원한건 '여자'였을 뿐이었다.

 

"위스망스의 유일한 진짜 주제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다. 상류층의 행복이 아닌, 독신자에게는 절망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소시민적 행복. 『저 아래로』에서 상찬된 부엌은 문자 그대로 살림 부엌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지, 귀족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p.342)

 

그런데 성性의 영역으로까지 투쟁영역이 확장된 데에 문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곤경을 느끼는 프랑수아(혹은 우엘벡?)의 불안을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필연적으로 겪는 삶의 역경, 특히 고독과 소외와 노화"의 문제로 해석할 때 실은 우리도 그 곤경에 연루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실은 인류의 절반만이 겪는 곤경에 불과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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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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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심판하기도 해. 하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네."(p.106)

 

어떤 책임감은 중요한 일을 해내게 만들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든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양심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네가 자네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건 귀한 게 아니게 되네."(p.109)

 

자신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양심과 책임감은 그로부터 비롯된 행위가 숭고할 지언정 거기에는 어떤 뒤틀린 구석이 있다. 공동의 문제를 홀로 떠안으려는 저 숭고한 양심 속에는 영웅적인 결단이 아닌 해석의 오만이 깃들어있다.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p.266)

 

자신의 삶을 집어삼킨 고통이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쉽게 견딜 수 있겠는가. 소설 속 화자가 '오만'이라 말했지만 그런 해석의 힘 없이 고통을 견디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 비극을 죄로 번역하는 해석이 결코 구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p.273~274)

망가진 착한 소년들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결국 폭력성을 분출하고 말기에 그들은 전혀 복잡하지 않으며 손쉽게 분류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버키는 복잡하다. 그는 대가를 치렀다. 그는 부조리를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해석했고,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이 복잡하게 망가진 인물이 그보다 덜 복잡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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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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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A가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는지 아닌지는 제 판단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신 워드 판사가 재직 당시 미성년자 E에 대해 내린 결정, 역시 여호와의 증인인 십대 청소년 관련 판결을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해당 판결문에서 워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동의 복지는 이번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며, 나는 무엇이 E의 복지를 좌우할지 판단해야 한다.'

 

이 견해는 1989년 아동법의 금지명령에 명확하게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1989년 아동법은 그 도입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의 복지임을 주창했습니다. 저는 '복지'가 '안녕'과 '이익'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A의 의사를 고려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A는 제게 본인의 의사를 뚜렷이 전달했고 A의 아버지 역시 본 법정에서 본인의 의사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성경의 세 구절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서 끌어온 종교적 교리에 의거하여 A는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큰 수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치료 거부는 성인의 기본적 권리입니다. 성인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치료하는 것은 형사상 범죄로서 폭행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A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근접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심오한지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부모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을 신앙을 위해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고수하는 교리의 힘을 보여줍니다."

(……)

:바로 이 힘 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종파는 신자들 간의 열린 논쟁이나 반대의견을 장려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회중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양'이라 부른다는데요, 적절한 명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 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

본 법정은 내세에 관해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A는 언젠가 스스로 내세를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하게 되거나 하겠지요. 한편 건강을 회복한다는 가정하에 A의 복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 새롭게 발견한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활발한 사고력 발휘와 장난기 많고 다정한 본성의 표현이며, 그리고 아이 앞에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입니다.

 

요컨대 저는 A와 그의 부모, 회중의 장로들이 본 법정이 가장 중시하는 A의 복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합니다. A는 그런 결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p.166~169)

 

저 '여호와의 증인'의 자리에 다른 종교, 혹은 특정 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대입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 부분을 읽었다. 읽으면서 시를 사랑하는 저 소년 A보다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풍부하다고,그래서 반대의견을 내본적이 있다고, 그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있다고 쉽게 자신할 수가 없었다.

 

법은 A의 존엄성 보다 A의 생명을 우선시 하며 A의 청구를 기각했다.  생명은 법이 지켜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다. 그러나 그 다음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의미'"는 법이 제공해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 '의미'의 부재앞에서 종교를 대신할 무엇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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