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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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 영혼의 총체를 만난다는 기분, 그 영혼의 나약함과 위대함, 한계, 비루함, 편견, 믿음, 요컨대 그 영혼을 감동시키고, 그 영혼의 관심을 끌며, 그 영혼을 흥분시키고, 그 영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만난다는 기분은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다."(p.13)

 

오직 문학만이 "직접적이고 보다 완벽하며 보다 심도 깊은 방식으로" 망자와의 영혼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데, 주인공 프랑수아가 슬펐던 젊은 시절 내내 삶의 동반자로 삼았던 벗이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다. 위스망스의 문학은 곧 프랑수아의 영혼과도 같지만 그 영혼은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

 

"내 삶이 혐오스럽고 나 자신에게 염증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이제부터 또다른 삶을 이끌어나간다는 것도 너무 먼 이야기이리라! …… 결국, 결국 나는 예배를 보고서도 경직되고 암울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구나,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출행』)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심지어 학문적 업적도 인정받은, 물질적 측면에서도 불평할 거리가 전혀 없는 주인공은 어째서 이러한 곤경에 처했는가. 그가 말한대로 "절망감이나 심지어 특별한 슬픔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지 비샤가 말한 "죽음에 저항하는 활동의 총체"가 서서히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p.251)일까?

 

프랑수아는 "단순한 생의 의지만으로는 평균 서구인의 삶에 점철된 고통과 근심의 총체에 저항하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의 의지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걸까? 대의? 신? 인류애? 그런데 정말 그런것들이 필요했단 말인가? 결국 스스로 밝히듯이 그가 원한건 '여자'였을 뿐이었다.

 

"위스망스의 유일한 진짜 주제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다. 상류층의 행복이 아닌, 독신자에게는 절망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소시민적 행복. 『저 아래로』에서 상찬된 부엌은 문자 그대로 살림 부엌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지, 귀족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p.342)

 

그런데 성性의 영역으로까지 투쟁영역이 확장된 데에 문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곤경을 느끼는 프랑수아(혹은 우엘벡?)의 불안을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필연적으로 겪는 삶의 역경, 특히 고독과 소외와 노화"의 문제로 해석할 때 실은 우리도 그 곤경에 연루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실은 인류의 절반만이 겪는 곤경에 불과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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