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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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A가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는지 아닌지는 제 판단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신 워드 판사가 재직 당시 미성년자 E에 대해 내린 결정, 역시 여호와의 증인인 십대 청소년 관련 판결을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해당 판결문에서 워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동의 복지는 이번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며, 나는 무엇이 E의 복지를 좌우할지 판단해야 한다.'

 

이 견해는 1989년 아동법의 금지명령에 명확하게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1989년 아동법은 그 도입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의 복지임을 주창했습니다. 저는 '복지'가 '안녕'과 '이익'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A의 의사를 고려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A는 제게 본인의 의사를 뚜렷이 전달했고 A의 아버지 역시 본 법정에서 본인의 의사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성경의 세 구절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서 끌어온 종교적 교리에 의거하여 A는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큰 수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치료 거부는 성인의 기본적 권리입니다. 성인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치료하는 것은 형사상 범죄로서 폭행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A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근접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심오한지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부모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을 신앙을 위해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고수하는 교리의 힘을 보여줍니다."

(……)

:바로 이 힘 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종파는 신자들 간의 열린 논쟁이나 반대의견을 장려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회중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양'이라 부른다는데요, 적절한 명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 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

본 법정은 내세에 관해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A는 언젠가 스스로 내세를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하게 되거나 하겠지요. 한편 건강을 회복한다는 가정하에 A의 복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 새롭게 발견한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활발한 사고력 발휘와 장난기 많고 다정한 본성의 표현이며, 그리고 아이 앞에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입니다.

 

요컨대 저는 A와 그의 부모, 회중의 장로들이 본 법정이 가장 중시하는 A의 복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합니다. A는 그런 결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p.166~169)

 

저 '여호와의 증인'의 자리에 다른 종교, 혹은 특정 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대입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 부분을 읽었다. 읽으면서 시를 사랑하는 저 소년 A보다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풍부하다고,그래서 반대의견을 내본적이 있다고, 그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있다고 쉽게 자신할 수가 없었다.

 

법은 A의 존엄성 보다 A의 생명을 우선시 하며 A의 청구를 기각했다.  생명은 법이 지켜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다. 그러나 그 다음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의미'"는 법이 제공해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 '의미'의 부재앞에서 종교를 대신할 무엇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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