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는 여러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특히, 가족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친모로부터 버려진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모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가족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방편으로 재혼한다. 새엄마는 주인공이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하여 구박하고, 심지어 여동생을 성폭행했다고까지 생각한다.



주인공은 가족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겪었고, 우리 사회에도 분명 이런 갈등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오순도순 잘 살아하는 가정도 많지만 가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사회 전체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공동으로 아이를 기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부모가 맞벌이하는 가정에서는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아이도 오랜 시간 혼자 있어야 한다. 또한, 소년소녀 가장 같은 경우도 보호자가 없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아이가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육의 기능을 가정이 아닌 사회가 담당하는 것은 어떨까? 일단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아이가 외롭지 않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서로 도울 수 있어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사회성이, 공동체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립감이 길러질 수 있다. 실제로 옛 이스라엘은 ‘KITS’라는 이름의, 공동체 전체가 아이를 양육하는 마을을 꾸려 살았다고 하니,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주인공은 가족에게서 외면을 받았지만, 다행히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보살핌을 받고, 무뚝뚝하지만 배려심 깊은 마법사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가정이 온전치 못했지만, 주인공은 이만하면 행복했을 것이다. 꼭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더라도 사랑이 있다면 행복한데, 사회가 아이를 기르는 것도 괜찮은 방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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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무척 즐겨하는 친구가 있다. 내 친구와 나는 인상적인 책을 한 권씩 추천하고 서로 느낀 점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나는 1학년 때 읽은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추천했고, 친구가 내게 권한 책은 ‘진주귀고리 소녀’이다.



자주 보는 명화 중 하나인 ‘진주귀고리의 소녀’의 주인공인 소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작품이다. 작가는 그 그림 한 점을 보고 소설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트는 화가 베르메르의 저택에 하녀로 취직하여 일손을 돕는다. 그러던 중 베르메르와 그의 후원자 반 라이언, 그리고 푸줏간 아들 피터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리트가 사랑하는 사람은 베르메르. 소설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를 향해 하는 행동을 보면 누구든 사랑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베르메르는 그의 아내의 귀고리를 그리트가 하도록 한 작품을 완성하고, 이를 본 베르메르의 아내가 격노한다.



전반부와 중반부는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은근한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몇 장 되지 않는 후반부라 생각된다. 저택을 나선 그리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방황한다. 수많은 선택지 중 나는 그리트의 베르메르에 대한 사랑을 생각한다면 곤욕을 무릅쓰고라도 그에게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리트는 피터와 가정을 꾸린다. 머리카락을 자신의 은밀한 부분이라 생각하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던, 순수한 그리트를 떠올리며 나는 그녀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상대에게 짐이 되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말했다. “바뀐 것은 없다. 내 크고 순수한 눈을 빼고는.”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강조되던 그리트의 커다란 눈망울은 많은 남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그녀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트가 저택에서의 생활을 편하게 여기고, 마지막에는 피터를 선택하는 행위는 조금씩 세상에 물들어버리는 과정이다. 베르메르가 죽은 후 그가 그리트에게 남긴 진주귀고리를 그녀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팔아버린다. 베르메르는 그녀가 떠난 후에도 애정을 간직했던 모양이다. 반면 그리트는 소설 전반부의 깨끗하고 순결한 이미지는 잃은 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이 자신을 위하여 쓴 돈을 빚이라고 간주하여 갚으려고 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순수했던 그녀가 변했던 원인은 하나밖에 찾을 수 없었다. 궁핍함. 현실과 타협하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던 과정에서 그녀는 변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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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반 아이 중에 집이 없는 친구가 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경험을 이 책의 주인공인 타무라 히로시는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를 늘 먼발치서 지켜보는 형과 누나가 있었고, 가족처럼 따스하게 맞이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 소설이 슬프기만은 않은 이유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자신을 성장시켜 준 추억의 한 조각과 같이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일본 최고의 개그맨으로서의 명성이 실감나는 유머 있는 말투 때문일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해 밥 한 공기를 두 시간동안 씹어 쌀의 새로운 맛을 발견한, 눈물겨워야 할 이야기를 그는 어릴 적의 재미난 추억처럼 회상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웃음 짓고 웃음을 주는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심하게 우울해하고, 죽을 생각마저 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성숙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물론 행복해졌을 것이다. 나도 캐나다에 혼자 유학을 간 시절 외로움을 많이 탔다. 내가 머문 홈스테이 아저씨는 인종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백인들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그 분은 ‘왜 나를 맡겠다고 하셨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꺼림칙해하셨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말은 통하지 않는데다 홈스테이 집에서 받는 설움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전화로 엄마께 힘들다고 징징대면 엄마께서는 얼마나 가슴 아프실까. 가족과 연락할 때면 환경에 적응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혼자 서러움을 삭히느라 더욱 외로워졌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적응했고, 친구들도 사귀어 매일같이 신나는 생활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캐나다에서 보냈던 시간은 매일매일을 내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유학 초에 너무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그러한 추억은 절대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고 나면 그 행복감은 고통을 겪은 만큼 커져서 돌아오는 것 같다. 이 작가도 아마 그것을 깨달아 방황 후에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느꼈을 것이고, 나 또한 캐나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내 경험을 돌아보며, 또 작가의 어린 시절에 관한 고백을 떠올리며 앞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더 인내하며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과정을 감사히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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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을 보고




기계와 인간과의 전쟁

그러나 인간은 없었다




영화 시작부터 대단한 스케일의 CG와 엄청난 폭음이 내가 앉은 좌석을 뒤흔들었다. 그 폭격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가족 대대로 스카이넷에 대항하여 싸운, 레지스탕스의 사령관 존 코너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힘을 합쳐 기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주요 인물은 인간 마커스이다.

마커스는 본래 스카이넷에 의하여 제조된 로봇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실 철저히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기계. 그러나 나는 마커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결국, 그는 자신이 로봇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레지스탕스를 돕는다. 그는 인간이 되기를 택했다. 자신이 프로그램화 된 로봇이라는 스카이넷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손의 두개골을 절단하여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칩을 뇌에서 꺼내버린다. AI에서도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는 로봇이 있었고,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피노키오도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갖은 고난을 겪었다. 영생이라는 인간의 궁극적 소망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존재들이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앞 영화에서 스카이넷은 원래 거대한 컴퓨터였는데, 스스로 진화를 거듭한 끝에 모든 기계를 점령하는 막강한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소개된다. 기계가 스스로 진화한다 : 참 모순된 문장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기계가 창의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미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 배운다. 그러나 기계가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은 인간만이 창의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미 유전자 기술을 사용하여 진화할 수 있는 컴퓨터가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미래에 정말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짐짓 두려워진다.

이 영화의 과학적 상상력이 나를 사로잡은 하나의 매력이었지만, 전쟁의 잔혹성, 비인간성 역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수단화되었다. 전투의 피해는 사상자 수로 가려지고,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레지스탕스마저 한 사람을 대우할 때 그가 전투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따라 다르게 대우한다는 점이었다. 지위에 따라 그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뿐만 아니고, 그 사람의 목숨의 가격까지 매겨지는 것이다. 존 코너는 사령관으로서 레지스탕스 내부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는데, 기계의 공격을 받아 심장이 회복 불능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마커스는 존 코너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내놓는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정말 고맙다”라는 태도로 그 심장을 받아들여 존 코너를 살려낸다. 어찌하여 이런 설정을 한단 말인가! 제작가가 의도한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레지스탕스도 인간성이라고는 지니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존재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다. “존 코너는 레지스탕스의 마지막 희망이니까 반드시 살려야하고, 너는 원래 죽어야 했던 기계에 불과했던 존재니까 그를 위해 심장을 내놓는 게 당연해”라는 식의 논리이다. 마지막에 마커스는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과 기계의 다른 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영혼과 심장을 지녔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커스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영혼을 지녔고, 누구보다도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던가? 누구보다도 확실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기계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란 감정의 유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계가 극도로 발달하여 세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의 경우의 수를 데이터화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면 인간과 동등해진다는 말이 아닌가. 기준이 감정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영혼과 심장 역시 그 기준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세상에는 인공심장을 단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이므로, 인간의 심장의 유무는 기계와 인간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영혼이 마지막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영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죽음을 정복하지 않는 한 영원히 알 수 없는 과제로 남겨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단정 짓는 기준을 찾지 못하겠다. 우리가 지금 생산해 내고 있는 기계들이 어느 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상상이 완전히 허구적이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인간이 이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터미네이터>에서 스카이넷은 인간을 멸살하고 기계로만 가득 찬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싸움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무엇인가? 없다. 기계가 점령한 세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표일 뿐, 그 이후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더더구나 기계들은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연료를 끊임없이 공급받기 때문에 부족함 따위를 느끼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은 살아야겠다는 욕구,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 등에 의하여 끊임없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기계가 지구를 점령하는 날이 오더라도, 레지스탕스와 같이 끊임없이 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인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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