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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아마데우스 > 재미있는 학술 논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4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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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때 처음 읽게 된 책. 학교 국사선생님께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재미있다.' 란 표현을 써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한명기씨는 책 뿐만 아니라 KBS TV특강, 라디오 한국사등 여러강의를 통해 그의 연구분야에 대해 알렸다. 그래서 역사에 관심있고 대중매체를 많이 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그의 강의를 들어보았을것이다.

이책은 선조대부터의 광해군을 거친 한반도의 정치,경제를 심도있게 써 내렸다. 학술논문 답게 탄탄한 내용과 저자의 해석. 또한 청산유수한 같은 글의 흐름에 논문이라곤 생각되어지지 않을 만큼 쉽고 유익하다.

이책이 너무 두껍다고 생각하거나, 어렵다고 생각되어 지는 사람들은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광해군>을 읽어 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조선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것이다. 그의 뛰어났던 외교정책이라든지... 이긴자들이 소유한 역사의 단면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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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아마데우스 > 최고의 소설.
람세스 - 전5권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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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도쯤 국내엔 크리스티앙 자크 열풍으로 온 서점이 들 썩였다. 나 역시 그를 좋아하는 팬이였고, 람세스가 나오길 손 꼽아 기다렸던 나의 유년 시절이 생각난다.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프랑스에서, 그는 다년간의 이집트 여행과 박학한 지식으로 아주 흥비롭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또한, 총 5권의 책은 내용을 충분히 수록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는데 참으로 즐겁다. 적당한 인간 심리 묘사는 한층 더 이야기의 사실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제 3권에 나오는 카데슈 전투의 묘사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오래된 소설이긴 하지만 전혀 시대에 뒤 떨어짐이 없는 문체와 이야기 일것이다. 이집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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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아마데우스 > 조선 당쟁사의 한맥을 보여주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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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그는 유학계의 성인으로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감히 그를 논하는 자는 없었으리라. 조선왕조실록에 천번이상 그의 이름이 논해졌다는 사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송시열의 성인화도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해 논한듯 싶어 교양서로서 마음에 든다. 송시열이 살았던 시대엔 조선 당쟁이 극도로 심했다고 알고 있다. 송시열 역시 결국 당쟁의 정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중도적 입장에 선 이덕일씨가 송시열의 죽음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시각적 차이에 대해 기술한 부분은 참으로 흥미롭다. 왕과 사대부 영수와의 묘한 관계... 그리고 조선 당쟁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교양서로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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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포로롱 > 태양은 가득히 - 태양이 부른 살인 -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영화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만들 때(볼 때도) 오류는 상당한 편견이 작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원작은 누가 뭐래도 원작이다, 라는.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1960년)와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2000년)은 패트리사 하이스미스의 소설「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했다 한다. 주인공 이름이 같고 전체적인 플롯도 비슷하지만 르네 끌레망과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눈은 사뭇 달랐던 듯 보인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감독들의 각색의 정도의 의문도 있지만 영화를 볼때 우선 이야기 구조를 살피는 습성 탓에 말이다. 시간이 나면 읽어봐야겠다.



비디오 예고편에서 눈길을 끌어 골랐던 리메이크 작품 [리플리]이야기를 먼저 할까 한다. 나는 보다가 이 영화의 엄청난 구라(?)에 눈이 돌아갈 뻔 했다. 수많은 조작과 사건의 우연성을 어쩜 그리 남발하는지. 원작이 쓰여진 게 50년대라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각색할 땐 스토리의 개연성에서 관객이 납득이 가게끔 해야 할 것 아닌가. 원작이 쓰였던 50 년대조차 전근대적인 수법이 먹히는 시기가 아니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 호가 당대에 우주를 날아다녔다는 사실을 밍겔라 감독은 망각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니 이 감독의 전작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아름다운 영상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닥 내킨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먼저 주인공 [리플리]에서의 톰 리플리가 석유 재벌 아들인 디크 그린리프를 찾아 프랑스로 떠나는 설정부터 내키지 않았다. 모든 걸 소유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싶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 텐데 굳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거금의 돈을 들려 보낸 점은 아무래도 작위적이다.

둘째, 재벌 아들 디키 또한 대학때 친구라는 말에 쉽게 그와 동화되었다는 점은 그렇다 쳐도 플롯의 허점은 후에 톰이 살인을 한 후 그 수사과정에서도 난무한다. 범죄에 쓰여진 차에 지문 조회는 왜 못하며, 디키의 사체를 버린 섬 근처를 샅샅이 뒤져보는 최소한의 수고로움은 절차조차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이루어지는 여권 조작이나 수표 조작처럼 엄청난 결함은 딴지 걸 의욕을 잃어버린다.

개인적인 아쉬움은 디키 역의 주드 로가 리플리 역에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고 (캐릭터의 특성인진 몰라도 맷 데이먼이 너무 수줍은 연기를 한 탓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은 또 다른 살인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로 끝맺는 설정은 특이하고, 전작엔 흐르지 않는 재즈 선율이 나른하다.


 

후에 본 ‘태양은 가득히’는 좀 자조적인 심정에서 봤다. ‘뭐 그 내용이 그 내용 아니겠냐’ 싶은데도 꼭 봐야 할 것 같은 궁금증 때문에. 하지만 천만의 말씀. [올드보이]를 영화로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만화를 봤을 때처럼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통감해야 했다. [태양의 가득히]의 톰 리플리는 매력적이지만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예고된 잇다른 살인을 하면서도 시체 옆에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거리낌없이 친구의 애인을 유혹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태양은 가득히]의 톰은 인간적이라기보단 치밀하고 특이한 캐릭터에 속한다. 흥미로운 캐릭터였고 사건 전개도 공감이 갔다. 특히 수사관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장면이나 애인을 잃어버린 마르쥬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톰은 더할 바 없이 매력적이었다.(이건 순전히 알랭들롱의 조각상 같은 외모탓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주머니가 된 분들이 육십년대 왜 그토록 그에게 열광했는지 비로소 난 이해했다.)

비록 두 작품 다 주인공들의 살인은 우발적이었지만 감독의 의도는 그 동기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다. [리플리]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애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톰 역인 맷 데이먼은 디키의 연인으로 분한 마지 역의 기네스 펠트로보다 미남이고 매력적인 디키(주드 로)를 사랑하는 역할이다. 자신을 지루해하고 경멸하는 디크를 죽이고, 어쩔수 없이 하는 살인은 차라리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러니 [리플리]에서의 톰은 유약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방치하는 비열한이다. [리플리]에서 살인 동기는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다 좌절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태양은 가득히]는 부유함을 동경하는 자의 자조에 가깝다고 느꼈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하찮은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게 밥이든,색이든, 재물이든, 학문이든 간에. 사회 제도가 허락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추구할 것이고 또다른 [태양은 가득히]들은 끊임 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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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포로롱 > '릴리푸트'에의 동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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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아주 늦었다고 해야겠다. 텍스트는 지루하고도 흥미롭게, 날카롭고도 아름답게 읽혔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나단 스위프트의 환상을 떠올렸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에서의 좌절로 인한 도피에 기인한다. 18세기를 산 조나단 스위프트 또한 활자에서 그러한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즉 ‘걸리버’가 소인국이나 대인국, 라퓨타, 후이님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이나, 부조리한 현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즉 우화를 통해 스위프트는 당대의 영국사회의 부패를 직접 설파하지 않음으로써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난쏘공’과는 우화를 차용한 사실주의라는 점에서 공통의 맥락이겠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실 참여 문학은 특성상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어조로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구호적인 나열에 경도된다면 그 역시 문학이라는 옷을 스스로 벗어내는 꼴이니 적당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즉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시궁창을 시궁창 그대로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며, ‘시궁창에 꽃을 던지는 행위’에서도 나올 수 있다.

부박한 읽기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우선 눈에 들어왔던 점은 소설의 구조적인 면이었다. 들여다보면 전체는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입부에는 교사의 질문을 통한 전체 이야기의 암시가 있으며, 그 안에 난장이(앉은뱅이, 꼽추)의 우화가 들어 있다. 세부적으로 다시 난장이일가(난장이, 난장이 아내, 영수, 영호, 영희)의 이야기가, 또 그의 주변부에서 난장이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윤호, 지섭, 신애 엄마)과 난장이를 억압하는 환경(세상, 작게는 은강 그룹)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싸고 있는 카테고리는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처럼 경계를 지우려는 자와 경계를 허물어 보려는 자가 대치되어 있다.



현실이라는 우화


인물들은 서로가 낯설다. 난장이를 바라보는 거인이나 거인을 바라보는 난장이나 말이다. 난장이는 낡은 허드레 공구로 온갖 허드레 일을 한다. 하지만 현실을 개탄하기에 너무나 억압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나마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갈 집이 헐릴 때 그는 다만 중얼거린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고. 여러 번 밟히면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난장이의 아내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실의 어떤 점이 문제이며, 그 근원을 밝히기에는 자신의 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 수첩’을 읽는 아들 ‘영수’에게 왜 다른 공원들처럼 잠자코 공장을 다니지 못하느냐고 슬퍼하는 정 많은 소시민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장이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죽어서까지 지키고 싶은 희망이 있다. 그 곳은 감히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달나라이며, 머리카락 성좌이다. 소설은 터무니없이 긍정적이며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모순은 언제나 그랬듯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실낱같은 희망들은 죽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난장이 아버지의 이름이 김불이(金不伊)인 것이나 자식인 영수, 영호, 영희는 이름부터 일상성을 띈다. 그들은 인쇄판에 찍어야 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겨우 학습을 할 수 있으나 팬지를 만지작거리거나 기타를 퉁기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난장이처럼 그들은 권력의 바퀴에 끼어 무참히도 좌절된다. 그들은 결국 현대라는 기계의 나사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영희가 가진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향락의 피해자가 되는, 손 안에 있던 것조차도 빼앗겨 우는 현실의 창녀가 됨에 다름 아니다.

은강시는 잿더미가 된 철거된 행복동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며, 오히려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 있고, 검은 폐수로 바다가 오염되어 있다. 하지만 은강 그룹의 회장은 환경 문제가 자신의 공장에서 나온 오염원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더라도 그리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주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홉 시간 삼십 분’의 노동과 ‘한 시간 반의 시간 외 근무’가 있었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을 결성해 단결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범죄이다. 요컨대 그 어디에고 ‘분배’를 자진 허용하는 사용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묵묵히 받아들이며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대다수의 눈먼 근로자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권력 구조와 억압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은 소설에서나 현실에서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며 소설에서도 ‘김불이’의 선대의 삶이 노비로서 매매, 공출,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근대 사회에서 비록 노비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부당한 구속과 억압은 선대나 70년대에서 끝나 버리진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디 물가 상승과 발맞추어 서민들의 임금 인상이 제때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감히 생각건대 이는 근로자의 부당 해고와 생계비 문제를 이야기할 때 거인들은 소인들을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으려는 특수 계급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경제적 핍박은 배운 대로 즉 추상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소인들은 ‘정 억울하면 너도 돈 벌면 되지 않냐’는 식의 자조적인 논리를 펼밖에는 없는 건 아닐까.

행복의 부재이든, 금전의 부재이든 없는 자는 천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동경할 뿐이다. 그곳은 릴리푸트가 되든 달이 되든, 머리카락 성좌가 되든, 클라인 씨의 병 안이 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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