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포로롱 > '릴리푸트'에의 동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아주 늦었다고 해야겠다. 텍스트는 지루하고도 흥미롭게, 날카롭고도 아름답게 읽혔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나단 스위프트의 환상을 떠올렸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에서의 좌절로 인한 도피에 기인한다. 18세기를 산 조나단 스위프트 또한 활자에서 그러한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즉 ‘걸리버’가 소인국이나 대인국, 라퓨타, 후이님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이나, 부조리한 현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즉 우화를 통해 스위프트는 당대의 영국사회의 부패를 직접 설파하지 않음으로써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난쏘공’과는 우화를 차용한 사실주의라는 점에서 공통의 맥락이겠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실 참여 문학은 특성상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어조로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구호적인 나열에 경도된다면 그 역시 문학이라는 옷을 스스로 벗어내는 꼴이니 적당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즉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시궁창을 시궁창 그대로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며, ‘시궁창에 꽃을 던지는 행위’에서도 나올 수 있다.

부박한 읽기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우선 눈에 들어왔던 점은 소설의 구조적인 면이었다. 들여다보면 전체는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입부에는 교사의 질문을 통한 전체 이야기의 암시가 있으며, 그 안에 난장이(앉은뱅이, 꼽추)의 우화가 들어 있다. 세부적으로 다시 난장이일가(난장이, 난장이 아내, 영수, 영호, 영희)의 이야기가, 또 그의 주변부에서 난장이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윤호, 지섭, 신애 엄마)과 난장이를 억압하는 환경(세상, 작게는 은강 그룹)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싸고 있는 카테고리는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처럼 경계를 지우려는 자와 경계를 허물어 보려는 자가 대치되어 있다.



현실이라는 우화


인물들은 서로가 낯설다. 난장이를 바라보는 거인이나 거인을 바라보는 난장이나 말이다. 난장이는 낡은 허드레 공구로 온갖 허드레 일을 한다. 하지만 현실을 개탄하기에 너무나 억압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나마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갈 집이 헐릴 때 그는 다만 중얼거린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고. 여러 번 밟히면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난장이의 아내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실의 어떤 점이 문제이며, 그 근원을 밝히기에는 자신의 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 수첩’을 읽는 아들 ‘영수’에게 왜 다른 공원들처럼 잠자코 공장을 다니지 못하느냐고 슬퍼하는 정 많은 소시민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장이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죽어서까지 지키고 싶은 희망이 있다. 그 곳은 감히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달나라이며, 머리카락 성좌이다. 소설은 터무니없이 긍정적이며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모순은 언제나 그랬듯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실낱같은 희망들은 죽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난장이 아버지의 이름이 김불이(金不伊)인 것이나 자식인 영수, 영호, 영희는 이름부터 일상성을 띈다. 그들은 인쇄판에 찍어야 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겨우 학습을 할 수 있으나 팬지를 만지작거리거나 기타를 퉁기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난장이처럼 그들은 권력의 바퀴에 끼어 무참히도 좌절된다. 그들은 결국 현대라는 기계의 나사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영희가 가진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향락의 피해자가 되는, 손 안에 있던 것조차도 빼앗겨 우는 현실의 창녀가 됨에 다름 아니다.

은강시는 잿더미가 된 철거된 행복동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며, 오히려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 있고, 검은 폐수로 바다가 오염되어 있다. 하지만 은강 그룹의 회장은 환경 문제가 자신의 공장에서 나온 오염원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더라도 그리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주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홉 시간 삼십 분’의 노동과 ‘한 시간 반의 시간 외 근무’가 있었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을 결성해 단결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범죄이다. 요컨대 그 어디에고 ‘분배’를 자진 허용하는 사용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묵묵히 받아들이며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대다수의 눈먼 근로자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권력 구조와 억압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은 소설에서나 현실에서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며 소설에서도 ‘김불이’의 선대의 삶이 노비로서 매매, 공출,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근대 사회에서 비록 노비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부당한 구속과 억압은 선대나 70년대에서 끝나 버리진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디 물가 상승과 발맞추어 서민들의 임금 인상이 제때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감히 생각건대 이는 근로자의 부당 해고와 생계비 문제를 이야기할 때 거인들은 소인들을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으려는 특수 계급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경제적 핍박은 배운 대로 즉 추상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소인들은 ‘정 억울하면 너도 돈 벌면 되지 않냐’는 식의 자조적인 논리를 펼밖에는 없는 건 아닐까.

행복의 부재이든, 금전의 부재이든 없는 자는 천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동경할 뿐이다. 그곳은 릴리푸트가 되든 달이 되든, 머리카락 성좌가 되든, 클라인 씨의 병 안이 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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