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작에 펼쳐진 살인 현장이 중반을 넘도록 계속 떠오른다. 이 비극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까. 완벽하다고 표현한 루이자의 첫날, 그녀의 짙은 화장은 백인 피부와 작은 체구에 덜 눈에 띄었을까. 68세대 부모의 교육으로 폴은 루이자에게 주인 행세를 안 한, 아니 어쩌면 너무 했을까. 이토록 불안한 여자, 하지만 제대로 자신의 처지를 꾸밀 악의(!)도 지능도 없는 이 여자가 ‘덤으로’ 해주는 집안일에 미리암은 경계심을 풀었을까. 경제 차이, 교육 차이, 인종 차이를 조금씩 비틀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그래도 인물들 사이를 오가며 각자의 공포와 불안함을 묘사하는 방식은 산만하다. 그만큼 어느 누구에게도 공감 혹은 동정을 주고싶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는데... 이제 루이자의 기이함이 극에 달하는 ‘닭뼈’ 장면이 나온다. 아 무서워. 책에 자주 나오는 무화과를 하나 씻어 껍질까지 먹었다.

‘나의 빛나는 친구’ 에서 처럼 ‘사랑’으로 포장했지만 아이들은 이 소설에서 어른들의 갈등을 위해 용이한 장치로만 쓰인다. 경단녀 엄마 미리암의 좌절도 루이자의 극도의 고독도 피상적이다. 프랑스 보육시스템을 칭송한 목수정 작가 책( 이 소설과는 영 다른 ‘완벽한’ 프랑스 이야기를 한다)과 아이를 구한 불법체류자 청년이 프랑스 영주권을 받은 뉴스가 생각났다. 성경 속의 미리암이 얼마나 슬기롭게 죽을뻔한 동생 모세를 위해 친어머니를 보모로 추천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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