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영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코맥 맥카시의 소설들은 사실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는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대사와 지문은 섞여 있고, 인물들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들은 독자에게 일정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마찬가지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며 이동할 때마다 맥카시는 흐름을 잘라 버린다. 거두절미하고 새로 도착한 장소를 묘사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범행 경로를 추적하는 사진 기록이다. 두 장의 사진 사이에 있는 흐름은 눈에 드러나지 않고 그저 '느껴진다.'
이 불친절한 방법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잘 어울린다. 등장인물들의 추적/도망이 고립된 장소들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옮겨 다니는 모텔들은 비록 현대의 마을이나 도시 안에 있더라도 (맥카시의 다른 소설들의 배경인) 황무지/서부의 야생만큼이나 고립된 장소다. '커뮤니티가 없는 방랑자들의 집합소'인 모텔은 한 야수로 인해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변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야수(안톤 쉬거)가 이 문명 세계를 서부 개척시대로 단번에 퇴화시켜버린다.
아무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는 '인간적인 이해'라는 범주 밖에 있다. 때문에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에게서 도망치는 '인간'과 그를 쫓는 '인간'들 모두 무기력함에 파묻힌다. 보안관의 늘어나는 독백이 그 증거다. 처음에 성실하게 세계를 관찰하던 그는 점점 자신 안으로 빠져든다. 독백 혹은 대사가 서술/묘사(세상을 관찰하기)를 잠식한다. 그가 이해하던 세상이 안톤 쉬거로 인해 서서히 붕괴하는 것이다. 결국 보안관은 이 세계가 사실은 이해 불가능한 곳이라고 고백하고야 만다. 그때 보안관의 시야에서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묘사는 없고) 그의 독백만이 그 자리를 메꾼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부정당하는 순간, 보안관에서 한 무기력한 노인으로 전락한 남자의 독백.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계가 <로드>에 등장하는 대재앙의 지옥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불친절한(?) 전개를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의 순간들 뿐이다. 나머지는 사족이므로 지워졌다(고 생각한다).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코엔 형제의 영화도 원작에 뒤지지 않는 걸작이다. 접근성으로 따지자면 영화가 더 쉽고 볼거리가 많다. 원작에서 거의 야수에 가까운 살인마 안톤 쉬거는 영화 악역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어 관객들을 압도한다. 액션 씬도 짜임새가 아주 좋으며, 액션이 폭발하기 전후의 긴장감도 잘 살려 놓았다(사실 코엔 형제의 주특기다). 이 액션 장면들이 각각의 작은 하이라이트가 되어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테렌스 말릭의 <황무지> 비슷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소수는 열광하고, 대다수의 관객은 아무 관심도 없고(혹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결코 아카데미 상은 탈 수 없는 영화 말이다.
코엔 형제는 원작의 메시지를 전부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말이 필요없고, 직접 보시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처음부터 대사가 거의 없다. 그들 모두가 동물처럼 움직이고 침묵 속에서 힘을 드러낸다. 실패에 가까워질수록 필사적인 도망, 무기력한 추적, 한 야수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의 압력(동전 하나로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모두 아무런 말이 필요없다. 소설을 무용이나 시로 풀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의 액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울 정도로 리듬감이 있는, 사람 죽이는 장면들.
종합하자면, 둘 다 좋다. 굳이 스타일을 나누자면 원작이 에스프레소, 영화는 아메리카노 정도 되겠다.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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