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허밍버드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김치찌개에 다진 마늘 한 숟갈을 넣으면서 내일은 꼭 오일 파스타를 해 먹으마 다짐했다. 엄마가 항상 마늘을 찧어서 비닐봉투에 납작하게 펴서 돌돌 말린 걸 냉동상태로 주시는 바람에, 결혼해서 지금껏 마늘을 찧어본 적이 없다. 쓰던 마늘이 다 떨어져서 엄마가 준 마늘을 녹이면서 찧었을 때의 색깔이 그대로 살아나는 걸 보며 단박에 오일 파스타가 생각났다. 원래는 여기에 샐러드 채소와 토마토를 잔뜩 얹어서 먹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마늘만 넣어서 먹어보기로 했다. 좀 뜸했던 파스타를 다시 떠올린 건 온통 먹음직스러운 파스타 이야기만 해 대는 이 책 때문이다.


  스파게티라곤 오로지 토마토소스만 고집하고, 피클이 맛있다는 이유로 스파게티를 먹으로 갈 만큼 무지했던 내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식당에 가서 먹으면 양도 적고 비싸고 맛도 각양각색이라 그럴 바엔 푸짐하게 해서 집에서 먹자 싶었다. 완제품 토마토소스를 그냥 면에다 비비기만 했으니 스스로도 요리가 아니라 조리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먹는 스파게티 맛이 나름 괜찮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다 TV에서 알려준 레시피를 따라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보았고, 거기다 채소와 토마토를 얹은 후 파마산 치즈를 잔뜩 부려 먹는 걸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달랑 오일 파스타 하나만 만들어 먹었을 뿐인데 ‘혹시 내가 이탈리아 요리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나?’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라는 것도 최근에 알았으면서 어이없는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레시피가 담긴 이 책을 호기롭게 꺼내 읽으면서 적어도 내가 더 만들어 볼 수 있는 파스타가 있겠지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세계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단순하게 이탈리아 곳곳의 파스타를 설명하고 알려주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뛴 생생함이 느껴졌다. 그 생생함에는 이방인의 시선에서 보는 이탈리아와 파스타의 이야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럼에도 저자가 정말 파스타를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던 건 이탈리아의 광활한 파스타 세계를 재미있게 안내해 준 이유가 컸다.


  자칫 따분할 수도 있는 파스타의 유래나 종류, 파스타에 관한 궁금증과 요리법에 관한 이야기도 저자의 에피소드와 함께 버무려지니 여행기를 읽는 것 같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파스타 이야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지니 그럴 수밖에!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를 먹을 때 피클이 없다는 생활밀착형 정보도 그렇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파스타는 미국식이거나 한국인 입맛에 맞춰 변형되었으며, 정통 이탈리아식은 맛도 모양도 많이 생소해 먹기 힘들 수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종류의 파스타를 따라가며 그 맛을 충실히 알리려 노력한다.

 

  나에게는 끼니와 끼니 사이에 출출할 때 가끔 먹는 파스타가 이탈리아인의 삶에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지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면과 소스로 치부해 버리기엔 그 안에 깃든 손길과 세월과 재료를 길러냈을 땅의 생명이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기분이다. ‘음식은 추억과 기억의 매개체인 게 분명하다.(61쪽)’는 말처럼 그 요리를 즐긴 사람만큼 수많은 추억과 기억을 저장하고 생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단순한 음식으로만 보게 하지 않았다.


  책을 덮고나니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를 꾹꾹 눌러 밟은 기분이 든다. 직접 맛본 게 하나도 없으면서도 모두 맛본 것 같은 착각이 일고, 지역 특색이 드러나는 다양한 파스타를 보면서 어릴 적 내가 먹고 자란 엄마의 음식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시골에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먹었던 음식들이 빤했지만 추억을 담고 있어서인지 종종 아련해진다.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갈 때면 가마솥에서 바로 긁어내 공처럼 말아 손에 쥐어주던 누룽지, 떡을 하는 날 가마솥 옆에서 밥그릇을 들고 있으면 한 주걱씩 퍼주던 쫀득한 밥, 유과 반죽이 아랫목에서 부풀어지고 있으면 엄마 몰래 훔쳐 먹고 간격을 맞춰놨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이름모를 손맛으로 버무려진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랐다. 그런 음식을 먹었기에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자랐나 보다. 문득, 나를 이렇게 키워준 엄마와 한 번도 같이 먹어보지 못한 파스타를 먹어보고 싶어진다. 이건 꼭 실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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