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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비는 안오지만 장마의 영향 때문인지 뿌연 안개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
통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물에 잠긴 느낌이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안개로 뒤덮인 세계가 바다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저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해도 잔물결 하나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미미함.
그 미미함 가운데서도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들지 않는다.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답답함과 순간적인 두려움만 들 뿐.
이렇게 뿌연 세상은 사라짐에 있어서도 관능적일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 화창한 여름의 바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던 바다에서 순식간의 파도가 휩쓸고 가버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꿈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어릴적 추억이 깃든 바다를 찾은 맥스는 그 답을 얻기 위해서 온게 아니지만 바다로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있는 추억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부인을 잃고 상실감에 모든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맥스에게 있어서는.
맥스는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은 하숙집 시더스에 머물면서 부인의 투병생활과 바닷가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의 추억, 자신의 현실을 모조리 그려낸다.
그런 고백은 몽롱하게, 혼란스럽게, 진부하게 펼쳐지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레이스 가족은 특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추억만으로도 부인을 잃은 상실감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책의 마지막에서는 부인의 죽음과 비슷한 잃어버림을 안겨 줄 뿐이다.
분명 그레이스 가족에 대한 추억으로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스 가족의 결말은 참담했고 어린 맥스와 현재의 맥스는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맥스 자신이 잘 앎에도 다시 이 바닷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인을 잃어버린 상실감속에 그레이스 가족을 덩달아 떠나 보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낱낱이 꺼냄으로써 모든 것을 드러내려 했을까. 자신의 삶 전부를 탈탈 털어 낸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맥스가 바닷가를 다시 찾은 이유보다 맥스가 꺼내놓는 그 여름과 그레이스 가족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중점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저자의 문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해설가도 말했지만 이 책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비교적 보통 양인 260페이지의 책을 얼마나 오랜시간 읽었는지 맥스의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책의 초반에는 너무나 진부해서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고 묘사는 뛰어났지만 읽기는 수월치 않다고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린게 사실이였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읽기에서 뛰어난 묘사를 발견해서인지 지루하다고 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나를 자극하는 분위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극은 결국 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저자의 문체와 분위기에 빠져 몰입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묘사가 자아내는 인물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이나 배경이 툭 불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며 그림 같은 풍경과 잔잔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어질 듯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것이 단절을 의미한다 생각할 정도로 초반에는 저자의 문체가 낯설었으나 자연스레 적응해 가는 내가 신기했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다기 보다는 저자가 그려내는 분위기에 공감을 더해 간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맥스를 통해서 과거와 상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분위기에 끌려가다 보니 단순히 그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미하게나마 맥스에게 부여될 새로운 생활(딸과 사윗감이 될 청년과의 결합된 삶)은 좌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맥스의 새로운 생활에 무언가를 온전히 기대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과거로 인한 상실과 좌절만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 아픈 과거이기는 하나 그에겐 소중하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던 재료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료가 기다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기쁨과 사랑과 환희가 더 넘치는 삶이 되길 바래본다. 그래서 드 넓은 바다를 보더라도 자책감에, 상실감에 몸부림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감사함을 갖을 수 있는 마음을 갖길 바란다.
모르지 않는가. 새로운 신들이 다시 돌아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