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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8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증명 하나의 속성의 실체[하나의 같은 속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이며(정리5에 의해), 그것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정리7에 의해).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하지만 유한하게 실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정의2에 의해) 이 경우 그것은 동일한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이것 역시 필연적으로 실존해야하는 것이다(정리7에 의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속성의 두 실체[같은 속성을 지닌 두 실체]가 실존하게 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정리5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무한하게 실존한다.

 

*** 정리81차적 논증이 일단 끝이 나는 시점.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정의2 유한이라는 정의 자체는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레스가 존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받아들여 실체가 유한하다고 가정한다면,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은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정리5와 함께 할 수 없다!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유한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

정리8의 증명에서 말하듯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 + 정의6에서 말하듯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곧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 -> 이 두 개를 합쳐보면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 -> (그렇다면)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는 무한하게 많은 실체 -> :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로 구성된 인가! ->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하는 것인가. (정리8에서 이미 주어가 모든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인 어떤 것을 가지고 모두라고는 표현하지 않으니, 모든에는 복수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인데,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대의 가짓수인가)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의9-15에서 스피노자가 논증하려는 것들이다

 

주석1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은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절대적 긍정이기 때문에, 단지 정리7만으로부터 모든 실체는 무한해야 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리8은 정리7에서 바로따라 나온다.

-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한무한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유한함: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 무한함: 어떤 본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실체는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 본성이 실존이기 때문에. 항상 언제든 실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정리7은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 반면에 실존에 대한 어떤 것이 유한하다”=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지 않는다 = 실존에 대한 부분정 부정. , 실존이 자기원인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만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지금 나는 실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평생 실존할 것은 아니다. 생일 이전에 나는 실존하지 않았고, 사망일 이후에는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게 실존에 대한 부분적 긍정이고 부분정 부정이다. 그러나 무한하다는 말은 절대적 긍정이고, 그은 생일이나 사망일 같은 게 없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자기원인적=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CF 필연적이거나 제약되어있는 것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실존한다는 이야기다.

- 예를 들면 내가 생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어딘가에 고용관계로 들어가서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동안 정해진 방식대로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

 

*** 정리8에서는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대립되고 서로 상응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한 것은 자유롭고, 유한한 것은 제약적이고. 지금은 이렇게 이해해도 문제가 없는데, 나중에 인간학 3부에 가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자유로운 것은 무한한 것밖에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한한 것은 자유롭지 못하고 제약적이다도 따라 나온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면,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 스피노자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비판을 매우 많이 받았다. 스피노자 당대에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피에르 벨 Pierre Bayle(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 같은 사람. 나름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Essai de Theodice Theodicy>. Theodicy: 라이프니츠가 만들어낸 신조어. 그리스 theos + dike 이론. 신의 정의를 다룬 이론. 신은 정의롭고 자비로우니 절대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학문. 예전에는 신정론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변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지한 분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세상에 너무나 많은 악이 창궐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핍박받거나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는 일들이 무수히 많고,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 재해도 많고. 그러니 사람들이 도대체 신이라는 게 있는가. 신이 정의롭다고 하는데 정의로운 분이 맞는가. 신이 전지전능하고 자비롭다는데 대체 왜 인간에게 끊임없이 재앙이 닥치는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기독교를 매우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이론이기도 하다. 18세기 철학의 아주 중요한 화두 또한 저것이었다. 저 주제는 신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치철학, 은폐된 정치철학이다. 라이프니츠가 무려 800페이지나 되는 글을 썼는데 이 책에 나오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피에르 벨이다.

- 피에르 벨이 아주 방대한 책을 하나 썼는데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사전>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서양 사상사에서 아주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들에 관한 사전을 쓴 것이다. 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백과사전(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실물로 본 적이 있다). 여기에 50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스피노자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서 바로 스피노자의 이런 측면을 비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없고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여지도 없다는 것.

- 하지만 나중에 3부에 가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지만 사실 스피노자는 유한하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다. 정리8에서 유한한 것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긍정을 함축한다. 그러니까 유한자에게는 실존의 긍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게, 곧 부분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실존의 부분적 긍정이 가진 인간학적 윤리적 함의를 포함, 부분적 부정/ 부분정 긍정에 대해 1부 정리 2836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 주석2는 정리7에 대한 부연설명. 상당히 재미있는 주석이다.

*** 실체와 변양을 혼동하는 것이 정리7의 증명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주된 이유다. 자기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사람들이 실체라는 것을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자연적인 실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물들)처럼 생각하니까 자꾸 혼동한다(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로 생각하는).

- 변양과 실체의 핵심적인 차이는 시초를 지니는가여부이다.

시초를 지니는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생산되는가.

- 양자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변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말하는 것은 사람의 고유한 특성인데 나무도 말하는 것처럼 형상이 변형된다고 상상하는. 만화동화적 상상력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계속 서양 철학자들이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는 것이 모든 사물에게는 고유한 포르마(형상 form)가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포르마, 개에게는 개의 포르마가 있다. 우리가 본성이라는 말을 쓸 때 보통 저 포르마를 생각한다. 사람의 포르마와 개의 포르마는 섞이고 교환되지 않는다. 섞일 수 없다. 그런데 동화적인 상상력에서는 이걸 섞어 놓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메타모르포시스. 이 폼이 저 폼으로 바뀌는. 호박이 마차가 되고 손오공이 머리카락으로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런 것들. //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은 긍휼하고 사랑이 넘치고 분노했다! 이런 것들. 신과 인간을 혼동하고 인간이 가진 것을 투사해서 전가하는 것. projection.

 

*** 정리7은 공리 또는 공통통념 (common notion: 유클리드기하학 원론. 1+1=2, 이런 게 노치오 커뮤니스. 여기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노치오 커뮤니스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명석판명한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리7의 참됨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지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서만 존재한다그러니까 A라는 사람이 현행적으로(actually) 없다고 해도 우리는 지성 바깥에서(in reality) 다른 사람 B, C, D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 “3.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그것이 실존하게 만드는 어떤 원인이 존재해야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3번 주의사항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무한한 실재의 원인: 그것의 본성, 2) 유한한 실재의 원인: 어떤 외부 원인(만약 실존하지 않으면 실존하지 않는 외부 원인이 존재한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독특한 주장인데 정리11의 증명게 가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정리8 증명의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와도 통하는 말)

 

*** 인간 본성의 정의 안에는 거기 왜 20명의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담겨있지 않다. 참된 정의는 실재의 본성만을 표현할 뿐, 그러한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같은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여부는 실재의 본성에 따라오지 않고, 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숫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는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실체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실체는 오직 하나만)

 

*** ”어떤 사물에 대해 숫자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은 사물이 유한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앞에서부터 계속 무한에 대해서 숫자를 써오고 있었다. 가령 우리는 속성에 대해 숫자를 쓰고 있다. ‘속성이 하나가 있다, 무한하게 있다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서 실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인 것처럼, 두 개인 것처럼, 여러 개인 것처럼.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스피노자가 주석2에서 했던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다. ‘스무 개의 사람이 있다, 삼각형이 세 개 있다, 네 개 있다이런 것들이 이미 그것들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왜 무한한 것에 대해 숫자를 계속 말하고 있었는가. 속성이나 실체는 무한한 것이고 외부원인을 갖지 않는 것인데 왜 우리는 숫자를 말하는가.

 

1) 우리가 실체나 속성 같은 무한자에 대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 혹은 언어상의 한계 때문이다. 무한자에 대해 사실 숫자나 언어를 써서는 안 되는데 우리는 숫자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2)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하면. 정말 속성이라는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가.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은 서로 다른 별개의 속성인데 우리가 거기에 두 개의 속성’ ‘3의 속성이렇게 숫자를 쓰는 게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그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본성, 속성을 전제로 한다고 정의2에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해서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넘버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한 것에 있어서만이다. 그런데 속성이라는 건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무한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걸 넘버링 할 수 없다. 속성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양태 하나, 양태 둘, 이렇게. 하지만 속성 자체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냥 편의상 그걸 쓰는 것이지, 사실 불가능하다. 스피노자 정의에 따르면 일원론이나 이원론, 모니즘이나 듀얼리즘 같은 표현 또한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이 또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방식들인데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수적인 값을 매겨서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체와 변용을 혼동하는 것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사실 스피노자는 많다는 표현도 거의 안 쓴다. 그냥 무한하다는 표현을 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 이렇게 정리8까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에 대해 비판. 이제부터는 실체는 무한하냐. 몇 개냐에 대한 답들이 나올 것이다 >>>>

 

정리9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증명 이는 정의4로부터 명백하다

 

*** 스피노자가 명백하다고 했지만 풀어서 보자. 정리9가 두 개의 명제를 하나로 섞은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두 명제. 1)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들, 곧 실재성 내지 완전성들을 갖게 된다. + 2)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실재성 내지 완전성이다.

 

- 정리9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관점에서 1)우리가 어떤 사물의 특성을 잘 알면 알수록 그 사물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인식론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존재론적 원리도 다시 표현해서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존재를 지닐수록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 데카르트 철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위계질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이 무 nothing(아무런 특성도 갖지 않는다. 아무런 완전성 실재성도 없다) -> 다양한 실재성 내지 완전성을 지닌 존재자들 -> (모든 완전성 보유).

-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신은 불가지한 존재다. 그리고 신은 불가지한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아주 약간만 알고 있을 뿐, 신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신은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 하지만 스피노자의 주장: 신은 인식가능한 존재. 초월적이지 않다. 우리 인간이 갖는 범주와 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범주는 근본적으로 같다. 우리 인간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사이에 거리가 없다.

 

- , 정리9의 두 가지 명제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했지만,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신에게까지 적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에게도 적용했다. 이게 두 사람의 큰 차이점.

 

*** 주의할 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원리를 받아들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쓰고 있지만, 데카르트의 원리에 담겨있는 존재론적 관점과 위계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정리8까지 스피노자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고 그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고, 정리 11, 15에 가서 신은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지 않고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는 실체, 이 두 가지 사이에 엄청난 양의 차이가 생긴다. 등급으로 따지면 하나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등급이 엄청 낮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 두 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 100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실체의 위계질서를 상상해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말하는 실체, 정리11과 정리15에서 말하는 실체는 다 같은 실체인데, 하나의 실체를 논증의 전개과정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정리9에서 말하는 것은 속성의 양과 더 많은 특성의 양을 추론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지, 우주의 객관적 질서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 스피노자가 존재의 양(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과 특성 내지 완전성의 양(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 내지 완전성을 갖는다”) 사이의 필연적인 대응 관계를 필연적인 원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인 신의 본성을 조금 더 정확하게, 그리고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하는 논증절차이지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이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플로티노스 Plotinos에서 유래한 신플라톤주의적 관점.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국 신플라톤주의의 새로운 어장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었다(현실 자체에 상이한 등급을 매기는 점에 있어서). 헤겔도 그렇게 읽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제 철학과는 차이가 있는 관점이다. 신플라톤주의처럼 등급이 매겨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의 논거는 정리15까지 가면 나올 것이다.

 

*** 스피노자는 초기 저작인 <소론> 121절 주석에서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그가 무엇인지 증명할 차례이다. 말하거니와 그는 모든 또는 무한한 속성들(이 속성들 각자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게 완전하다)이 서술되는[술어로 귀속되는] 존재이다.” (이 점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무는 아무런 속성들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전체는 모든 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는 그것이 무이기 때문에(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기 때문에 속성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이 더 많은 어떤 것일수록 그것은 더 많은 속성을 가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신은 가장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이며 전체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무한하고 완전한 모든 속성들을 가져야 한다.“ -> 존재의 정도와 실재성, 완전성의 비례 -> 더 많은 실존의 역량을 갖는 것

 

*** 정리9에 대한 이 표현. 존재관계와 실재성의 양적 비례관계. 정리8까지에서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고 했는데, ”여러 개의 속성을 가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정의가 깨어진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가 있다는 말에서. , 정의8에서부터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까지 이르기위한 논증의 절차에서 정리9는 바로 중간단계인 것이다. 중간단계를 거친 이유는, 당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철학은 데카르트 철학이었고, 그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넘어서고자 하는 스피노자의 논증전략에 있다. 정리9가 바로 그 논증전략의 중심에 있는 것. 즉 정리9에서 정리10, 11, 12로 가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정리9만 딱 떼어놓고 스피노자 철학을 위계관계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논쟁에서 중간 맥락 하나를 딱 떼어놓고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주장했다고 우기는 사람이랑 같다. 헤겔 여기서 또 그랬어ㅋㅋ)

 

정리10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증명 왜냐하면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며(정의4에 의해), 따라서 (정의3에 의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Q.E.D

 

*** 정리10에서 초점이 되는 문구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전개되는 논증과정에서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하는 것으로 정립된 것은 실체뿐이다(정의3). 따라서 정리10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증명에서 정의4에 의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의4에서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정의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실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속성도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더 문제적인 문구는 따로 있다.

 

***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 참 이상한 말이다. ? 정리8까지만해도 하나의 속성에는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고 해왔는데, 정리9에서 많은속성 운운하더니 갑자기 정리10에서는 아예 주어로 하나의 실체에 복수의 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당연한 듯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시몬 드 프리스가 편지를 보낸 것도 정리10의 저 표현 때문이다. 왜 갑자기 저런 표현을 쓰지? 증명도 안 하고? (“하나의 속성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고 해놓고, 그럼 2개의 속성에는 실체도 2개 존재해야하는데, 복수의 속성에는 복수의 실체가 존재해야하는데 스피노자 선생께서는 왜 그런 결론을 안 내리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자,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지점.

 

*** 게다가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대뜸 말하고 있다. A) ”속한다“= 전체를 이루는 어떤 부분이라는 말인데, 이 표현을 따르면 속성이 실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B)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속성은 궁극적이고 상위개념이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속성은 실체에 포괄될 수도 종속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AB는 모순 아닌가? 주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술어에서 부정하는 것 아닌가.

 

A: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에 속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의 한 부분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아마 실체의 각 속성이 담고 있는 뉘앙스일 것이다. “속성은 실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다의 뉘앙스. 실체속성. 실체에 속하는 실체의 속성. 속성이 실체의 부분이라면 속성과 실체 사이에 위계관계가 있는 것이다. 속성들은 실체에 종속되는 것이고, 실체는 속성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B: - 하지만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은, 속성은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위의 어떤 궁극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실체도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무언가로 환원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 무언가의 결과일 수 없다 =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긍극적이다.

- 그리고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로 인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이 속성들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 그러니까 각자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실체의 각 속성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 무관한 것으로, 각자 자율적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며, 각각의 속성은 저마다 독립적인 실체를 이룬다는 결론이 나온다.

 

-> AB의 논리적 충돌. BA가 되었을 때 각 속성들은 실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속성들은 실체의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는 거 아닌가??

-> 이런 점에서 매우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다. ‘공통적으로함께 속해있지만, 각자 또 자율적/독립적인. 그게 바로 실체와 속성의 관계라는 말이다.

 

* 시몬 드 프리스와의 편지(편지에서 정리8 주석3은 정리10의 주석에 해당)

- 우리는 각각의 존재자를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내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존재자에게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존재자에게 더 많은 속성을 귀속시킬수록 나는 그 존재자에게 더 많은 실존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 A: 실체의 본성에는 그것이 지닌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그 본성상 실체에 속하는 각각의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실체의 본성이다. 실체에 함께 속한다고 해서 그게 실체의 부분을 내포한다거나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각 속성들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 B: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으며: 항상영원히. 함께 존재해왔다는 이야기는 속성들이 집합적으로 속해있다. 사유속성이 실체로 들어왔고 그 다음에 연장속성이 들어왔고 그 다음에 제3의 속성이 들어왔고 이런 게 아니다. 아예 애초부터 속성들은 실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A의 논점과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속성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태초부터 실체에 속해왔다는 이야기니까. 주어와 술어 사이의 충돌의 여지.

- C: 그 중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AB사이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 C.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서 생성될 수 없다 = 그들이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이면서 동등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각각의 속성이 속성으로서 성립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속성으로서의 논리적인 자율성 독립성 동등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속성들 각자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 (정의4나 정의6의 표현을 빌면)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속성이 각자 논리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집합적으로 표현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그게 속성들 각자가 갖고 있는 논리적 자립성 자율성을 성립하게 만든다.

 

*** 삼각형을 실체라고, 삼각형의 각 변이나 세 각을 속성이라고 생각해보자.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변은 삼각형을 구성하지 않는 이상 속성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세 개의 변이 한꺼번에 삼각형에 속하기 때문에 각각의 변이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의 변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도 없다. 동시에 삼각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삼각형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성질을 우리가 스피노자식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동시에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표현함으로써 삼각형이라는 실체의 본질과, 삼각형의 변이라는 자신의 본질, 자신의 정체성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각의 변이 종속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 자율성을 갖고 있다. 스피노자가 정리10의 주석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다. 각각의 속성이 논리적인 자율성과 동등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집합적으로 함께 영원히 항상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표현해왔다는 사실. 까다롭지만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다.

 

*** 하나의 속성이 실체를 표현하는 데에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 속성은 이미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속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한다. 사물 하나만으로도. 어려운 점은 뭐냐면, 그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속성과 함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각각의 속성이 하나만으로도 자율적으로 독립적이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이든 연장속성이든 그 속성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이 온전히 표현된다. 그런데 각각의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남김없이 표현하기 위한 조건, 그와 동시에 성립하게 되는 논점은, 그 속성이 동시에 다른 속성들과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각각의 속성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 왜 스피노자가 정의4에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라고 이야기했을까. 지성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속성 아래서 인식하는 것이 지성이다. 속성을 초월해서 인긱하는 게 지성이 아니라 어떤 속성을 따라서 인식하는 게 지성인 것이다. “지성에 의해 지각된다는 말 자체에 함축해있는 뜻은 속성을 distribute(정확하게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분배적으로? 분포적으로?) 사고한다이다. 속성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지성은 항상 어떤 속성에 따라 인식을 하니까. 사유속성에 따라서든, 연장속성에 따라서든. 스피노자는 그걸 대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성이 개별적으로 자율적으로 성립하는 것과 집합적으로 실체에 속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대립이나 배제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가 집합적으로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거나 구성한다는 것이, 각자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성립하기 위한 바로 그 조건이다. 역으로, 또 속성 각자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이것들이 집합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기 위한 역의 조건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 스피노자가 아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건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내셔널리즘-국민과 외국인, 인종문제, 각각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막스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관계고 나머지는 종속적인 문제다라고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사실 절대 그렇지 않다. 각각의 쟁점들이 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런데 그걸 다 각각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라고 선을 긋고 나누어버리면 진정한 사회적 투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면서도 뭔가에 함께 속해야하고, 또 함께 속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의미에서보면 각자가 자율적인 관계나 쟁점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런 게 지금 존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존재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 실체-속성 관계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게 한 가지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풍부하고,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가져다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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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개별자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소크라테스. 책상. 이런 것들. 문법적/논리학적으로 보면 실체는 주어고, 속성은 술어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보통 실체와 속성에 대해 저런 문장구조로 파악하는데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실체 개념과 다르다. 스피노자에게 저 주어들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또는 변용이다. ?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하고 다른 것에 의해 소멸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정리5까지에서 했던 이야기.

- 1)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하는 실체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동일한 것이냐/ 2) 우주에는 속성이 존재하는 만큼 여러 실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면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느냐. <- 정리15까지 스피노자가 논증의 목표로 삼는 것.

 

*

강의록3 스피노자의 답장.

- 정의2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res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 실재 res/thing : res의 범위가 thing보다 훨씬 넓다. 실체도 res 변용도 res.

<-> 반대되는 말: . 아무 것도 아닌.

동일한 본성”, “자신의 유가 가리키는 말은 속성이다

1) 연장 corpus : 물체(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2) 사유 cogotation : 관념, 이데아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도 하나의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도 상당히 특이한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정신- 어떤 틀/ 관념- 그 정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아이템이라고, 정신-관념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정신도 이데아다. 그것은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훨씬 역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처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신, 감정, 정서도 관념이라고 생각함 (물론 3부에서는 정서와 관념을 뚜렷하게 나누지만 어쨌든 넓은 의미에서보면)

 

- “누군가가 연장은 연장이 아니라 사고에 의해 한정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연장인 한에서만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요?” : 1) 사유라는 속성이 연장 속성에 경계를 지어 한정을 해준다고 해서, 연장이 유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2)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고(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그걸 한정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인데 사유가 한정하니까) 3) 하지만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종류 밖에서는 사유에 한정되니까 유한하나 종류 안에서는 무한하다)

 

*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무한지성. 신의 지성. 인간의 지성은 무한지성의 일부이며, 이 무한지성은 사유속성에 포함된다 ->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사유속성의 특별한 지위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에 비해 외연이 넓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게 무한지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 왜 스피노자가 우리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냐면,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해있는 양태니까. 우리가 또 다른 양태를 갖고 있다고 했다면 아마 그 양태가 속해있는 다른 속성도 인식할 수 있었겠죠.

*** 그러면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인식할 수 있는데 왜 스피노자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가. 스피노자가 1부 정리6에서 신을 정리하면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고 이야기한다. 근데 만약 속성이라는 것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사유/연장 두 개만 있다고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아니라 사유/연장 두 개만 있는 실체가 된다. 그러면 다시 어떤 결과가 나오면 신 바깥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면 신 바깥에 신보다 더 포괄적인 어떤 초월자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완전한 인식,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제한적인 인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 볼에서 배속 우주가 생기듯이 신 바깥에 또 뭐가 있을 것이고, 그 바깥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고... 이런 세계가 펼쳐져버린다. 스피노자가 신이란 것을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 바깥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신은 궁극의 우주라는 것이다. 바깥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물리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신의 본질이다라고 이야기할 때만 우리가 자연의 내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질문: 그 이야기는 자기 주장의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어떤 것을 가정을 해놓고 그게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자기도 모르는 거 아닌지... :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웃음) 근데 나중에 2부 정리7에 가서 살펴 볼 텐데 우리가 하나의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른 속성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나 연장 중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를 인식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동일한 어떤 실체에 속한다. 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두 개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다섯 개가 되든 무하하게 많든 상관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인식하는 것하고 두 개의 속성의 공통된 질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마침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속성을 인지할 수 있고, 그래서 비교/대조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에티카>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포인트구나. 2부 정리7 평행론도 그렇고 이 두 가지속성이 기반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론 나는 여전히 공통 질서공통 구조같은, 어떤 공통을 뽑아내기에는- 심지어 뽑아낸 이후 그걸로 이론 하나를 구축해내기에는- “두 가지요소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적어도 열 개가 아니면 공통을 말할 수 없다...)

 

*

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증명 자연 안에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앞의 정리에 의해). (정리2에 의해) 서로 공통적인 것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리3에 의해)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곧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 그러니까 한 속성에 한 실체만 남게 된다. 다른 속성에는 또 다른 한 실체가 남게 되겠죠. 그런데 정리2에서 공통적인 것이 없으면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서 어떤 연관도 있을 수 없고, 그건 생산도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더 쉽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실체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실체의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근데 정리6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각각의 실체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있잖아? 이때의 신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죠. 실체보다 더 상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따름정리를 붙였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공리1과 정의35에 의해 명백한 것처럼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위의 정리에 의해). 따라서 실체는 절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정리6과 따름정리의 차이: 정리6에서는 실체와 실체와의 관계. 따름정리에서는 실체라고 안 하고 다른 것에 의해라고 되어있다. 다른 것이라는 표현이 훨씬 막연하고 포괄적이다. 여기에는 실체도 포함될 수 있고, 변용, 양태일 수도 있고, 신 같은 가상의 초월자일 수도 있고. 그래서 스피노자는 실체라는 말 대신에 의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했다.

다른 증명 이는 모순을 통한 귀류법에 의해 좀 더 쉽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많은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된다면, 그것(실체)에 대한 인식은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공리4에 의해) 그렇게 되면(정의 3에 의해)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의: 창조론을 부정! 기독교 신학의 창조개념이 실체들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증명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앞의 정리의 따름 정리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 (정의1에 의해)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할 것이다. 또는 그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다른 것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자기원인일 것이다. ,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실체!

 

*** 2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1) 아까 정리6에서도 그랬지만 중세유대신학이나 스콜라신학에 기반을 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반론이 제기된 부분은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에서, “따라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데에서 곧바로 자기원인이라는 귀결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반론.

- 중세 최고의 유대 사상가 중 한명인 벤 마이모(유대식 표기), 마이모니데스(라틴어식 표기)에 따르면, “그 자신의 본질에 관해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 )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원인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

-“신은 아무런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식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방식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기반을 초월한다. = 그러니 우리는 신에 대해 원인을 물을 수 없다. 신이란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이면서 자신이 원인 그 자체인,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한 존재다.

- 그러나 스피노자가 신, 실체를 자기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실체도 원인이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신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말. 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과관계 지식의 범위 안에 신의 작용도 들어온다는 의미. 신은 불가지하거나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인식 범위 안에 있으며, 신은 충분히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다.

 

2) - 칸트: 그래, 다 좋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진짜 있어? 그냥 관념상의 존재 아니야?(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백만 원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냐) 존재증명의 대상이 되는 신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네가 열심히 말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그게 실제로 실존하는 게 아닌지 맞는지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 이에 대한 스피노자 생각은, 우리가 자기원인적인 존재= 본질상 실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 본성상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존재는 자연전체 밖에 없다. 자연전체야말로 유일하게 자기원인적인 존재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게 없다라고 한다면, 오직 무만이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자기원인적 실체를 부정하고 관념상의 존재라고만 한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무밖에는 없는. 그렇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사고의 방식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 것도 없다= 사고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원인적인 존재는 단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참된 관념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연전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 어떤 의미에서 진화론이랑 잘 연결되는 철학이다. 2부 정리13-14 사이의 자연학 소론을 두고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스피노자가 물체와 운동을 설명하는 방식이 진화론적인 자연해석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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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정의 7개의 공리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정의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 양태의 변용들이다.

 

공리2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말을 반대로 바꿔서 써보면,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 신비한 것. 인간의 의지로 접근불가능한 것 -> 이게 바로 칸트. ->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 -> 다른 것에인식될 수 있는 것 VS 스피노자: 물 자체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바로 저 차이.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 것이 공리2.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 그래서 공리2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도 있다.”크크. 하지만 스피노자는 저렇게도 말 안 하고 매우 세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함 -> 우리에게 인식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합리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

*** 자신을 통해 인식된다= 나보다 상위 개념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체로 궁극적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상위의 개념에 의해 인식. ex ‘운동이 연장속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공리3 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리: 인과율. (ex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결과에서 출발해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겠지하는 것. 그럼 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전통적인 공리는 우리가 일어난 결과에 대해 반드시 그 규정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당연히 원인은 있겠지만 불가지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 신은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자 근거라고 가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거나 그가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은 신비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작용으로 남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공리: 이러한 초월성이나 신비의 여지를 배제한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 매우 중요한 말)이 반드시 있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특히 정의7을 보면 규정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온다(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자유로운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정의7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실재에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운 실재는 다 규정되어 있고 제약적이다. , “임의로인 게 아니다. 신이 기분이 좋아서 어떨 때는 놔두고 어떨 때는 제약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이 자유로울 때조차도 규정된 방식, 질서, 제약이 있다. 임의가 아님.

 

공리4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involvit).

공리4는 공리3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공리4는 공리3의 인식론적 귀결이다)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에 대하여, 또는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필연적인 규칙이나 법칙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는 결과 또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하고 부적합한 것에 머물게 된다.

*** 공리4=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알 수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더 자세히 풀어보면, 원인을 모르고도 결과를 알 수는 있는데,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부적합한 방식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ex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지만 왜 인지는 잘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근데 왜? 이것도 앎은 앎이지만 결과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부적합한 앎. 물로 못 끄는 불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원인을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모르면 거기서 끝인 것이다.

 

*** 2부 정리7 44p. 각각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정리7은 공리4을 펼쳐놓은 이야기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한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인과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공리5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공리 3과 공리4가 원인과 결과의 보편성, 그리고 그 인식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반면, 공리5는 이러한 보편성에는 제약이 존재한다고 언표한다. 곧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들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정의2에서, 그리고 뒤에서 제시할 표현대로 하면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 안에서만 실재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체가 관념을 움직일 수 없고, 관념도 물체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 공리3, 4를 한정하는 의미.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을 갖지 못하는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려면 공통된 것이 있어야 한다. , 공리3, 4에서 말하는 인과관계가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속성과 속성 사이에서,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없다.

*** 근데 이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제기될 수 있냐면, 그렇다면 연장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사유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3 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4 속성, 5 속성....등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을 텐데, 무수히 많은 속성 안에서의 인과관계들, , 서로 독립적인 무한한 속성의 체계들이 있고, 각각의 속성은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럼 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은 공리6에 나온다.

 

공리6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합치하다convenire의 번역이다. 이것은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중세철학 이래의 기본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cf 2부 정리4적합한 관념에 대한 정의

*** “합치해야 한다는 말이 2부에서 앞으로 엄청 자주 나온다. convenire-> correspond의 어근을 가진.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반쪽짜리 거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합치하는 것 같은.

*** 중세철학: “진리라는 것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 2부에서 adequatioconvenire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이 원래와 딱 들어맞는 것.

*** 왜 공리5 뒤에 공리6이 왔을까. 저 의문, 우주란 것이 다수의 우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답. 그리고 답은 아니다. 참된 관념은 대상이랑 합치해야 하니까(지성-사유속성과 사물-연장속성이 일치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속성들끼리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사유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는 물체(연장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합치한다. (, 공리6 매우 큰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각각 별도의 합리성,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 하나의 속성에서 표현되는 인과관계는 각각 다른 속성에서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어떤 관념이 진리라고 하려면 그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공리7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리1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리1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은 또한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근거나 원인을 가질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원인이나 근거로 삼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반면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을 근거나 원인으로 지니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원인적일 수 없는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 공리7은 정의1의 대칭적인 이면이다. 정의1(“나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 곧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실존 없이는 본질이 성립되지 않는다)에서는 자기원인적인 것을 정의했고, 공리7에서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된다.

***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실체의 본성// 다른 것 안에 있다는 것- 양태의 본성

*** 공리1과의 비교: 공리1에서는 인식되는 측면을 빼고 말했다.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측면=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에 근거하지 않는 측면. // 공리7은 그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 그 다른 측면= 다른 원리가 먼저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

 

*

질문타임

- 질문: 무한한 속성이라는 것이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 존재들의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이외의 무한한 속성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형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른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질서 아니면 생각해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속성이 다차원이라면 (인간이 사유/연장 속성을 담당하듯이) 그 다차원을 이루는 부분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 내의 질서가 아닐까라는 질문인 듯) 녹음 파일 27. 스피노자 41

- :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놓은 바가 없어서. 우리가 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예측할 수 있느냐. 스피노자 이야기는 우리가 정신하고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유속성 연장속성 두가지밖에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속성은 무한하게 많다. 이렇게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3의 속성 제 4의 속성 이런 것도 존재를 하고 스피노자적 관점에 따르면 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할텐데, 그런데 스피노자가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3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이외의 제3의 양태를 갖고 있다는 제시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어떤 것인지 스피노자가 그런 여지를 허용했는지, 그것은 좀 논의의 여지는 있죠. 물론 이제 우리가 꼭 스피노자에 얽매이지 않고도,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든가.

 

- 질문: 시간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걸 사유속성이라고 보기에는 실체가 있을 것 같고. 이렇게 완전히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는건지.

- : 강의록 3쪽에 보면 마침 올덴부르크가 셋째, 라고 한 부분의 네 번째 줄부터 보면, “두번째 공리는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우연속성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만(스피노자가 이때만 해도 이것을 공리2로 제시했다), 많은 이들은 시간과 공간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에도 이런 의문이 나온다. 스피노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은 우연속성들, 양태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 다 물리적인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상상적인 것.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인위적으로 절단해서 생각하는, 1미터 1센치 11시간,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스피노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장속성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뭔가 아인슈타인적이네요”- 누군가 답) 시간과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가 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치면서.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스피노자가 만약 자연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을텐데 일단 에티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질문: 근데 칸트는 시간을 사유속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피노자는 전혀 사유속성으로 고려하지 않고 연장속성으로만 취급한 거예요?

: 그렇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으니까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 이 답 되게 낭만적이고 좋다)

 

- 질문: 시간을 배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데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으로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장속성 만인지 전 잘... 양쪽 속성에 다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른데 그걸 같다고 하니까 혼동하는 거다.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속성이다라고 확고하게 귀속해놓지는 않았지만 그가 시간이 연장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힘든 점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을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곤란합니다. 스피노자는 지금 이야기한대로라면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속하고 영원이라고 스피노자가 부르는 그 두 가지에는 또 차이가 있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범위도 그렇게 넓지 않고, 스피노자가 시간이라는 것을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게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인위적으로 절단된, 단위로서의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다른 철학자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 스피노자의 시간을 그럼, 연장의 누적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 ... 근데 스피노자의 시간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추상적인 양이에요. 추상적인 양. 1213초 할 때 이렇게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이라고.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상의 본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대체 이 하루를 123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 질문: 공리6에서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은 대상이 있는지. 참되지 않은 관념에 대한 대상이 따로 있다면 개수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관념이 더 많고 대상이 더 적은 것인지.

- : 아주 재밌고 좋은 질문이네요. 질문이 내용은, 참되지 않은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지 않은 관념이지 않느냐,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에 대상이 따로 없다면, 대상의 숫자보다 관념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 아니냐, , 관념의 외연이 대상의 외연보다 큰 거 아니냐. 이런 질문인데 상당히 좋은 질문입니다. 속성과 속성의 외연의 차이의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특히 2부에 가게 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부의 평행론에 가게 되면. 스피노자는 (요즘 철학자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관념에 대해 두 가지 지위를 부여합니다. 1) 관념이라는 것은 표상적 실재성,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 essential of objectiva(objective) 근데 이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2) 형상적 본질 essential of formalis(formal) -> 독자적 실재. essential of objective/ essential of formalis 어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념이 표상하는 실재가 있다는 말.

***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표상하는 어떤 대상, 실재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는 관념. 표상적 본질. 근데 이런 차원만 갖고 있다면 단순한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은 또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관념은 뭐냐면. 관념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독자적 실재라는 것. 관념이라는 것도 독자적 실재다. 단지 관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도 독자적인 실재가 된다는 말.

*** 그러면 또 어떤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형상적 본질을 갖는 이 관념을 표상하는 관념이 또 있는 거예요(마트로슈카처럼). 형상적 본질로서, 하나의 독재적인 실재로서의 관념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관념 A에는 역시 표상적 측면이 있고 형상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형상적 측면을 갖는 관념A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B가 있다고 합시다. 관념A를 표상하고 관념A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 그러면 이 관념B도 또한 표상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으로 나뉘구요, 그러면 관념B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C가 또 있겠죠. 이렇게 계속 D E F G....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관념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유속성의 세계는 연장속성의 세계보다 외연이 더 클 수밖에 없죠. 여기에는 관념이 있으면 관념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이 있고 또 다른 관념이 또 있고.

*** 여기에다가 또 뭐가 있냐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는 연장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 3의 속성, 4의 속성, 5의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도 다 관념이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유속성의 범위가 훨씬 크죠. 다른 속성에 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 우리가 정확하게 속성과 속성의 평행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의 외연 문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그리고 지금 제기한 질문은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얘기했던 관념들은 다 말하자면 참된 관념들인데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관념 없는 대상의 경우도 있구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허구적인 관념이라든가 날개달린 말이라든가 뿔이 달린 말이라든가 가공의 어떤 대상과 관련한 관념들이 있죠. 그러니까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의 지위는 어떤 것이고, 이 관념들은 아무런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관념들인데 이 관념들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형상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을 할 때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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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1부의 논증구조 260p.

1. 전반부: 정리1-15

=실체=자연의 논리적 구조. 다시 말하면 신 또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는 것. 그리고 이런 존재자는 딱 하나만 존재한다.

1) 정리1-8

데카르트의 유한실체 개념에 대한 비판.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정리8)

모든이라는 말은 적어도 하나 이상이라는 건데(속성은 무한하니까) 근데 그러면 실체가 다수 존재하는가 하나만 존재하는가. 스피노자의 답: 정리9-15. 아니다. 하나다. 그 하나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2) 정리9-15

복수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정리11)

정리9-11이 가장 핵심적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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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 실체가 변용들의 근거가 된다 = 변용들은 실체를 근거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증명 이는 정의35에 의해 명백하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 연장> 운동

*** 실체는 다른 것을 전제하지도 않고 없이도 존재/인식가능한 본성상, 다른 것을 전제해야만 하고 없으면 존재 불가능한 양태에 앞선다.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증명 이 또한 정의3에 의해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실체)은 자신 안에 존재해야 하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그 개념의 형성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독립적/자율적이니까-> 어떤 실체가 있어도 다른 실체에 근거하지도 않고 연관도 없는 것이다(독립적이니까!)

정리3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 것들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증명 만약 그것들이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면, (공리5에 의해) 그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공리4에 의해) 서로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점이었다. Q.E.D.

 

정리4 서로 구별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재들은 실체들의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든가 아니면 그 실체들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다수의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 2) 변용의 차이에 의해서. , 사물들은 속성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변용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증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존재하든가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공리1에 의해). (정의3과 정의5에 의해)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Q.E.D.

*** 지성 바깥에는= 자연 안에는, 실제로는

***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그 속성들 -> 스피노자는 실체들과 속성들을 같은 걸로 제시하고 있다 by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러니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니까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초기 편지를 보면 실체에 대한 정의와 속성에 대한 정의가 사실 똑같다. <에티카>에 와서 스피노자가 속성에 대한 정의를 정의4로 이야기했지만 편지에서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에티카>에서의 실체의 정의와 같은 걸로 말했다.

 

*** 질문: 보통 우리가 실체라고 말하면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담지자지 속성과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 그것은 우리가 보통 실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자, 스피노자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에 깃들어 있는, 실체에 의존하는 성질이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실체와 속성이 같냐는 의문을 가졌었고 더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왜 실체가 하나냐.

질문: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실체가 하나라구요?!

: (모두 웃음) 아까 논증구조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리8까지는 실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오죠. 정리8까지는 실체는 정의상 다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 질문: 그럼 정신이랑 물체가 같은 건가요? 실체라는 점에서.

: 질문에 이미 문제가 있는데, 일단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모두 실체라고 봤습니다(- 무한실체, 정신/물체- 유한 실체).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런 말을 안 하고 있죠.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어요. 아직까지 스피노자는 실체가 뭐다, 양태가 뭐다라고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요. 그저 정의3과 정의5만 이야기했을 뿐. 왜냐면 지금 스피노자의 논증의 목표는 과연 실체라는 것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과연 유한할 수 있느냐 아니면 실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한하냐.”, 바로 이걸 논증하는 과정이거든요. 만약 실체가 무한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면 정신이나 물체 같은 것이 실체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게 입증이 됩니다. 정신이나 물체는 유한하니까. 그럼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 일단 여기서 논증의 목표는 실체라는 것을 정의3 이라고 내린다면 그 실체에 유한한 실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그것입니다.

 

*** 다시 증명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문장을 봅시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속성들과 변용들 뿐이다. , 사물A, 사물B, 사물C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실체냐! 양태냐! = 이것이 어떤 속성에 속하는 실체인지, 어떤 변용에 따라 구별되는 양태인지. 이것이 사물들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것 외에 우리가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다.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 , 같은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뿐이다. 어떤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연장 속성에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사유 속성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 데카르트의 유한실체가 가능하려면, 같은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유한실체에서처럼 물체가 실체라면-> 물체는 연장속성을 가질 테고-> “연장속성이라는 동일한 속성을 가진 물체라는 것은 다수이기 때문에 ->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다수다라는 결론. 그런데 정리5에서 스피노자는 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다라고.

*** 정리5에서 일단 논증의 한 마디가 끊어진다. 정리8까지에서 펼쳐질 스피노자 논증의 한 부분(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여기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증명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만약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오직 동일한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면,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정리에 의해)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Q.E.D.

*** 두 개 이상의 실체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은 속성/ 변용이다.

1)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이 말은 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속성이 다 다르니까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가능하니까. 만약에 한 속성에 여러 개의 실체가 있다면, 그건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속성 내에서 다른 것, , 변용에 의해 구별되는 거겠죠. 하지만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만 실체들이 구별된다= 속성이 다 다르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2) 실체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된다면, 그런데 이것은 이 문장 자체가 벌써 불가능하다. 왜냐면, 변용은 실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키포인트는 정리1이다.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변용은 실체를 구별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에 의해 성립되고, 실체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 건데 우리가 거꾸로 어떻게 변용을 가지고 실체를 구별할 수 있고, 실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삼을 수가 있는가.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변용뿐이다 ex) 예를 들면 컵A와 컵B를 구별할 때 (스피노자 표현으로 말하면) 변용을 가지고 구별한다. 검은색이라는 양태, 하얀색이라는 양태로. 우리가 이 두 개의 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다.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우리가 실체를 구별하는 방식은 저 두 가지 밖에 없으니 증명 끝!

*** 여기까지해서 정리5까지 해서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끝났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하나의 속성을 갖는 두 개 이상의 실체는 없다!가 증명된 것. 근데 그 실체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아직 증명이 안 됐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정리6- 정리8까지이다.

 

*

강의록2 3p. 올덴부르그의 3번째 편지. 1661927일 런던에서 스피노자에게 보낸 편지

당대의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잘 이해 못했던 이유는 아마 칸트/데카르트적인 생각에 그동안 철저히 매몰되어서 일 것 같다. 그만큼 스피노자가 새로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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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피노자와 속성의 문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주요속성이라고 부른 것, 곧 사유와 연장을 단적으로 속성”(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단 2가지)으로 규정하고, 데카르트가 모호하게 성질들이나 속성들 또는 양태들이라고 부른 개념들을 좀 더 엄밀하게 구별하여 분류한다.

속성: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들만 이해할 수 있음.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

특성 proprietas/ property : 실체 또는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고유하게 속하고, 실재의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성질들. ex) 신의 경우: 유일성, 무한성, 영원성, 자기원인 등. 삼각형의 경우: 세 각을 가지고 있고 세 변을 가지고 있고...등등

상상적 성질: 인간 자신의 신체의 상태에 대한 상상적 통념들을 신이나 외부의 대상들에게 투사하는 것 ex) 신의 경우: 전지성, 긍휼함, 선함, 최고선 등

 

4) 속성개념을 둘러싼 논쟁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1804<스피노자 저작집>이 독일에서 나온다. 파울루스라는 사람이 냈는데 이때 같이 협력했던 사람이 헤겔. 스피노자 철학에 논평 제시. 자신의 철학과의 차이 제기. 유명한 문장: “실체는 더 이상 실체에 머물지 말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

*** 헤겔이 말한 스피노자의 한계: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자기원인)에서 출발한다. 에티카 봐라. 정의1에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부터 딱 나오잖아. 절대자-> 속성 -> 양태, 이렇게 넘어가는 구조인데, 저것은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것(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구조. 절대자에서 속성으로 내려오면 여기서부터 벌써 절대자의 완전성이 감소한다. 지성에 의해 실체가 지각되는 것<- 봐봐 벌써 여기서 인간적 유한성이 들어간다. 양태로 오잖아? 그럼 절대자에게서 볼 수 있던 완전성은 이미 사라지고 양태에 오면 완전히 유한한 것. 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양태= 인간

*** , 스피노자 이론에서는 인간에게 주체성이 없다. 절대자에서 출발했고 그랬기 때문에 계속 내려가야 하는 하강의 길 밖에 없다. 이러면 안 된다. 진보도 했다가 뒤로 잠시 갔다가 앞으로도 나아가야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성의 진보가 가능해지는데 계속 내려가기만 한다. = 실체가 실체로만 머물러 있다. 실체가 주체가 되어야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영원히 1장 그 상태로 머무르니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내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절대자로 다시 개념화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스피노자 철학과의 대결이 헤겔철학의 추동력.

***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헤겔이 스피노자를 잘못 해석한 결과)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Harry Wolfson 1934년에 스피노자 책에 대한 2권의 책 출간. 그는 중세유대사상연구를 대표하는, 중세유대사상가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이 책의 특징은 스피노자의 연구라는 것은, 특히 에티카는 중세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이 구절, 저 구절, 여러 구절을 따와서 꼴라쥬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중세유대교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라고 주장. 실제로 이 구절은 여기서 따왔다며 인용문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1900년대에 프랑스어로 번역됨.

 

(프랑스는 사실 외국에 관심이 없는 나라다. 특히 외국 철학계에. 전부 자기네 나라 안에서 동료나 나의 선생님들이 뭐하는지에만 관심이 잔뜩 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철학계에 관심돌릴 틈이 없음. 그래서 다른 나라 책 번역도 거의 안 된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1920년대)1970년대에야 소개된다. 그전까지는 러셀, 아도르노가 누군지 전혀 몰랐던 분위기. 버마스도 한참 나중에나 알게 됐다. 사실 우리나라가 비정상이다. 선진국들은 우리 동료/선생님들이 뭐하는지에 더 관심 많고 그러다가 어쩌다가 어? 외국에 이런 애도 있네? 하다가 번역하고 그런다. 문화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40년에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다보니 외국의존도가 너무 심해져서 한국 학계는 당연한 듯 늘 요즘 미국은 뭐하나? 일본에서는 뭐가 연구되고 있나?에 관심이 많고 반대로 주변 동료나 선생님이 무엇을 연구하는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분위기. 놀랍게도 프랑스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없다. 2000년대 들어서야 포스트 막스주의/포스트 식민주의라는 말도 들어갔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이 정도까지다. 2000년 들어서 이것들을 역수입하기 시작. 이런 분위기에서) 울프슨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 그것은 중세 유대사상가와 스피노자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책만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이런 식이다. “이라는 절대자의 통일성을 생각해봤을 때.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한하게 많이 있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자로서의) 신일 수가 있는가. ,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 유대신학에서는,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바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유대신학과 스피노자철학을 비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세유대신학에서 뻗어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

 

*** 20세기 전반까지 해서 헤겔 + 울프슨의 주관적 해석론을 학계에서 대세로 수용.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주관적 해석론은 거의 사라지고 객관적 해석론이 대세가 되었다. 왜냐면 스피노자 텍스트를 고려해보면 그가 실제로 속성과 실체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 여러 텍스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254p에도 나와 있다.

 

*** 최종 요약을 하자면-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 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하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을 객관주의적 해석론으로 받아들이면, 칸트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칸트는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NO! 물 자체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 중)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아래 객관적해석론을 펼치는 주장을 보고 정리해본다면, 그 무한하게 많은 본질이 ->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 수렴되고(그러니 그 무한한 본질 자체가 이미 유일함으로 수렴), 이 실체가 때로는 이 속성으로 때로는 저 속성으로 때로는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비유를 하자면 무한까지는 아니지만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라는 하나의 인간이 때로는 이 상황에서는 이 속성으로 저 상황에서는 저 속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결국은 는 유일하다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스피노자가 말한 지성은 인간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 , 객관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해석론이 옳다. 저 구절이 객관적 해석론자들이 많이 근거 삼는 지점.(철학도 결국 추리소설 같다. 여러저러 소스들을 종합해서 암호 해독하듯이 거기에 맞춰 해석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주관적인 것이 들어가고. 스피노자의 속성을 두고 이것을 주관적 속성론으로 보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가(그리고 그걸 보면서 근데 그럼 1부 정의 4에서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고 말한 건 뭐야??)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나중에 그 지성은 신의 지성이다!”라고 쳐버리니... ! 싶으면서. 이런 암호해독의 우위를 점해야하는 세계인걸까....? 라고 생각했다. , 지성은 인간의 유한지성이 아니라 신의 무한지성이다!

 

***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부르는 속성이랑은 다르다. 스피노자가 부르는 속성은 의미가 아주 분명하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딱 두 가지: 연장 속성/ 사유 속성. Attribute.

*** Property= 특성. 속성과 구분해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그건 오직 속성뿐이다) 실체의 고유한 것,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질. EX) 삼각형. 본질: 내각의 합이 180도인 도형 // 특성: 3변을/ 3각을/ 등등등 property가 따라나올 몇 가지 특성들.

이렇게 본질이라는 것은 몇 가지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본질-> 특성들이 따라나옴

사유라는 속성(본질): 유일성/무한성/영원성/자기원인성.... <- 여러 특성들이 따라나옴. 신은 여러 개가 아닌데,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하는데 특성들은 여러 개가 나온다.

*** 스피노자의 신의 유일성은 우연한 유일성이 아니다. 필연한 유일성이다.

- 우연한 유일성: 전 세계에 딱 하나 있는 다이아몬드, , 우표 이런 것들. , 2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다 불에 탔다거나/ 사라졌다거나 어떻게 하다보니) 하나만 존재. 백만개 백개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유일한 것.

- 필연한 유일성: 하지만 신은 다르다. 둘일 수 있는데 하나인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한 분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나중에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 인간의 경우. 인간의 특성에 대해 스피노자가 뭐라고 했냐면(본질은 아닌데 특성인 것으로 나중에 2부에 가면 몇 가지 예가 나오는데) 이를테면 웃을 수 있는 것/ 털 없는 두발 짐승

*** 본질 속성 특성: 사물에 객관적으로 속하는. 이에 비해-

상상적 성질: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데 투사하는 것. 어디에서 많이 나오냐면 신학 비판할 때 1부 부록에서. 신학정치론 책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얘기하는 신의 고유한 속성들은 다 상상적 성질이라고 일축. 불경한 거죠. 신이 객관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 갖고 있는 것들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정의 5. 양태 Modus=mode

 

1) 정의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 Modus=Mode. 양태와 실체는 아주 대조적이다.

실체에 대한 정의: 자기 안- 자립적 자율적 VS 양태에 대한 정의: 다른 것 안- 타율적. 상위의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에 의해 성립한다.

실체: 자신에 의해 인식- 자신을 초월하는 상위의 논리적 근거의 토대를 갖고 있지 않다. VS 양태: 다른 것에 의해 인식- 자신을 초월하는 상위의 논리적 근거에 의해 파생되는 것이다.

*** 연장- 운동. 운동이라는 개념은 연장이라는 개념 없이는 성립 하지 않는다. -> 운동이라는 개념은 연장이라는 개념에 의해 인식 가능하다. 러나 연장은 운동이라는 개념 없이도 성립/인식 가능하다.

*** 운동-> 양태. 무한양태. 양태에 대한 정의에서 변용들” Affections. 앞으로 이야기할 일이 굉장히 많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Affectio의 철학자다. 인간학 윤리학 자연학에 걸쳐 계속 나옴. 아주 문제적 개념.

 

2) 양태에 대한 정의의 독특성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한 정의와 대비하여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양태에게는 아무런 자율성이나 자립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엄격한 결정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인간에게 아무런 자율성이나 자유의 여지를 주지 못한다고 비판받곤 했다. 이러한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 실제로 스피노자는 양태들 또는 인간에게 아무런 자율성의 여지도, 윤리적 역량의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의 특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인간이 바로 양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양태니까. 인간은 양태의 하나다. 그래서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너무 주체성이 없어서 역시 윤리학의 가능성이 없지 않냐고 한 것.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양태고, 양태는 불완전/ 주체성 없고, 그런데 어떻게 제목이 윤리학이고 5부 제목(지성의 역량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이 이렇지? 라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헤겔이 에티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가능성! (에티카에서 인간은 주체가 없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양태/변용을 잘 이해하는 것은 중요!) (아직까지의 나의 이해에서는 양태는 타율적이고 의존적인데, 그 양태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따라 자립과 자율의 가능성의 크기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헤겔이 양태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즉 양태는 변용을 통해 역량을 얻는다)

 

*** 실체의 변용: 실체는 (자기 안에/ 자신을 통해서 존재/인식되고) 자기가 자기의 모습을 바꾼다. 실체가 자기를 표현하는/바꾸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방식들. 보통의 명칭대로 하면 : “실재들”= “사물들”= 인간도 해당하고 건물도 해당하고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넓은 범위로서의 사물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 (그러니까 실체는 실재(그리고 양태)가 아니다)

*** 1부에 나오는 변용과 2부 이하에 나오는 변용들은 조금 다르다.

- 1부에 나오는 변용: A라는 물체와 B라는 물체가 충돌-> 충돌해서 A는 찌그러짐-> 변용 // 외부물체가 인간신체에 부딪혔을 때 인간신체에 남은 것=흔적-> 변용

- 2부에 나오는 변용: 물리적인 변화 & 그 변화로 인해 생겨난 결과

- 요약: Affectio는 항상 ‘body’에 관련됨. 이게 2부 이하에 나오는 변용! 물리적 현상 (1부는 신체 + 정신 다 아우름)

 

*** 왜 문제적이냐. affectionaffect과의 관계. 상당히 중요! 이 관계는 스피노자의 인간학부터 아주 중요하다. 아펙투스 3부부터 본격적으로 윤리학, 인간학, 정치학에서 아주 중요. (책의 그림 참조 256p)

 

1) 유한에 관한 정의에서 생각은 생각을 한정할 수 있고, 신체는 신체를 한정할 수 있다.

=> , 물체A는 인간의 신체에만 작용할 수 있다.

A------------> 신체

변용

A-------------> 물체/신체 하면 변용의 흔적이 남게 된다(빗 금쳐진 부분= image imago)

스피노자에게 이미지는 물리적인 개념이다. 신체에 닿는 흔적

, Affection(변용)의 결과 생겨난 것= image

염두해 둘 것은 우리 눈의 망막에 사물의 흔적이 남는 것 = image

꼭 망막만은 아니고 청각, 청각에 변용하면 청각 이미지가 남는다(218)

, Image는 시각뿐만 아니라, 물체A가 신체를 변용했을 때 남는 모든 흔적들.

 

2) 그러면 동시에 정신에서는 인지작용/ 지각작용이 일어난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일컫어 뭐라고 하냐면 Imagination. image에 대응하는 정신의 작용. 우리가 보통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다. 지각, 감각지각.

1)2)를 요약하면,

물체A가 인간의 신체를 변용한다. -> 물리적: image/ 정신적 imagination 상상, 지각작용

 

3) 그러면 물체A가 신체를 변용했을 때 정신에서는 지각작용만 일어나는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A-------> 정신 ==> Affectus가 또 일어난다. 고 말한다. 감정.

!! 물체가 신체를 변용하면 imago 낳고 지각작용imagination, 그리고 동시에 affectus(감정)이 일어난다!

) 우리가 저녁을 먹어도 신체에 affaction(변용)

imago: 미각. 영양학

- imagination 지각(이마지나치오): 소갈비구나!

- affactus 감정(아펙투스): 기쁨이 마구 생성

, 인지적 작용 + 정서적 작용.

 

4) Affectus는 또! : Affectus------> 신체의 변화

ex) 기쁨--> 신체의 활력 / (지각), 두려움(감정) --> 신체가 오그라들고 위축

, Affectus는 감정의 변화지만 신체의 변화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그러니까 imago는 철저히 신체-> 신체 // imagination은 철저히 정신-> 정신 // affactus는 신체+정신)

 

*** 여기서 다시 언어의 문제로 돌아오면 Affect -> Affection 어근이 같고 연결이 됨

그리고 다른 나라도 다 저렇게 어근이 같고 이어지는 형식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저렇게 어근을 일치시킬 방법이 없다. Affection--> 정서, Affect 아펙투스-> 정동. 이라고도 하는데 이 방식도 사실은 좀 엉뚱하고. 왜냐면 affection는 정서랑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물리적 변화라고 해야 한다. 아무튼 우리말로는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질문: 그럼 물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일어나나요?

스피노자에 의하면, 물체Aaffection하고 image를 남기고 사라짐. 물체A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물체A가 사라져도 정신은 A라는 물체가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부재하는데 현존하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는 것- 이마지나치오.

contemplatio 컨템플라치오: 정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관성 (물체가 한번 작용하면 누가 멈추게 하기 전까지 계속 작용)

컨템플라치오는 B라는 다른 물체가 신체를 변용해서 다른 imago가 생길 때까지 작용한다.

(나의 질문. 그러면 AB사이에, A에 대한 컨템플라치오도 B에 대한 이마지나치오도 없는, 아무 지각이 없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고 항상 A에서 B에서 C로 숨가쁘게 넘어가는 건가요? 스피노자의 논리안에서는?)

*** 들뢰즈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 제일 중심 아이디어는 양태로서의 윤리적 역량. 초점은, 윤리학 3부를 재해석하는 것이 초점!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과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B. 양태와 변용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곧 전자와 달리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실체와 개별 실재들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는지 잘 보여준다.

 

B-1) 실체의 변용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스콜라철학/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그러므로 말 그대로 변용이다)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인 자기-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B-2) 양태들의 변용되기-변용하기

개별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변용은 이중적인 양상을 띤다. 변용이라는 명사는 사실 이중적인 활동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변용은 한편으로 변용되기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 변용하기를 의미한다.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 양태/변용

-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을 동의어로 쓰고 있는데, 그래도 양태라는 말보다 오히려 실체와 자연 사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건 변용affection. 이유는,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관계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

-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 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 스피노자에게서 affection은 물리적인 개념이다. affection: 1차적 작용

아키페레 affect: 변용하는 작용

아피키 being affected: 변용되는 작용

- 자연사물들은 항상 변용하면서 동시에 변용되는, 이런 2중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 자연사물들이 실존하는 방식은 바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면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변용하고-변용되고를 수동-능동의 관계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변화된다는 수동개념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시킨다도 능동개념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큰일 난다.

- 그것을 혼동하면,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이런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능동적이 되려면 변용되지 말아야한다”= 먹지도 말아야하고 숨 쉬어도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능동적인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변용되어야 한다! 3부 정의2에 가면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가 나올 것이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아무튼 변용!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정의 6. 나중에 1부 정리 11에서 더 자세히 나올 것이다.

 

1) 정의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being entity, ens=> ), 곧 각자(= 각각의 속성)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를 신으로 인식한다.”

 

*** 신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면서 어려운 정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각각의 속성들(속성 하나하나가 다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의미), 그리고 이런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다는 것.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아니라, 단순히 여러 개가 아니라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는 것. 이렇게 무한함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 된 실체가 바로 신이다.

*** 여섯 번째 정의에 따르면 신이라는 실체는 유별난 실체. 신이라는 실체는 여느 실체와는 다르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무한하게 많으니까. 이 정의의 단계에서는 아직, 지금 이 실체가 하나 있는지, 여러 개 있는지 확정이 나지 않았다. 정의3에서 나오는 실체가 정의6의 이 신이라는 실체와 같은 건지, 아니면 정의3에서의 실체와 정의6의 실체가 각각 따로 있는, 별개의 실체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정의6에서는 스피노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고 말한다.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이 무한하게 많다.

 

해명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 “자신의 유 안에서라는 말은 정의2, 유한에 관한 정의,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에서 나왔던 말. 자신의 유 안에서= 같은 본성을 지니는 속성 안에서. (사유속성 안에서/연장속성 안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장 속성 안에서 무한하다/ 사유 속성 안에서 무한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 가령 사유속성 안에서도 무한한 게 있고 유한한게 있다. 무한한 것- 사유속성 그 자체/ 유한한 것- 각각의 개념들, 이런저런 개별적인 관념들.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만이야기해서는 절대적 층위의 무한에 대해서까지 포괄해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속성이 무한하게 많은 어떤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 ? 가령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지만, 사유속성이랑 연장속성이랑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연장속성이라는 또 다른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유속성이나 연장속성과는 또 다른 제 3의 제 4의 제5의 속성들이 있을 수 있는데 -> 그러니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말을 가지고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없고 이 각자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이 구성하는 실체에 대해서만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스피노자의 뜻은 뭐냐면, 철학에서는 이것을 가능 세계” “가능 우주라고 말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해 있는 이 우주가 있다.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우주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가 있지 않을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세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이 우주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우주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우주와는 다른 우주가, 당장 파악할 수는 없지만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하나의 우주만이 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우주=단 하나의 자연= 단 하나의 신만이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뒤에 가서 단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세계라는 것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자연이어야, 그 모든 것을 다 묶어서 퉁치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하나의 자연”=하나의 신=하나의 우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정의6에서 스피노자가 절대적으로 무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그 모든 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묶고 통합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우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우주가 탄생)

*** (저 비유를 생각해서 적용하면)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이 신 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달리 말해서, 이 우주 외에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결과.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다“ ”그냥 무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무한들이, 무한하게 많은 무한들이 구성하는 실체가 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여기에는 더 이상 다른 우주, 다른 자연, 다른 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 ... 신이 그 무한을 다 포괄해버리는 거니까.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유일한 신만이 존재한다, 신의 유일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이 말에 꽂혀 열광했던 철학자가 들뢰즈. 들뢰즈가 표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재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지침이 되어준 문장이다. 헤겔은 스피노자는 절대자/실체에서 출발한다-> 속성으로 간다, 속성이라는 것은 절대자에서 완전성이 줄어든 것, 이라고 말했는데. 에티카에서보면 속성은 하나가 아니라 사유/연장 속성 두 개인데, 이 두 개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사유에 속하는 것은 연장에 속할 수 없고 연장에 속하는 것도 사유에 속할 수 없다. 헤겔은 이 관계에 대해 모순 관계“, ”변증법적인 모순의 통일체가 실체다라고 말한다, , 헤겔은 사유와 연장은 대립/모순 관계지만, 이 모순되는 것이 통일되는 것이 실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속성이라는 것은 그 속성 자체에서 연장속성을 부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달랐다. 들뢰즈가 어떤, 다시 말해서 실체의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다에 주목하는 이유는. 스피노자 적인 실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무한함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속성, 즉 연장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 저 문장은 다른 속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절대자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볼 때는 변증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인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부정하는 차이의 논리가 아니라).

 

*** 그래서 정의6이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 나중에 배우게 될 정리 11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정의6에서는 신이라는 것이 정의의 대상이 되고, 정리11에 가면 신은 증명의 대상이 된다. 이런 신이 존재한다, 이런 신이 실존한다는 증명이 나오는 것이 바로 정리11. 정리11에서는 스피노자가 4가지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 이것이 어렵고 중요한 개념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어떻게 유일하다고,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어떻게 하나의 실체를 구성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통일성/유일성을 이야기할 수 있나. 우리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숫자로, 산술적인 표현으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나.) 이게 참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속성 개념을 우리가 주관적인 속성 개념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이 어려운 문제는 제기가 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신은 인식 불가능한,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해있다라고 하면 이 문제가 해소 되어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속성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구성한다고 이야기하니까 이 개념이 어려운 것이다.

 

정의 7. 자유

 

1) 정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첫 번째 문장: 자유로운 것에 대한 정의- 실체(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

두 번째 문장: 필연적인 것/제약된 것에 대한 정의- 양태

-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ab의 동사를 보자. “행위한다” “작업한다

actio-> act 행위한다

operatio -> 그러나 여기서는 produce on effect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작업한다

*** 또 중요한 점: 자유-필연을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유-제약을 대비하는 것.

제약 coactus 스피노자의 coactus를 제약으로 보냐, 강제로 보냐에 따라 정의7의 의미가 다른데, 강제로 본다면 b의 경우는 아무런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봐야할텐데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coactus를 쓰는 용법을 보면 시민이 법에 coactus 된다는 표현을 쓴다. 법이 시민을 구속하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 자유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한다고 보기보다는 제약이 더 적절하므로, 여기서도 제약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자기원인적인 것이 자유롭다 => 결국 자기원인적인 것은 신/자연이니까 자유로운 건 신/자연 뿐이다.

*** 1부 정리28(마트로슈카 정리)3부 정의2와 묶어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2) 자유에 대한 정의의 쟁점

이 정의 역시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입증해주는 대표적인 전거 중 하나로 널리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중요한 것은 ab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일이다.

(1) 자유로운 실재

이것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gendum/act” 규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2) 필연적인 또는 제약되어 있는 실재

이것 역시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operandum/operate” 규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3) “필연적 또는 오히려 제약의 의미

스피노자는 필연적이라는 말 대신 제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스피노자에게 필연자유는 대립/상반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연은 운명이나 숙명처럼 맹목적인 힘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유는 자연의 합법칙적인 질서와 분리되어 있는 자유의지를 뜻하지도 않는다. 자유는 필연적인 법칙적 관계에 존재론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필연이라는 말 대신에 제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 “제약이라는 말의 의미에 주의해야 한다. “제약은 행위의 가능성과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약은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며, 따라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구속자유의 차이는 노예와 시민의 차이와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자유제약은 서로 대비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자유제약은 실체와 양태의 차이로, 곧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사이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자유가 일체의 제약 또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실체의 행위는 임의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본성의 필연성이라는 말을 통해 자유역시 필연성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스피노자에게서 자유는 일체의 제약과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있는 것이 아니고, ‘제약은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상태도 아니다. 자유는 필연적인 법칙적 관계에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 이게 아닐 경우 실체의 행위는 임의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 8. 영원

 

1) 정의

나는 오직 영원한 실재의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에서의 실존 그 자체를 영원으로 파악한다.”

해명

왜냐하면 이러한 실존은, 실재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 진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지속이나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이 시작과 끝이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그렇다.”

2) 영원에 대한 정의와 쟁점들

(1) 필연적 실존으로서의 영원

영원을 필연적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영구성sempiternity과 영원을 구별하기 위해서.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은 시간 속에서 무한정하게 지속되는 것(“시작과 끝이 없는지속)으로서의 영구성이 아니라 필연적 실존, 실존 그 자체를 의미. cf. <윤리학> 5부 정리 23의 주석. -> 영혼 불멸, 사후 세계에 대한 비판적 함의 cf. <윤리학> 5부 정리 20의 주석, 5부 정리 41의 주석

(2) 영원 진리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 진리17세기 철학에 통용되던 표현. 시간이나 지속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히 참된 진리들을 가리킴. 논리학 규칙들, 수학적 진리들 등. ex) 1+1=2 /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세 개의 각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eternity. “영구성이란 것과는 다르다. 윤리학 5부에 가면 정신의 영원성영혼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두 가지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영혼불멸은 유대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스피노자는 이 영혼불멸을 부정해서 쫓겨날 정도로 부정했다. 그러나 정신의 영원성은 긍정했다.

*** 영원진리. 스피노자가 쓰는 영원진리는 17세기 철학에서 많이 쓰는 표현. 시간이나 공간의 한정에 구애받지 않는 진리를 영원진리라고 한다. 논리적인 진리, 수학적인 진리. 왜 공간이라고 썼냐면, 동쪽에서 참인 것이 서쪽에서는 거짓이라고 하지 않으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성은 시간이랑 공간이랑 무관하다!

*** <강의록 1> 5p. 정의8 보충. 정의8과 관련해서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정의8을 보면 영원이 정의의 대상이 되는데, 스피노자가 영원을 정의하는 방식을 보면 영원한 실재를 통해서 영원을 정의하고 있다. 즉 정의되어야 될 대상이 이미 전제가 되어있는, 추납법. 사실 스피노자의 원래 뜻은 아까 말한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 특성이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성질프로프리에타스. 그렇다면 영원성은 어떤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성은 어떤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

*** 다시 말하면, 정의8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실재, 실재의 정의로부터, 그리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정의라고 하는데 영원한 것의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영원한 것의 본질로부터 하나의 특성으로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영원성. 그러니까 영원성은 유일성과 마찬가지로 신, 또는 실체의 특성 중 하나다.

*** 나중에 5부에 가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럼 영원성이 실체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인간에게는 영원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 정신의 영원성. 신체의 영원성.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영원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부라는 의미에서의 영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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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더베익 메이으르: 스피노자의 가장 절친한 친구. 스피노자 유고집 편찬책임자. 의학박사

 

로더베익 메이으르가 쓴 <데카르트 철학원리>의 서문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확실하고 굳건한 인식은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부터만 끌어내고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것[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처음부터 견고한 토대로 놓여야 하며, 이 위에 그 이후 인간 지식의 건물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중략) 정의 공준 공리라는 이름 아래 수학자들에게 친숙한 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라는 점은 이 고귀한 학문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정의는 논의되는 실재를 지칭하는 용어와 이름에 대한 아주 분명한 설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준과 공리 또는 정신의 공통 통념은 아주 명료하고 뚜렷한 까닭에 이 단어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언표들이다.”

 

이 서문을 읽고 나서 드는 의문

1) 정의라는 것이 어떤 이름을 정확하게 설명/설정하는 것인지,

2) 더 나아가서 정의되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불분명

또한 저것만 봐서는 정의-공준-공리 사이의 차이가 불분명.

- 이것은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도 오간 이야기다.

 

*

올덴부르크: 1619년생. 스피노자보다 13살 연상. 독일 브래맨 출신. 하인리히 올덴부르크.

독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감. 영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영국왕립학술원창립에 관여. secretary 맡음. 외국의 과학이나 철학같은 학문을 찾아서 왕래, 주선, 소개. 1660-61에 네덜란드 여행 중 이미 유명해져있던 스피노자의 명성을 듣게 된다. 당시 스피노자는 책을 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저명한 학자였다. 스피노자의 집을 방문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 보낸 첫 번째 편지. “선생님을 만나고 잊을 수 없어서 편지 쓴다. 계속 편지 주고받으며 많이 배우고 싶다. 요즘 연구하시는 것들에 대해 서신으로 간간히 알려달라.”

-> 스피노자의 답장(2번째 편지/86) : 쓰고 있는 저술의 일부 소개. / 속성의 정의 언급.

 

-> 올덴부르크의 답장(3/86) : 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신의 실존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스피노자 선생께서는 신에 대한 정의에서 실존을 바로 도출해냈다. 하지만 그 정의에서 신이 실존된다는 것이 어떻게 바로 도출될 수 있는가. 정의는 정의고 실존의 증명은 따로 해야하는 것 아닌가. 정의는, 정의되는 대상의 실제 본성이나 본질을 참되게 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우리 정신들의 개념들만 포함하는 것 아닌가(=우리의 마음속의 자의적인 것 아닌가). 우리 정신은 실존하지 않은 많은 것을 인식하고(봐라, 우리 정신 속에서 내린 정의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들도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귀신?), 이렇게 인식된 것을 증가시키고 확대할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부터 이러한 존재의 실존을 우리는 추론할 수 없다. 이 점을 성찰하게 되면 저는 어떻게 제가 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으로부터 신의 실존을 추론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 올덴부르크는 정의를 어떤 명칭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스피노자의 답(4/86) :

우리가 실존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은 ...” 정의뿐이다. 아무 정의나 그게 가능하다고 한 말이 아니다. 어떤 정의, 대상에 대해 정의를 제시한다고 해서 실존이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올덴부르크도 이 말을 한 것이고). 실존은 오직 어떤 속성,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기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정의 또는 관념으로부터만 따라 나온다. / 방금 언급된 주석에서 저는 또한, 제가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차이에 대한 근거를 명료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허구와 명석판명한 개념의 차이를 알고 모든 정의 또는 명석판명한 관념은 참이라는 공리의 진리성에 대해 안다고 가정되어 있는 철학자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주목한다면, 저는 첫 번째 문제의 해답에 대해 무엇이 더 결여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저는 실체를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 곧 그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변양 또는 우연속성은 다른 것(실체) 안에 있고, 그것이 들어있는 바로 그것(실체)을 통해 인식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실체가 자기 안에 들어있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과 달리, 변양이나 우연속성은 자기 안이 아닌 다른 것의 안에 들어가 있고, 그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된다)

*** 실체= 자신을 통해 인식되고 자신 안에 있는 것= 실체에 대한 정의 또는 관념으로부터그 실존이 따라 나온다(오직 자신을 통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

*** 우연속성은 실체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

시몬 드 프리스: 스피노자와 가까웠던 친구.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인. 1살 어리지만 10년 먼저 사망했다. 급진적인 개혁 교회에 소속. “스피노자 서클중에 한 사람이었다. 일종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공부하던 서클.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초안을 보내주면 그걸로 공부하고 의문이 생기면 편지하고 스피노자가 답변하는 식으로. 스피노자의 열혈한 예찬자였다. 돈이 많아서 거액의 연금을 주겠다고도 제안했지만 스피노자가 거절. 그렇게 돈이 많으면 공부 외의 다른 것에 관심 가질 것 같아서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유산을 스피노자에게 상속하겠다고도 제안. 하지만 그것마저도 스피노자는 거절했다.

 

시몬 드 프리스의 편지(8/86) : 동시대 수학자(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의 예를 통해서 질문.

1) 보렐리(<유클리드 기하학 이론> 편찬자) : 직선이 두 공간을 에워쌀 수 없다. 곡선이면 가능하지만. 보렐리가 이 예를 든 것은 누군가 도형에 대해 (허구적으로) ‘직선- 두 공간을 에워싼다는 정의를 내린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 이건 참된 정의가 아니라는 것. 메이으르가 쓴 <데카르트 철학원리> 서문에 나온 말과 비슷하다

2) 클라비우스(<유클리드 기하학 이론> 편찬자/ 마테우리치의 스승/ 2의 유클리드라고 불리울 정도) : 자의적인 용어다. 어떤 목적을 위해 임의로 설정한 용어가 정의다. 그러므로 이게 자연 안에 제대로 존재하는 것을 잘 표현하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 보렐리: 증명의 전제이기 때문에 정의는 명징해야 한다! (증명의 전제= 명징한 지식= 그러면 이건 공리’. 보렐리의 설명으로는 정의와 공리 사이에 차이가 없다)

- 클라비우스: 정의는 전문용어기 때문이 실재와 합치 안해도 된다! 물론 합치할 수도 있지! ! ‘증명을 통해서.

- 스피노자 선생님의 정의는 보렐리랑도 다르고 클라비우스하고도 다른데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 스피노자의 답(9/86) :

1) 선생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상이한 종류의 정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정의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 실재적 정의: “본질만이 문제가 되고 있고 유일한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는 정의

명목적 정의: “단지 검토를 위해 제안되는 정의” (클라비우스의 전문적 용어로서의 정의)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규정된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참된 것이어야 하는 반면, 후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2) 스피노자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사원에 대한 정의

가령 어떤 사람이 나에게 솔로몬 사원(규정된 대상)에 대해 참된 묘사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면, 제가 그에게 무의미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한, 저는 그에게 그 사원에 대한 참된 묘사를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제 마음 속에 제가 짓고 싶어하는 어떤 사원을 미리 그려봤고, 이 사원에 대한 묘사를 한다면(중략)”

솔로몬 사원에 대한 정의 실재적 정의

머릿속의 사원에 대한 정의-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 명목적 정의

- 만약 누군가 정의를 실재로 존재하는 정의만을 정의라고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머릿속 정의를 그르다고 말하겠지.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사람들은 후자는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텐데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는다면 후자도 정의다!

 

*** 정의 VS 공리

- 정의: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시해주는 것. 그렇다면 정의는 보편적인 것일까요? No! 특정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Singular. 개별적

- 공리: 보편적. (ex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1+1=2. AA. A=A) 이런 관점에서 공리. 어떤 특정한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영원진리까지 확장될 수 있는 참된 지식.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249P.

 

정의 1. 자기원인

 

1) 정의

나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 곧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 함축 involvere involve: ”AB의 개념을 함축한다고 말하는 것 = A, B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2부 정리 49. 80P) , 실존 없이는 본질을 인식할 수 없다/ 실존 없이는 본질이 성립될 수 없다./ 실존하지 않는다 -> 그러면 본질이 성립되지 않는다.

*** 어떤 것이 자기 원인이다라고 하면, 그 속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 어떤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초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적 자기원인 개념으로는 데카르트가 시초라고 한다. 저 위의 이야기도 데카르트에 나오는 이야기다.

*** 하지만 스피노자의 자기 원인의 독창성: 다른 중세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책을 살펴보면 항상 자기원인의 개념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쓰인다. 예를 들면, 누군가 이게 왜 존재하냐? A 때문에. 그럼 A는 왜 존재하냐? B 때문에. 그럼 B?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갈 수 있다 <- 무한소급. 이것의 문제점은 철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야말로 이 모든 무한소급을 막아주고 답이 되는”. 그럼 왜 신이냐? 하면 답이 신은 그 자체로 자기원인적이기 때문이다라는, 신이 없이는 이 세상의 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쓰여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개념을 신과 분리시킴!

 

2) 자기원인 개념의 통상적인 의미

어떤 개체가 자기 자신의 존재 및 활동의 원인이 된다는 것. 그런데 이는 결과로서의 개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원인으로서의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 따라서 자기모순적. - 니체 <선악을 넘어서> 41P

*** , 자기가 자기 자신에 선행된다= 이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앞에서 본 의 예 같은 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이었다) <- 스피노자는 이것을 말이 안 된다고 부정. 니체도 바로 저 통상적인 의미의 자기원인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대로 사용하면, (신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되려면, ‘자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 시간적인 앞섬) 이건 말이 안 된다 (둘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니체는 더 나아가서, 신은 죽었다. 신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우리를 속여 왔다고 주장. (니체는 스피노자에서 약간 늘 오바하는... 크크)

 

3)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한 의미 (=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을 왜 에티카 1부 첫 번째 정의로 썼을까?)

 

) 초월성에 대한 비판

자기원인은 일차적으로 자연의 자족성을 가리킴. 곧 자연인 자기 이외의 다른 원인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은 실존하기 위해서나 작용하기 위해서 신이라는 초월적인 원인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신 자신이 자연의 일부. 신즉자연. “자기원인이 윤리학 1부 첫 번째 정의로 제시된 것은 초월성에 대한 근원적 비판과 배제를 뜻함. , 자연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창조론 비판. 신 비판.

- “무로부터의 창조유대교에서는 신이 전지전능하며 초월적이고 자연을 주관한다고 하는데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을 들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시간적으로 신이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일 수 있는가)

 

- 예전에는 중세철학하면 기독교적 의미의 라틴스콜라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그 라틴스콜라를 확립시킨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 Etienne Gilson 에티엔 질송(1884-1978)의 초기업적 중 데카르트와 라틴 스콜라 용어를 비교해서 인덱스로 만든 것이 있었다. 그전에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중세철학과 아무런 연관 없이 새로운 철학을 연, 근대철학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질송이 보니까 데카르트의 철학에 중세철학 이론도 나와 있고 중세철학에 굉장히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 작업을 했고, 데카르트-는 중세철학 사이의 연계를 최초로 보여줌. 이 사람은 중세철학의 가장 기본을 세운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주장. -> 근데 몇 십년 후에 연구방향이 바뀌어서 중세철학은 아랍/유대 스콜라 철학이 영향을 끼친 것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 밝혀짐. 아랍/유대 철학은 유럽라틴 스콜라와는 매우 다른 사상이다. 이 아랍/유대 철학은 근대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베로에스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중세에 전했다. 창조론이라기보다 우주/자연의 영원성을 강조한 철학. 그런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아베로에스 주의에 가깝다.

 

) 역동적인 장으로서의 자연

자기원인은 자연이 원인라는 것, 곧 실재들을 생산하는 무한한 역량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음.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은 실재들의 생산과 소멸, 성장과 쇠락,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인과연관들의 체계라고 할 수 있음 자연은 정태적이거나 활동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소멸, 운동으로 가득한 곳이다.

 

) 비재귀적 원인으로서 자기원인

 

*** 비재귀적: 자연을 주체로 이해. 주체로서의 자연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만들어내고. 마치 사람이 계획해서 뭔가를 행하듯이, 자연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그리고 여기까지가 바로 재귀적” self), 스피노자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말한다(비재귀적) ,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주체와 같지 않다.

 

*** 1부 정리11 신 존재증명 과정 모든 사물에 대해, 그것이 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반대로 왜 실체가 실존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실체의 본성만으로부터 따라나오는데, 이는 곧 그것이 실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존재하지 않는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le de la Nature et de la Grace> 7.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 이 라이프니츠의 말이 유명해진 것은 하이데거 <형이상학 입문(1935)>. 1935년이라는 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이데거는 1933년에 대학 총장이 됨. 1933년은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해다. 하이데거가 나치스당에 가입하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총장이 된다(이 해에 법학총장으로 임명되는 사람은 칼 슈미트다 크크) 하이데거와 칼 슈미트가 의기투합! 하지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 동맹은 깨졌다. 둘 다 권력경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칼 슈미트는 나치의 개완 법학자로 나치를 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엄청 글 써댐.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유죄. 하이데거/ 칼 슈미트 둘 다 전쟁 후 학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하이데거 말에 따르면 나치스에 실망했다. 입당할 때 보니 대단한 줄 알았는데 시시하더라. 아메리카주의, 볼셰비키 혁명에 맞서 제국의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입당했는데 실망해서 탈당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나치당원증을 (고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년 전 나온 책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 이 노트를 보면 그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고. 독일에서는 하이데거 전공하면 취직도 안 된다고. 그의 책 <형이상학 입문>은 나치스를 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며 쓴 책이다. 그 책에서 첫 번째 화두로 삼고 있는 문장이 바로 저것.

 

-> 라이프니츠 문장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자연(넓은 의미의 자연/ 존재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것 모두)

- 은총(즉 실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넘어서!)

형이상학이라면 실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재를 창조한 것에 대한 질문. 신학적 질문. 이프니츠 입장에서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납작했다. “도 질문이 돼야한다. 형이상학적인 ”. 아무것도 없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등한 것. (그 말은 반대로 말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질문이 뜻하는 바는 왜 존재하는가. 이 우연은 누가 가능하게 했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신... 그분....) 저 질문 자체만 듣고 너무 멋있었는데 추론해나가며 답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깼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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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 개념.

 

* 스피노자: 무는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시간의 개념으로 놓았다?) 그러니 왜 실존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왜 실존하지 않는가? VS 왜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까. 당연히 없는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없는 것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유를 밝히자!

 

* 스피노자는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지 않고, 비실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실존의 양태 중에 없음상태로 실존).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는 실재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실존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 이것은 논리적 근거나 인과성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 1) “는 이미 존재로 포괄되니까 2) “는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 없어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상태인 것. ,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

 

*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자 또는 실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는이라는 규정, “그것말고 달리~ 일 수 없음라는 규정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므로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저 스피노자의 문장에 필연으로써그 이유, 왜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필연성을 이미 잔뜩 부과했는데 거기에 뭘 물어!)

 

*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규정은 라이프니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능태인 본질에서 현실태인 실존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는 부재함을 가리킨다(왜냐면 이미 본질 안에 실존이 들어가 있는데, AB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A에서 B로 움직일 수가 있나!). 본질은 항상 이미, 영원하게 실존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존은 항상 이미 본질의 행위, 현행적인 본질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암묵적으로 자연의 외부나 자연 이전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무를 가정하는 궁극적 근거에 관한 문제설정과 무관하며, 근본적으로는 부정이나 결핍, 무를 포함하지 않는 존재, 있음의 순수한 실정성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적 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창조론을 너무나 뒷받침해주는 것이니까! 스피노자에게 이 세계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나타나는 기원따위는 없다)

 

*** 스피노자 주장: 형이상학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무의미한 말. 라이프니츠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혹세무민 하고 있다 VS 라이프니츠의 주장: 스피노자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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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철학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그전 철학에는 절대자개념이 없음. 기독교가 들여온 개념. 절대자= 무로부터 창조(를 가능하게 만듦). 기독교적인 게 없었다면 철학에서 절대성이라는 것은 없었을 것. 철학의 지평을 엄청나게 확장했다.

-> 라이프니츠가 나중에 스피노자를 찾아갔다고.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런 라이프니츠를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나중에 슐러라는 사람을 통해 질문도 많이 던지고 스피노자 사후 슐러가 스피노자 에티카도 구해주고. 스피노자가 오래 살았다면 둘이 재미있는 논쟁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정의 2. 유한

 

1) 정의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res/thing)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genre)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예컨대 하나의 물체는 유한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그 물체보다 더 큰 물체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유/생각은 다른 생각에 의해 한정될 수 있다. 하지만 한 물체는 한 사유에 의해 한정되지 않으며, 사유 역시 물체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 앞으로 내가 부를 실재는 “res”. thing보다 범위가 넓은. 왜냐면 신도 하나의 res

신을 포함해서 인간도 res 무생물 생물 다 res.

*** 여기서 더 크다는 말은 제한/ 한정/ 제약할 수 있다 :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한정된다/ 관념은 다른 관념에 의해 한정된다/ 사고는 다른 사고에 의해 한정된다. <- 동일한 본성은 동일한 본성에 의해 한정된다 (다른 본성끼리는 안 된다)

*** 여기서 본성이 다른 것”= 속성이 다른 것. 속성이 다른 것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한정지을 수 없다= 인과도 성립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같은 속성끼리만 가능한 것이다! (<- 2/3부의 중요한 전제) => 우리의 정신(사고)과 신체(물체)는 상호작용할 수 없다/ 신체가 정신을 움직일 수 없다/ 정신이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

*** 속성 Attribution

속성은 스피노자에게서 2가지. 우리가 쓰는 의미의 속성과는 매우 다름!

1) 사유속성 thought : 심리적인 세계 전체. (물리적 세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2) 연장속성 extension : 우주전체.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모든 물체는 연장속성

우리의 정신을 비롯한 모든 사고는 사유속성

=> 저 두 가지 속성은 그 안에서 서로만 인과를 맺지 상호인과를 맺을 수 없다!

 

2) 왜 유한이 두 번째 정의로 나올까?

*** 이 두 가지를 주장하기 위하여

유한한 것은 실체가 될 수 없다. 그럼 유한한 것은 (실체가 아니고) 뭐냐? 양태

정신과 물체는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 정리1~ 정리8까지 살펴보자

*** 데카르트의 유한 실체개념에 대한 비판 함축. 데카르트는 실체를 유한 실체, 무한 실체로 나눈다. =무한 실체/ 정신이나 물체= 유한 실체.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실존하게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PP 1 51 <- <철학의 원리> 151)”이며, 여기에 따르면 유한 실체라는 용어는 모순. 왜냐하면 신을 제외한 나머지 실체들은, 가령 정신이나 물체는 실존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고유한 의미의 실체는 신이 유일하지만 유한한 실재 역시 신을 제외한다면(구차하다..) 실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실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실체 개념을 모호하게 사용한다고 비판, 좀 더 일관되고 합리적인 실체 개념을 제시하게 위해 먼저 유한에 대한 정의를 제시.

 

 

정의 3. 실체 substance

 

1) 정의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곧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체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나는 실체로 파악한다.”

*** “자신 안에 있다”: 공간적 표현으로 되어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다른 근거에 의지하지 않는다/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 = 자기원인적인 것을 다르게 풀어서 한 말.

***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리가 그냥 말하는 인식과는 또 다름. = 설명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보다 상위에 논리적인 근거가 없다= 자기 자신 이외에, 그것 바깥에 다른 원리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 그렇다면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체의 개념이 필요한 경우는?

-> 실체가 아님 -> 양태임

*** 정의5의 양태와 대조적

실체: 자신 안에 있는 것. 자립적. 자기근거적.

양태: 다른 것들 안에 있는 것. 다른 것에 근거를 두고, 다른 것에 원인이 있고.

*** 연장/ 운동 설명

운동: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됨. 운동하려면 연장. 연장에 의해 인식됨. , 운동은 연장의 하위 개념이다.

연장: 그것보다 상위에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니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 최상위의 원리.

 

2) 실체에 대한 전통적 정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개별적 실체 ex) 소크라테스는 작다

데카르트의 실체

스피노자의 실체는 오직오직 2가지? 우리가 1부를 읽으면 몇 개의 실체가 있는지 확인하는 때가 올 것이다.


정의4. 속성

 

1) 정의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

***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라고 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저 정의로 가면 복잡해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이때의 지성이라는 것을 어떤 주석가들은 인간 지성으로 이해. 속성이라는 것은 실재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이다.

 

2) 속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

데카르트: 주요 속성/ 성질로서의 속성으로 구분. 하지만 후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음.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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