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책 좀 읽는다는 소문이 나면 아주 가끔 그런 질문을 받곤 한다. "좋은 책 좀 있으면 소개해줘~" 사실 나는 이 질문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의 취향과 내 취향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난감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런 질문을 받으면 웃어넘기는 편이다. 그래도 가끔 나처럼 소설이나 희곡 작품을 즐겨 읽는 사람(바로 내동생 -_-;) 같은 이가 뭐 재미난 책 없어?  물어보면 그래도 조심스럽게 추천할 수는 있다. 이 리스트는 그때 동생에게 알려준 순전히 개인적 취향의 리스트.



테네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 유리 동물원>


맨 처음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나중에 결국은 책을 샀다. 살면서 두고두고 몇 번은 더 읽지 않을까 싶다. 테네시 윌리엄스 작품은 영어 공부한다 생각하고 원서로 다 사두고 읽어보고 싶은데 문제는 원서를 사두면 늘 초반 몇 장만 읽다가 만다는 거. -_-; <유리 동물원>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황폐한 가족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좀 더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또한 그렇고.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작가가 마구 좋아질 정도로 좋았던 작품. 쓸쓸하지만 왠지 아름다운 느낌이 오래 남는다.



유진 오닐 <느릅 나무 아래 욕망>


희곡하면 또 유진 오닐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데, 그냥 묻히기에는 아깝다. 줄거리는 굉장히 흔할 수 있는데, 작품을 이루고 있는 분위기가 상당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그의 <밤으로의 긴 여로>와 비슷하지만 욕망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와 조금은 더 충격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비극적이면서도 슬프고 강렬하면서도 아름답다.



제임스 설터 <어젯밤>


이 책은 벌써 몇 년 전에 읽고 리뷰를 엄청나게 흥분해서 썼던 기억이 난다. 그해 발견한 작가 중 하나로 꼽고 난리도 아니었다. 설터의 책도 원서로 구해서 읽어보고 싶었다(‘이 작품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내겐 최고의 작품이라는 증거).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구구절절한 문장도 싫고, 작가가 크게 개입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도 싫다.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읽는 사람이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는 작품,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예리한 작품을 쓰고 싶다. 단편 하나하나가 매혹적이고 강렬하다. 이 작품으로 나는 설터 작품이 출간되면 모두 사서 보는 지경이 되었다.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카포티 작품인데도 무서울까봐; 읽기를 미뤘던 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읽으면서 좀 오싹오싹해지는 부분이 꽤 있었다. 인간이 잔혹해지려면 이렇게 잔혹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인간의 본성이 원래 악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계속 생각해보지만 쉽게 결론 내리기는 힘들다. 실제 살인 사건을 집요하게 취재하고 그걸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소설화한 카포티의 재능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흥미진진하게 읽다 보면 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갖가지 질문이 남는 묵직한 작품.



세르게이 도블라또프 <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블라또프’- 그의 작품을 여럿 읽어보고 싶은데 아직까지 국내 번역된 작품은 이 단 한 권 뿐인 듯하여 무척 아쉽다. 러시아 소설하면 왠지 무겁고 심오하고 이념적일 거라 여겨져 선뜻 읽기가 꺼려지는데 도블라또프의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단편이라 읽기 부담 없고 유쾌하다. 그러면서 감동적이다. 체호프보다 더 힘을 뺀 스타일의 단편이랄까. 낄낄낄 웃다보면 왠지 코끝이 찡하고 슬퍼진다. 사회주의 체제와 이념이 인간에게, 인간의 삶에 남긴 상처를 톡톡 건드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밀란 쿤데라 <농담>


세르게이 도블라또프의 <여행가방>이 체제나 이념이 인간의 삶에 남긴 상처를 가볍게(유머러스하게) 톡톡 건드리고 있다면 쿤데라의 <농담>은 묵직하게 정면으로 그 문제를 건드린다. 아주 가벼운 ‘농담’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경직된 사회, 이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이 어긋나버리는지 이 작품은 보여준다. 등장 인물간의 사랑이야기도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어 묵직한 주제를 다뤘음에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읽은 쿤데라 작품 중에선 가장 좋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아가씨와 철학자>


이 책 역시 굉장히 좋았다. 피츠제럴드 작품 역시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든다(원서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 많아지는 건 좋기도 하지만 꼭 좋지만은 않아 ㅋㅋ). 이 책의 서문에서는 여기 담긴 단편은 대부분 피츠제럴드 초기작으로 좀 질이 떨어진다고 했던데 이게 질이 떨어진다니!! 나는 여기 실린 단편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모든 인생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다 뒤로 한 번 물러나는 일이 바로 이 한 문장,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생겨나죠.”처럼 낭만적인 문장들이 넘쳐난다!



미시마 유키오 <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작품 중 <금각사>랑 갈등 하던 끝에 <사랑의 갈증>을 최종 선택. <금각사>도 좋았지만 왠지 이 작품이 더 끌린다. 일단 미시마 유키오가 여자가 아님에도 ‘여자’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크게 주고 싶다. 어찌 보면 삼류 로맨스 드라마 같은 내용인데도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좌절됐을 때의 인간 심리, 행동 등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어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서걱서걱 모래밭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계속 잊히지 않는다.


존 치버 <팔코너>


존 치버의 <팔코너>는 읽었을 때 이건 베스트 감이야! 하고 알 수 있었던 작품이다. 예전에 읽어서 자세한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감옥에 갇힌 마약 환자의 이야기로 사람들이 흔히 보고 싶어하지 않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꽤 공감이 간다.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도 알게 모르게 생기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나보코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수다쟁이다. 그것도 나르시시즘 쩌는 수다쟁이. <롤리타>의 험버트가 그랬고, <절망>의 주인공 역시 그렇다. 그런데 왠지 그 수다가 밉지 않다. 자기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일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이 생각나면서 어떤 면에서는 그 작품보다 훨씬 매혹적으로 기억된다. 나보코프의 작품은 다른 작가가 썼으면 굉장히 흔했을 소재인데도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그게 작가의 개성이고 곧 역량이겠지.


줄리언 반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작품은 언제나 굉장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 작품은 특히 더 그랬다. 낄낄낄 웃음이 나는 부분도 많았고, 심각하게 그래서 인류의 역사란 대체 뭘까? 하고 생각하게도 한다. 줄리언 반스는 해박하고, 재치 있으면서 위트있고 그러면서도 잘 쓴다. 역사란 어차피 전하는 자의 취사선택에 따른 픽션이 아닌가?! 누가 보기에 따라 그 역사는 진실일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줄리언 반스는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 해봤다.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더블린 사람들>을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을 내가 이토록 아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내가 어떤 단편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한 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더라. 게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으로 또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고. 작품 속에서 작가는 완전히 사라지고 텍스트는 한없이 열려 있고, 그러니까 독자는 한없이 즐거워진다. 꼭 다시 읽어 볼 작품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의 또 다른 작품인 <이별 여행 / 당연한 의심>과 <초조한 마음>을 두고 막판까지 고민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최후의 손을 들어 줌. ㅋㅋㅋ 재미면에서는 최고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작품. 이 책은 예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연민>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나는 그 책으로 읽었다. 그즈음 읽었던 포스터의 <천사들도 발 딛기 두려워하는 곳>과 함께 ‘아아~ 책 읽기란 정말로 재미있어! 즐거워!’라는 감정을 흠뻑 느끼게 했다. 사람의 심리를 정말 꿰뚫어 보고 있는 이 작가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싶어졌던 그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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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4-12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터의 <어젯밤>은 정말 소설집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입니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읽기는 시작했는데 초반에 깔짝거리다가
더 진도를 못내고 있네요.
줄리언 반스의 책도 그렇고요.

카포티의 책도 도전해 보고 싶네요.

설렉션 잘 보고 갑니다.

잠자냥 2017-04-12 16:14   좋아요 0 | URL
네, 설터의 <어젯밤>은 그의 작품 가운데 저도 최고로 꼽습니다. 츠바이크의 저 작품이나, 줄리언 반스 작품은 초반을 잘 넘기시면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ㅎㅎ 꼭 다시 읽어보세요! 카포티의 책도 그러하고요.

즐거운 봄날 오후 보내시길 바랄게요~

자목련 2017-04-1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은 두 권뿐이네요. 저 역시 제임스 설터가 있어 좋고, 소장만 하고 있는 책도 보여 반갑네요. 궁금한 책도 있구요, ㅎ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추천해요.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도 좋고 장편도 다 좋아요.

잠자냥 2017-04-13 09:41   좋아요 0 | URL
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좀 늦게 만난 편인데 <그저 좋은 사람> 읽고 홀딱 반해서 장편도 읽어보려고 몇 권 사두었습니다. ^_^

cyrus 2017-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대방한테 책 추천 안 해요. 상대방의 독서 취향을 맞춰가면서 책을 고르는 일이 어려워요. 게다가 책을 소개해봤자 상대방이 그 책을 한 번이라도 읽을지 알 수도 없어요.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한 번 도전해보세요. 계속 읽어보면 아스트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7-04-14 09:18   좋아요 0 | URL
네 조목조목 맞는 말씀입니다. 책 추천처럼 어려운 것도 없어요. ㅎㅎ 정말 상대방이 그래서 읽었을지도 의문이고요. ㅎㅎ
<율리시스>는 언젠가.... 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17-04-13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 콜드 블러드와 어젯밤 꼭 읽어 보고 싶네요. 책 추천 잘 봤습니다.:D

잠자냥 2017-04-14 09:18   좋아요 0 | URL
네~ 두 작품 모두 훌륭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