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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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 붐에는 현대 역사에서 전쟁과 패전 이전의 한 시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개인의 고통과 위안에 대한 관심이 부활되기 바라는 일본인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 소설가로서 그는 광적인 변화를 가차 없이 수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자신의 균형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묘사하는 데 달인이었다. ...... 또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마주했던 지적이고 심리적인 위기들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런 위기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딜레마(고통스럽고 불가항력적인 `현대화`와 `서구화`의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옹호할 것인가?)의 최종 단계에 불과하다. 소세키는 그와 같은 문제를 탁월한 감각을 표현했다. (237)

이렇듯 권위주의적으로 위로부터의 강력한 지도에 의해 현실을 180도 바꾸어 버리는 방식은 일본에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었고, 미국 개혁자들이 일본 점령 정책에서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전형적 미국인이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 정치극의 감초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군주, 벽안의 쇼군, 가부장적인 군사 독재자, 허풍기 있고 솔직한 가부키 주인공이었다. 맥아더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하게 연기했다. (255)

전쟁 중 군정 임무를 예상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이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대개 일본 이외 지역에 파견되었다. 맥아더와 부하들은 이러한 인재들을 달가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 부임한 이들 중 몇몇은 오키나와로 쫓겨났다. 이는 미국판 강제 수용소로 추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대오키나와 정책이란 개혁이 아니라 전쟁으로 황폐해진 오키나와 군도를 난공불락의 군사 기지로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어가 가능하고 똑똑한 젊은 미국인은 요코하마의 제8사단 사령부에 배치되어 점령군의 업무 중에서 가장 말단인 지방 정부, 즉 현 수준의 업무를 떠맡았다. 최종적으로 맡은 업무가 무엇이었던 이들은 중요한 정책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284)

마루야마를 비롯한 많은 학자와 문화인들에게 패전과 점령은 ... 과거에 대한 깊은 회한과 뒤섞인 미래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패전과 점령이란, 국가의 가공할 만한 권력과 감언이설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자책감을 껴안을 채 맞이한 정치적, 지적 해방이었다. ... 마루야마의 말처럼, 그들은 새로이 출발할 것을 맹세하고 점령기의 `배급받은 자유`를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양하고 민주화를 위한 자발적 운동으로 전환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299)

5월 중순의 이 사건들은 이데올로기 면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민중의 저항은 대체로 천황에게 바치는 호소문의 형태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 천황이 그렇게 해 주기만 한다면 일본을 굶주림과 황폐함으로 내몰았던 타락한 정치가, 관료, 자본가 및 지주를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할 노동자, 농민, 사회당원, 공산당원의 통일전선을 지지해 주기를 천황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339)

연합군의 고위 장교들과 고위 민간인 관리들에게 황실 오리 사냥은 외국 땅에서 즐기는 귀족 생활이라는 잠깐의 막간극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황실 행사에서는 손님들에게 황실의 열여섯 개의 국화 잎 문장이 새겨진 작은 칠기 상자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미국의 언론들이 일본의 `미국화`를 킬킬거리며 외쳐 대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조용하고도 능숙하게 미국인들을 일본화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정복자를 정복한다는 도전적 과업의 일환이었다. (388)

천황이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모습은 대중 사이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인들은 국익을 증진시키지 못한 데 대해 일일이 천황에게 미안해하도록 사상이 주입되었다. 천황의 순회는 바로 자기 비판과 사죄의 대중 심리를 환기한 것이었다. ... 이리하여 천황에 대한 경외심이 모습을 바꾸어 재등장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430-1)

본질적으로 보수파들은 인민주권이란 말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를 일본 국적자에게 제한하는 것을 노리고 `고쿠민`이라는 말을 썼다. 미국은 `모든 사람들(all persons)`이 법 앞에 평등함을 인식시킨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GHQ 초안에는 인종이나 국적에 의한 차별을 명확히 금지하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토와 동료들이 언어 유희를 통해 이 보장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고쿠민`을 `모든 일본 국적자(all national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부는 대만, 특히 조선 식민지 출신의 수십만 신민들에 대해 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정이 지니는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성격은 의회 심의 과정에서 `용어상`의 수정을 거치면서 강화되었고, 이것은 1950년에 의회를 통과하게 될 차별적 입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50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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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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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점령의 가장 악질적인 유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인 아시아 인들의 존재가 패전한 일본 땅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인, 조선인, 인도네시아 인, 필리핀 인들은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제대로 된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제국 육해군을 패퇴시키는 데 아시아 인들의 수행한 역할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한 미국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버렸다. 아시아 인들에게 돌아갈 영광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식민지화와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저질러진 갖가지 범죄들은 더더욱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21)

이후 몇 년간 이어날 모든 일은 일본의 이와 같은 철저한 패배라는 상황 인식을 바탕에 깔고 진행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편으로는 놀라운 회복력과 창조성, 구세계의 멸망을 보고 신세계를 그려 내기를 강요받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이상주의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과 냉소주의, 기회주의가 뿌리 내리고 가지를 쳤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들이 천황의 성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박살 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위해 에너지와 상상력과 의욕을 활용하려한 일본인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어찌 보면 그리 놀랍지만은 않을 것이다. (44)

인종과 문화라는 요소도 일본과 독일을 구별했다. 독일과 달리 새로이 정복된 일본은 비백인, 비서구, 비기독교적인 이국적 사회로 비쳤다. 황인종 아시아 인의 이교도 국가 일본은 무기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비쳤으며, 독일과는 달리 인종적 동정심, 기독교적 소명 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나치즘이 성숙한 `서구` 사회의 암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달리 일본의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는 원래부터 암적 존재인 봉건적이고 동양적인 문화의 정수로 비치기도 했다. 미국의 개혁가들이 위로부터 민주 혁명을 추진하면서 느낀, 육욕만큼 강렬한 감정은 동방의 적대자를 개조하여 서구 기준으로 최소한의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드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89)

은닉 물자로써 이익을 취하는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 암시장을 활보하고 있다." 고 진술했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피해자 의식이 뿌리를 내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피해자 의식이란 다수 일본인이 스스로 전쟁의 최대 피해자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눈앞에서 보고 겪는 갖가지 고통은 제국 군인이 해외에서 외국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이야기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훨씬 알기 쉬웠다.
......
..., 이즈음 수백만의 일본인들은 막연히 세상을 한탄하기보다는 명백한 목표를 향해 응시하기 시작했다. 패전은 특권층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자아냈고 빈곤은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 지식인들은 마치 내일이란 날은 없는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한편에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사랑`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를 어떻게 새로이 형성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바로 이 시기, 전통적 권위에 맞서는 도발적 도전자로 등장한 것은 `데카당스(타락)`였다. (140-2)

`판판`들은 또한 전후의 선구적인 물질 만능주의자와 소비자의 전형이기도 했다.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은 때로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굶주림과 물자 부족이 사람들을 짓누르던 시절에 미국인들이 누리던 물질적 풍요는 보기만 해도 압도될 만한 것이었다. 미국이 `위대`한 것은 미국이 부자 나라이기 때문이었고, `민주주의`가 매혹적인 것은 그 길을 따라가면 풍요를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보통 사람들 중에서 `판판`만큼 대담하게 정복자의 보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이들은 달리 없어 보였다. ...... 바로 이 `미국`이 내뿜는 매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토키의 입술을 장식한 밝은 립스틱과 현란한 색상의 의상은 그저 매춘부의 상징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이야말로, 전쟁 중의 근검절약 생활을 강타한 미국적 매력과 유행이라는 숭배 대상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163)

위아래 할 것 없이 부패한 체제 하에서는 정치에 대한 신뢰나 전국 각지에 울려 퍼지던 `민주화` 구호에 대한 확신이 생길 리 만무했다. 더불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글의 법칙이 횡횡하는 `자유 시장`의 성격은 일본인들에게 상부상조라는,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가족`의식으로 맺어져 있다는 사상 주입을 박살내는 충격 요법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 "대화민족의 단결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혈연도 무시했으며, 정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황의 인간 선언이나 점령군이 공포한 자유화와 민주화 정책들은 모두 암시장에 모인 어두운 얼굴들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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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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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새 봄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52)

12일 맑음.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149)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또 면의 병세가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 애타는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유상(유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89)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 또 유 상의 점을 쳐 보니, ...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189)

20일 새벽 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나 비가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바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205-6)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19)

어두울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많이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 좌시할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329)

늦게 두 조방장과 충청 우후를 불러다가 상화떡(床花餠)[각주57]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335) [각주57] 상화병(霜花餠). 밀가루를 수로 반죽하여 발효시킨 다음 거피팥소를 넣고 쪄서 만든 음식. 상화는 고려 시대 때 원나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중국 사신에게 대접하던 명물 음식의 하나였다. ... 제사에도 썼던 기록이 보인다. "여식이 제사 후에 상화병 한 상자를 얻었다." (496)

6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와서 이토록 근심하고 애달파 한 것이니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라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 (363)

비가 계속 내렸다. 아침에 출발하려다가 비가 이토록 오니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고 있을 때쯤 ... 길을 물어보자 출발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여 그대로 묵었다.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돌려주었다.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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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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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와 생활을 간략 기록한 외면일기. 워낙 public-minded에 원칙과 행동만 인정하고 빈말 꼼수 이중언어 형이상학은 질색하는 사람. 의외인 것은 식은 땀 등으로 자주 몸의 불편을 호소한 것과 새벽녘 꿈을 꼭 일기에 적은 것, 점을 자주 친 것. 즉 그는 직관 운명 영성에 열려 있었던 사람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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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하 대장정 - 운하,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길
원종태.원종선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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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각자에겐 자기만의 중국이 있다. 이 형제의 중국은 나의 중국과는 아주 다르지만, 이렇게 자신의 중국을 표현하고 나누는 작업은 가치 있으며 앞으로 더 다양하고 두텁게 축적되어야 한다. 아무 배움도 연출도 없는 사진들이 오히려 중국에서의 생활을 떠오르게 하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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