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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chelle > 요시다 슈이치
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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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 침대에 누워 편하게 몇 장을 넘기다 아...이거야. 이런 느낌이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야라고 절실히 느끼며 오랜만에 별 4개짜리를 찾았다.  즉시 요시다 슈이치의 모든 작품을 보관함에 옮겨담았다. 점심을 공원에서 먹는 직장인과 연상의 여자가 플롯의 핵심인데 그보다는 공원을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과 묘사가 좋다.
>> 리딩포인트 : 파크라이프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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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뽀스 2005-04-19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크라이프를 꿈꾸는 사람 여기 또 있다! 참 기분좋게 읽었던 책
(역시 우린 취향이 비슷해 ^^)

s0da 2005-04-1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뽀스가 강추를 하니 읽어보도록 함세~

DJ뽀스 2005-04-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나는 니가 쓴 리뷴줄 알았넹. 깔끔허니 괜찮다. 읽어봐 ^^:
 
 전출처 : balmas > 이제는 개정판을 낼 때도 되지 않았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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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하루빨리 좀더 많은 작품이 번역,소개되어야 할 사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필가, 철학자, 문예이론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아마도 20세기 전반기의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놀라운 이미지 이론과 매체 이론이 그렇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학과 유물론, 또는 신학적 유물론이 특히 그렇다.
   이 분야의 글로는 말년에 씌어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보통 [역사철학테제]라고 번역되지만―와 초기의 단편 한 두개만이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파리 아케이드](“Passagen Werk”)를 비롯한 이 분야의 글들은, 좀더 체계적으로 소개된다면, 벤야민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사상적 지형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릴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지난 20여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힌 벤야민 번역본이다.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아직 생소했던 시기에, 더욱이 군사독재의 엄혹한 탄압이 짓누르고 있던 시기에, 난해한 벤야민의 글들을 짜임새 있게 묶어서 소개한 공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벤야민을 번역해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겹고 생색이 안 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벤야민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문장들을 틈새 없이 조밀하게 이어주는 깊은 논리전개를 따라잡아야 하고,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본문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지만 벤야민이 매우 친숙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이론들, 이데올로기들의 유래를 추적해서 밝혀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번득이는 통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두었다가 옮겨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이 이 번역본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역자가, 20세기 독일 지성계의 귀중한 유산을 번역, 소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반성완 교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번역가의 과제] 앞부분에 해당하는 320쪽의 논의를 보자.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상대적 개념들은,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들에게만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만 그 자체의 가장 좋은 의미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삶이나 아니면 잊을 수 없는 순간―비록 우리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이라는 말을 운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러한 삶이나 순간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요구를 할 경우,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이 말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며, 나아가서는 동시에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들]은 원문이 'Relationsbegriffe'이니까 [관계 개념들], 또는 [관계적 개념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건 매우 사소한 문제다(하지만 321쪽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다). 맞줄 사이의 [우리]도 'alle Menschen'의 번역이니까 [모든 인간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역시 사소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인간이 부응할 수 없는 요구]로 고쳐야 하고,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을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으로 고쳐야 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다. 번역문만으로는 벤야민의 논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언어적 형상의 번역성 여부는, 그것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도 [비록 '어떤' 언어적 형상물들이 인간에게는 번역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수정되어야, 앞의 논의와 일관성있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321쪽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은 그것이 번역될 수 있음으로 해서 번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원전의 번역 가능성 덕분에 원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와 같이 주어를 바꿔 번역해야 역시 논의의 문맥이 이해될 수 있다. 이것들은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이 있고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런 문제점은 수도 없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벤야민 전공자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벤야민 저작의 번역이 이처럼 더딘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제 제대로 번역된 벤야민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게 단지 나의 바램만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니면 이 일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벤야민 전공자들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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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브리즈 > 보는 것은 의미를 만나는 일..
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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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은 미술, 문학, 인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대한 섬세한 직관과 깊이 있는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요한다. 그의 사상의 기반은 기실 삶에 대한 존중이나 거부를 미룬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엔 글쓰기가 가진 권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과 작품 그 자체에 몰두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사진과 그림을 매개로 '보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미술이나 사진의 차원에서 논의를 하지 않고 '보는 것'의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거나 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과 의미들이 풍부히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1부인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는 한 편의 글(1부 제목과 같은)만으로 이뤄져 있는데, 책의 서두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핵심인 '보는 것'이 띠고 있는 다양한 의미의 시원(始原)을 암시하고 있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구경하게 된 역사적 배경, 의미 등을 짚으면서 그는 '보는 것'이 '격리' '거리두기'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덧붙여 그는 강제적으로 주류 밖으로 밀려나간 '빈민가' '판자촌' '정신병원' 들의 장소도 동물원과 닮았다고 말한다. 마치 푸코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부분인데, 푸코가 인간의 이성이 가진 횡포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과 야유를 보여주었다면, 존 버거는 철저히 '보는 것'의 대상으로서 동물을 한정하고 있다).

2부에서는 '체험된 순간'을 기록하는 것으로 카메라의 의미를 파악하는 한편, 시골 농부들의 정장 차림에 숨어 있는 사회적·기호적 의미를 드러내는가 하면, 전쟁 사진을 거부하는 일반인의 태도를 문제삼는 등 흥미로운 글쓰기를 이어간다. 책의 본령인 3부에서는 쿠르베, 터너, 마그리트, 로댕 등의 작품세계를 살피면서 각 화가의 개성적인 면모를 다양한 주제로 변주하며 설득력 있게 해석해내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은유적으로 담겨 있는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할 듯하다.

들판의 존재는 그 사건들이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건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모든 사건들은, 그것들이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 덕분에 정의될 수 있는 사건들로 존재한다. -284∼85쪽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존 버거가 '보는 이'와 대상과의 교감을 말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되었다. 의미는 '거기' '그대로' 있을 뿐이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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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주세윤 > 여러갈래의 말에 대한 해석을 위하여
지식의 고고학 현대사상의 모험 3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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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란 무엇인가, 를 설명하기 위해서 푸코는 [에피스데메]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언어 즉 말 속의 의미는 한 층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층위가 작용을 하면서 말에 권력이 붙을 수도 있고, 같은 말이라도 말에 대한 권력이 전혀 안 붙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관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단어와 그 당시에 재야로 있던 함석헌옹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서로가 매우 다르게 해석이 될 수밖에 없고 권력 또한 매우 상이한 방향에서 작용을 하게 된다는 논리일 것이다.

그런 여러가지 층위를 고고학적으로 해석해 들어갈 때에 사용되는 최대의 도구로서 [에피스데메]가 사용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 어떤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직접적인 뜻보다는 말이 가지는 여러가지 층위를 이해집단에 따라서 아전인수로 해석을 해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을 입체적인 층위를 가지고 여러가지 층위에서 해석을 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운다는 것은 그러나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어렵기에 그거을 해야된다는 당위성도 필요한 것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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