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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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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공부하고 노력해도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 어머니의 유년시절이나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사라진 공간, 역사적 장소 같은 것 말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와 기록을 토대로 그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 시간, 그곳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서명숙의 『영초언니』를 읽으면서 그랬다.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안다고 할 수 없는 삶이 거기 있었다.

 

 어린 시절 세상의 소식은 오직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선거, 투표, 정치는 어른들의 것이라 여겼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자세하게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운동권이라 불리는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통해서 나와 닿지 않았던 세상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상, 나른 세계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봐도 창피하고 부끄럽다. 

 가닿을 수 없는 그곳엔 철없고 무지한 대학생이었던 나와는 다른 서명숙과 천영초가 있다. 고대신문 기자였던 79학번 서명숙이 71학번 천영초를 만난 건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영초는 담배를 처음 알게 한 나쁜 언니였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 스승이자 멘토였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능동적인 변화를 이끄는 시작에 영초언니가 있었다. 대학교 4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학과 공부가 끝나면 술이나 마시러 다니던 내게 여학생들의 모임인 ‘가라열’은 매우 경이로웠다. 함께 생각을 나누고 세상을 말할 수 있는 여자들, 얼마나 멋진가. 

 ‘가라열은 남자들의 제국 고대 사회에서 유일한 해방구였고, 꽉 막힌 유신체제에서 가느다랗게 열린 숨구멍이었고, 우리 여자들의 대안학교였다. (…) 우리는 가라열에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여자들끼리의 수다도 얼마든지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58쪽)

 그 멋짐은 독재정권을 고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영초언니의 자취방에서 등사기로 유인물을 찍어내고 시위에 참여한다. 가라열에서 가장 조용했던 이혜자 언니가 시위를 주도하고 독재 타도를 외치는 모습은 잔 다르크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교과서를 통해 읽은 기록과는 달랐다. 비겁하고 비열하게 잠복하고 미행하는 형사들, 시위대를 가혹하게 진압하고 고문하는 장면은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하고 아파서 읽을 수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저자가 형사에게 연행되어 서울로 올라 와 눈을 가린 채 밀실에 도착해 시작된 치욕스러운 시간. 고통스러운 신체 고문과 영초언니와 동료를 배신하게 만들려는 형사의 세뇌에 지쳐 자살을 감행한다. 나는 조금이나마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통제와 감시로 일관된 유신체제의 삶을, 뜨겁게 타오르던 청춘의 몸짓을. 

 서로를 걱정했던 영초언니와 저자는 구치소에서 안부를 확인한다. 그러나 너무 짧은 해후였다. 영초언니는 독방으로 저자는 다른 방에 수감된다. 감옥에서 236일 동안 인간 이하의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영초언니와 저자의 앞에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자 박정희는 암살되었지만 다른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1980년 짓밟힌 광주를 목도한 영초언니의 삶은 다른 곳을 볼 수 없었다.  

 무엇이 그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이었을까?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과 그것을 함께 나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영초언니』속에서 만난 익숙한 이름들, 그리고 그들의 현재 행보. 기억에서 꺼내기에 너무 아픈 과거를 밟고 우리는 살고 있다. 이민을 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뇌를 다치고 기억을 잃고 어린아이가 된 영초언니와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가라열 멤버와 그 시대를 건너온 이들도. 

 저자가 고통과 악몽 속에서 건져올린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잊어서는 안 되는 현대사를 직시한다. 70년대와 80년대 치열했던 민주주의 투쟁사. 그 안에서 피어난 영초언니와 저자의 우정. 운동권 여학생들의 거룩한 연대. 가닿을 수 없는 그 현장에 나는 서 있는 듯하다. 완벽하게 가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들었던 마음과는 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스스로도 가능하기 힘들었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고 호적에 빨간줄’ 그어지는 걸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꾼의 자세를 견지할 자신도 없었다. 그 어느 쪽도 내가 결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76쪽)

 영초언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저자가 처음 시위 대열에 참여하기 전 마음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이제는 내가 택하고 지향해야 할 길이 어느 쪽인지 분명하게 안다. 정확하게 몰랐던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음을 믿는다. 천영초 란 한 여자를 기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응원하겠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 삶에 가까이 가닿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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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읽었을 때 더 좋은 소설이 있다. 기세를 몰아 그 소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이 그랬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애정으로 작성된 것이다. 물론 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선릉 산책』에는 좋은 소설이 많았다. 김애란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정미경의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특히 그렇다. 권여선, 김숨, 최은영, 최진영의 소설을 뒤로하고 정미경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은 제목 그대로 선릉 산책이다. 스무 살 자폐아 한두운과 함께 선릉을 산책하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머리에 헤드기어를 쓰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난 한두운. 침을 뱉는 습관이 있고 식탐이 많은 어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그저 주어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선릉이었다. 선릉역에 선릉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선릉이 있었고 한두운과 하루를 보낼 수 없을 듯했지만 그와 하루를 보냈다. (쓰고 나니 이상하고, 내가 쓰려고 했던 게 이게 아닌데 싶다.)

 

 ‘숲 속으로 낮이 사라지고 있다. 그늘이 넓어지고 대기가 희뿌옇게 변했다. 한여름 늦은 오후가 이렇게 어두워질 수도 있나. 구름도 바람도 없는데, 태양은 저리도 맹렬한데 왜 숲은 어둡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한두운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윤곽선도 없고 희미한 얼룩 같은 것도 없었다. 곰곰 생각하니 걷는 내내 그림자를 본 기억이 없다.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았다. 선릉에서 정릉으로 정릉에서 다시 선릉으로. 한두운은 중력 없이 저항 없이 허공에 한 뼘 떠서 쭉 미끄러지듯 걸었다.’  (「선릉 산책」, 32~33쪽) 

 

 한두운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것들을 이름을 호명하고 나무 각각의 이름을 말한다. 나무의 이름을 모두 알다니, 그것이 나에게는 신기한 광경으로 보인다. 일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에게 한두운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이다. 한두운은 혼잣말을 하거나 침을 뱉는 행동으로 인해 시비가 붙기도 한다. 나는 그저 정해진 시간이 빨리 흘러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그가 맨 가방을 메보고, 헤드기어를 벗은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견디는 하루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두운을 돌봐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나와는 다른 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 외의 다른 이들은 모두 나와 다르다. 그러니 한두운에게 특별한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짦은 하루 동안 내가 한두운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나와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와의 산책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하게 선릉을 걷고 걷는 모습을 상상하는 네게도 말이다.

 

 정미경의 「희미하게 새벽까지」는 송이를 기억하는 유석의 이야기다. 유석의 사무실에 정수기를 팔러 왔다가 일을 하게 된 송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내세울 게 없어 무시당하고 잔심부름 만 하던 송이.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고 지내던 송이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유석은 송이를 떠올린다.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그녀가 했던 말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늦은 밤 사무실 근처 놀이터에서 모과나무를 안고 충전하는 중이라던 송이, 떨어진 모과를 주어오자 안고 자겠다며 달라고 했던 송이. 함께 살지 않는 어머니와 장애인 동생에 대해 송이는 말한다. 유석도 아픈 아버지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를 서로에게 쏟아놓았던 새벽. 그 밤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을까. 그 밤이 그들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매정하게도 송이는 나무를 끌어안고는 맞장구 한번 쳐주는 법이 없었고 유석은 미끄럼틀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밤이 몇 번이었더라. 송이는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그 나무였다. 나무를 껴안고 잠든 듯 가만히 있을 때도, 웃음 명상이라도 하듯 혼자서 하하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자꾸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열시나 나갔더니 선글라스를 끼고는 나무를 안고 있었다. 꺼멓긴 한데 렌즈가 크진 않아 어찌 보면 맹인용 안경 같았다. 그런 심오하게 웃기는 광경이었는데 왜 그걸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359쪽)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낀 채로 모과나무를 안고 있던 송이.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달이 더 있던 놀이터는 줄이 한량없이 긴 괘종시계의 추처럼 예고 없이 스윽 나타나곤 했다. 날것의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 어떤 석연치 않은 순간, 그리고 또……. 그 새벽에 송이는 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새벽에 유석이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새벽까지 희미하게」, 378쪽)

 

 어떤 시간은 당시에는 소중함을 모른다. 나중에라도 그 소중함을 알면 다행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절에 만났던 사람, 어느 시절에 잠시 잠깐 스쳐 지났던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 존재였는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미련하게도 우리는 그렇다. 정미경의 소설이 내게 그러한 소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의 문장에 반했고 문장을 흠모하고 흠모했던 시절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 일부가 되었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걸. 정미경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다른 곳으로 초대했다. 그곳은 내게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특별했고 소중했다. 아프리카의 붉은 분홍 사막을 상상하게 만들고 발칸반도(『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찾게 만들었다. 나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힘이었다. 쓰고 싶게 만들었다. 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것이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에 충만했다. 쓴다는 행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았다. 쓴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배운 것이다.


  정오의 사막은 붉은 분홍이다.

 이 시간엔 부러 그렇지 않아도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천지는 고요하고도 소란하다.

 와랑와랑.

 햇빛은 빛나는 동시에 속삭이며 부서진다.

 모래가 잔뜩 삼킨 열기운을 붉게 토해내면 대기는 부옇게 산란하며 뒤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아프리카의 별』, 7쪽)

 

 오래 기억하고 싶은 소설을 만나는 건 쉽고도 어렵다. 정용준의 『가나』,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읽고 내 안에 스며든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힘들도 고통스러운 일상, 속물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시간의 연속. 그럼에도 우리는 살고 있다. 결핍을 채우며 저마다 닿고자 하는 그곳을 향해 나간다.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 변화를 꿈꾸는 날들. 때로 그 위대한 것들이 소설에서 파생되기도 한다. 정미경의 유작 장편소설『가수는 입을 다무네』 에서 만날 그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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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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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계속 읽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놀라고 놀란다. 무감한 표정에 숨겨진 애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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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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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기억은 소멸한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지워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일부러 기억에서 지운다. 그렇다면 상처로 남은 기억을 간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슬픔을 기억하기 위해 슬픔 속에서 사는 이 말이다.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한 방 안을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와 달리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날들의 조각으로 이어진 백수린의 『참담한 빛』을 읽고 나는 남겨진 자의 슬픔을 생각했다. 낯선 공간, 낯선 누군가에게서 불현듯 튀어 오르는 어느 시절의 아련한 기억. 그 기억에 의지해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말이다.

 

 기억 밖에 살다가 기억 안으로 소환되는 사람들, 백수린의 소설 속 인물은 그렇게 서로 만난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도 만난다. 일로 이어지는 만남이거나 누군가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만난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말이다. 삶은 소설이라고 했던가. 그 만남의 배경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시차」속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이모에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들이,「길 위의 친구들」에서 오랜만에 만난 여행을 떠난 대학시절 친구에겐 내가 모르는 시절이, 「참담한 빛」속 인터뷰를 위해 만난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만남은 짧고 단발적이며 나중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서로에게 서로를 보여주는 시간이 된다. 모든 걸 다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그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남겨둔다. 처음 만난 사촌 오빠를 보면서 이모의 비밀을 생각하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면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저 서로를 향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꽃이 피고 진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마른 가지에서 또다시 움이 튼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단지 그런 것뿐인지도 몰랐다. 시간의 흐름이 허락하는 선한 치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시차」, 53쪽)

 

 어떤 만남은 그 자체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앞으로 살아갈 날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조만간 시력을 잃게 되는 아버지의 첫사랑의 딸을 만나는 「북서쪽 항구」에서 나와 레나의 만남이나 외할아버지의 재혼으로 외할머니, 삼촌, 사촌이 새로 생긴 「중국인 할머니」에서 새할머니와 나의 만남은 상처이면서도 위로였다.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으로 살면서 견뎠을 어떤 시간의 고통과 고독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러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랑하는 이들의 상처를 확인한다. 「참담한 빛」에서 영화잡지 기자인 정호가 다큐멘터리 감독 아델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아델의 터널공포증을 앓게 된 계기를 듣는다. 아델이 로베르를 잃고 나서야 그의 지난 삶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정호는 늦게나마 아이를 유산한 아내의 슬픔에 조금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나는 호숫가에서 서서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다가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황홀한 정도로 아름답다, 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예요. 지난해까지도 매년 독립기념일이면 이곳에서 불꽃이 터지는 장관을 함께 구경하던 로베르를, 두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말이죠. 이렇게 살아지겠구나. 시간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치유일까요. 초이, 나는 그제야 비로소 로베르가 왜 그토록 치유되는 걸 두려워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로베르를 보낸 뒤 처음으로 울었어요. 아이처럼. 호숫가의 한가운데, 희미한 빛의 한복판에서요.” (「참담한 빛」, 177쪽)

 

 자신의 삶에 빛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온통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빛이 있기에 가능하다. 고통과 상처가 지난 자리를 채우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선명하게 삶을 지배하는 고통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이해하는 완전한 삶은 없으니까. 다만 살아내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기를, 누군가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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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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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를,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아지기를, 전보다는 더 괜찮은 삶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아진다는 건 어떤 삶일까? 누군가에게는 두툼해진 월급봉투와 좀 더 넓은 집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저녁이 있는 삶일지도. 그리고 누군가는 어제와 같은 오늘 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변화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럭저럭, 혹은 그냥저냥 살아가는 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완전하게 나아지는 삶은 아닐까. 정이현의 소설 속 인물이 그러했다. 크게 화를 내지 않고 크게 절망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바라는 이들. 나빠지지 않고 현재를 유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과 내가 가치를 두는 삶의 기준은 같지 않더라도 말이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긴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서랍 속의 집」, 184쪽)

 

 도시적인 색깔, 도시인의 삶을 포착하는 정이현은 이번에도 그들의 욕망을 다뤘다. 양로원이라는 불안정한 직장에서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욕망 아닌 소망으로 살아가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하우스 푸어 신세를 지더라도 내 집을 장만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삶이 돼버린 「서랍 속의 집」,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위해 감정을 위장하고 관계를 정리하며 속물적인 삶을 선택하는 「안나」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알면서도 그것을 나눌 수 없었다. 고통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맨발로 혼자 버둥거리는 것과 비슷해서, 누가 손을 내밀면 조금 덜 어렵게 빠져나올 수 있어요.’ (「안나」, 219쪽) 결국엔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다.

 

 오늘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그것을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난과 질책을 가할 수는 없다. 그들 중 하나는 우리가 위장한 얼굴이므로. 자신도 모르게 임신을 한 고등학생 딸의 출산이 반드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아무것도 아닌 것」의 나와 친부를 죽이고 유산을 나눠갖자는 이복형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우리 안의 천사」의 부부에게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가면이 필요했다.

 

 그것은 일정한 거리두기로 이어진다. 거리를 두었을 때 고요하고 평온했던 풍경은 가까이 다가가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불편한 표정을 읽게 되니까. 적절한 거리로 서로를 관망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타인의 삶에 쉽게 개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키려는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삶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고양이 인형 샥샥과 함께 아버지의 옛 여자가 유산으로 남긴 거북이 바위와 살아가는 나에게 세상을 향한 거리는 더 멀어지고 욕망 또한 자라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일요일 늦은 아침, 침대에 누워 채소 샐러드를 먹으면서 바위와 샥샥의 목덜미를 번갈아 쓰다듬고 있으면 반드시 세계와 내가 이어져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33쪽)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균형감이 잘 잡힌 안정적인 소설집이다. 감정을 배제하고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할까.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였다. 습관적으로 웃으며 상대를 대하지만 결코 진심은 보여줄 수 없다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현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삶.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해내야만 하고, 대때로 전부를 걸기도 하는 우리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치 어떤 표정을 짓든 그대로 비추는 거울 속 얼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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